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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53화 (53/255)

53화. 땅굴

“너무 눈치 주지 마세요. 저도 좋아하니까.”

“네?”

“저도 이런 거 좋아합니다. 다만 지금은 너무 좋기도 하고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난감해서 그랬어요.”

난 굳어 있는 얼굴 근육을 매만지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부담스럽긴 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수백 명의 사람이 무릎을 꿇으며 내게 존경심을 표현하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 같아선 방방 뛰며 개다리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채신없어 보일까 봐 애써 참고 있는 중이었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남들보다 우위에 오르고 싶은 욕구.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마음속 깊은 속에 품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교 졸업장도 없고 변변한 직장도 없이 떠돌았던 난 지금 이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짜릿한 기분이 감돌았다.

“저희의 뜻을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성주로 추대하기 위해 뜻을 모으면서도 성주님의 성정 상 부담스러워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부담스럽긴 합니다. 근데 어쩌겠습니까. 제가 생각해도 제가 적임자인 것을.”

“네?”

“……?”

“……?”

지윤미 마스터와 각 길드의 수장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짐작건대,

‘저같이 부족한 사람을 이렇게 귀하고 막중한 자리에 추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충 이런 멘트를 예상한 듯싶다.

허나,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잘하는 게 있고 지금도 잘하고 있으면 잘한다고 하는 게 맞다.

오크들의 침공을 막아 낸 것도 모자라 역으로 오크들을 몰아내 부락을 차지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난 그동안의 삶의 경험으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있었다.

근데 여기서 내가 자신을 낮추면 그마저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다 바보로 만드는 것일 수도 있었기에.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니요. 성주님이 적임자이긴 한데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을 하실 줄은 예상치 못했어요.”

“네. 저도 말을 하면서 낯이 뜨겁긴 합니다. 근데 성주가 되자마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난 지윤미 마스터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고 되레 더 무례하게 비춰 질 수도 있었다.

보아하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성주로 추대하는 데 찬성한 거 같은데 여기서 내가 스스로를 낮추는 건 오히려 그들의 선택을 무시하는 처사일 듯싶다.

될 만하니까 추대를 시킨 거고, 나 역시 할 만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밖에서는 외국인이 길을 물어보면 ‘Go straight.’ 이라는 짧은 영어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손발을 사용하며 보디랭귀지를 해야 했지만 지금 여기선 충분히 성주로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듯했다.

도지사, 시장 아니 하다못해 구청장이라도 해 먹으려면 대학교 졸업장도 있고 기초 영어라도 할 수 있어야 했지만 여기선 필요가 없으니까.

게다가 난,

‘지구로의 귀환.’

이곳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뭔지 알고 절실히 공감하고 있었기에.

“다들 저랑 어디 좀 가시죠.”

“어딜?”

“가 보시면 압니다.”

난 사람들을 이끌고 바닷가로 걸어갔다.

얼굴을 보아하니 다들 희생자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 낸 것 같고 이제는 우리의 살길을 도모해도 될 듯했다.

“오셨습니까. 성주님.”

해안가에 도착하자 유거성과 기술직 헬퍼들이 열심히 나무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하늘 공원을 만들기 위해 숲을 개간하며 베어낸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이곳에 옮겨져 있었다.

“이것들이 왜 여기에 있죠? 아니 도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거죠?”

“배를 만들고 있습니다.”

“배요? 설마 저희가 알고 있는 그 배를 만들고 있다는 건가요?”

“네. 성주님의 지시로 배를 만들기 위해 은밀히 나무들을 선별하여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헐…….”

“헐…….”

지윤미, 장지원, 조성태, 최은빈.

건조 작업을 하는 것을 본 각 길드의 수장들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성주님이시네요. 지원군마저 오크들에 패배해 다들 자포자기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 살아나갈 방법을 준비하고 있으셨네요.”

지윤미가 존경스런 눈빛을 하며 날 쳐다봤다.

“헛험.”

그 눈빛이 뜨거워 난 헛기침을 하며 유거성에게 작업 현황을 물었다.

“어떻게, 나무를 선별하는 건 맞췄나요?”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분명 같은 나무인데도 어떤 것은 물에 뜨고 어떤 것은 또 물에 가라앉습니다. 당분간은 계속 나무를 물에 담가 보고 좀 더 많은 지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좋은 판단이네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허투루 해서는 안 될 거예요.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최대한 실험을 하고 기준을 만들어서 안전하게 만들어 주세요.”

“네. 그런 마음으로 하고 있는데 솔직히 걱정되긴 합니다. 이대로라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를 선별하는 것도 그렇지만 손질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유거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무를 손질하는 헬퍼들을 쳐다봤다.

별다른 장비도 없이 20m가 넘는 통나무를 손질해 모양을 유지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닌 듯했다.

게다가,

“저건 뭐죠?”

“대왕오징어 같긴 한데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 요 며칠 전부터 계속 저리 어슬렁거리더라고요.”

해안가 인근 바다에서 엄청나게 큰 그림자가 넘실거리는 게 보였다.

얼핏 봐도 우리가 만들려는 배보다 족히 다섯 배는 커 보였다.

‘운디네?’

-대왕오징어 맞아. 원래 심해 깊은 곳에 사는 놈들인데 여기까지 와 있네?

‘저게 정말 오징어라고?’

난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대왕오징어는 크다. 헌데 저건 커도 너무 컸다. 짐작건대 저 정도 크기면 웬만한 대형 고래랑 맞장떠도 이길 수 있을 듯했다.

-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더니 대단한데? 맞아. 저놈 배고프면 가끔 고래도 잡아먹기는 해.

어느새 어린 여자아이로 형상화한 운디네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렇게 얘기할 일이 아니야. 기껏 배를 만들어도 바다에서 저놈과 조우하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놈이 아니니까.

운디네가 날아와 안심하라는 듯 내 등을 토닥거렸다.

허나,

‘골치 아프게 생겼네.’

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무배로 만들어 바다로 나가는 것도 겁이 나는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마저 생기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 저놈과 조우할 수도 있을 테니 배의 기동력을 올리고 전투 마저 치를 수 있게 준비를 해

주세요.”

“성주님. 지금으로선 그렇게까지 하는 건 무리…….”

“십 년이 걸려도 좋습니다. 그러니 체념하지 마시고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만전을 기해 주세요.”

난 한숨 쉬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유거성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힘들 거라는 것도 알고 어쩌면 이곳에서 평생 배만 만들다 생을 마칠 수도 있지만, 이거라도 해야 했다.

여기서 다 포기하고 그냥 어영부영 목숨 줄만 연명하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밖에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차서 뭐라도 하며 사는 게 정신적으로 더 이로울 테니까.

그런데 그때,

“저 성주님, 저도 사실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연구해 본 것이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그래요? 당연히 들어봐야죠.”

“그럼. 잠시만.”

지윤미 마스터가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내게 보여줬다.

오크 부락1 2만 추정.

오크 부락2 1만 추정.

.

.

.

오크 부락10 1만 추정.

그녀가 보여 준 지도에는 스카이 캐슬 주위에 포진된 오크 부락의 위치와 규모가 적혀 있었다.

“저희가 그동안 정찰을 하고 지원군이 이곳에 오며 확인한 오크 부락을 그린 지도예요.”

“정말 많네요.”

“확인된 것만 이 정도니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오크가 저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근데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스카이 캐슬에서 게이트로 가는 길에 오크 부락이 세 군데밖에 없어요.”

“그 말은 설마 지금 오크들이랑 전면전이라도 하자는 말인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오크 부락 세 군데의 눈만 피하면 게이트로 갈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눈을 피하자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땅굴을 파보면 어떨까 해서요.”

지윤미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흙으로 된 땅이 있었다.

“저도 말하면서도 터무니없다는 걸 알지만 성주님이 지금 얘기한 것처럼 십 년을 내다 보고 시작하면 어쩌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해서요.”

지윤미는 자신이 고민하고 연구한 방법을 얘기하면서도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듯했다.

허나,

‘괜찮은데?’

내가 보기엔 꽤 그럴싸해 보였다.

여기서부터 게이트까지 땅굴을 파려면 수십 년이 걸려도 힘들겠지만, 오크 부락이 있는 지역만 땅굴을 파 길을 만들면 그 시일을 최대한 짧게 단축시킬 수 있을 듯했다.

게다가

배와 땅굴.

한곳에 올인하는 것보다 두 가지 활로를 만들어 준비하면 살아나갈 확률도 더 커질 테고.

원래 주식을 할 때도 분산 투자를 하라고 하지 않는가.

“좋네요.”

“네?”

“훌륭하다고요. 그럼 전 계속 배를 만드는데 주력할 테니 지윤미 마스터가 땅굴 파는 걸 지휘해 주세요.”

“정말요? 정말 제 의견대로 하시겠다는 거예요?”

“네. 나갈 방법이 있는데 시도도 안 해 보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난 반쯤 넋이 나가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윤미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땅굴 파기.

어찌 보면 배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터무니 계획일 수도 있었다.

허나 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어렵고 허황된 계획까지 하고 있었다.

열기구와 행글라이더.

만약 배를 타고 나가는 것마저 막힌다면 난 하늘을 날아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여기는 침수 구역이 있으니까 안 되고 이쪽이 낫겠다. 그리고 이쪽은 암벽으로 막혀 있긴 하지만 돌아서 파는 것보단 길이 짧고 붕괴 위험이 없으니 괜찮을 거야. 그리고 여기는…….

노움이 형상화되어 나타나 지도에 세 개의 물결무늬 선을 그어줬다.

세 개 다 모두 오크 부락이 있는 곳 인근이었다.

‘여기다가 땅굴을 파라고?’

-어. 내가 그려 준 대로 땅굴을 파면 시간도 단축되고 최대한 안전하게 할 수 있을 거야.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앞을 바라봤다.

지렁이, 두더지, 진흙, 암석까지…….

노란색 빛이 어른거리나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고, 마치 카메라를 넣고 보는 것처럼 노움이 그려준 땅 밑 속 풍경이 눈앞에 보였다.

“지윤미 마스터님.”

“네?”

“제가 지금 그린 선을 따라 땅굴을 파주세요. 제 친구가 그러는데 여기가 땅굴을 파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하네요.”

“설마? 정령이 가르쳐준 건가요?”

“네. 제 친구가 알려줬어요.”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정령 씨.”

지윤미 마스터가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노란색 빛을 보며 인사를 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없는데…….’

지윤미가 마스터가 인사를 한 곳에 노움은 없었지만, 그녀가 창피해할까 봐 굳이 알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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