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핑크 솔트
“오빠, 도착했어요. 이제 눈 뜨셔도 돼요.”
5분이나 흘렀을까.
수정이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감았던 눈을 뜨자 어느새 건너편 절벽에 도착해 있었다.
걱정을 했던 거와 달리 작은 사고조차 없이 헌터들은 헬퍼들을 안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도강에 성공했다.
-소금 있는 데부터 갈 거지?
‘소금 있는 곳이 가까워?’
-가깝기도 하고 그게 제일 시급하게 필요한 것 같은데 아니야?
‘맞아. 다른 건 몰라도 소금은 꼭 있어야 해. 앞장서 줘.’
-응, 알았어.
노움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앞장섰다.
내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지 노움은 지금 당장 제일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채소는 식사를 조금 더 풍요롭고 맛있게 먹는 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소금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식료품이었다.
소금만 충분히 있어도 고기 먹는 게 그리 곤욕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오크의 숲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언니,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그러게. 꽃이 이렇게 많이 피어 있는 곳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주위를 경계하며 내 뒤를 따라오던 헌터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숨을 들이시면 달콤한 꽃향기가 폐를 가득 채울 정도로 주위에 꽃들이 많이 보여서 그런 듯했다.
절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풍경이 달랐다.
마치 어렸을 적 갔던 자연 농원처럼 형형 색깔의 꽃과 풀들이 가득했다.
이곳이 던전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며 가꾸고 있는 정원이라 착각을 일으킬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위험해.”
난 노움을 따라가던 것을 뒤로하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빌어먹을 멧돼지 새끼들. 전생에 나랑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리도 못살게 구는지…….’
불현듯 예전 과수원에서 일할 때 인근 주민들이 산을 보며 했던 원망 어린 말이 떠올랐다.
멧돼지, 고라니, 노루…….
산짐승들이 가끔 산에 먹을 게 없어서 도심 속으로 출몰하는 뉴스를 보면 가엽긴 하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멧돼지에 ‘멧’자만 들어도 치를 떨기 일쑤였다.
워낙에 번식력과 먹성이 좋아 멧돼지 가족 한 무리만 나타나도 경작해 놓은 작물들을 뿌리까지 전부 다 파먹어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었다.
특히 추위가 다가오는 이맘때쯤이면 긴긴 겨울을 버티기 위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며 영양분을 축적하려고 해서 산짐승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나마 고라니나 노루는 비교적 온순해서 인명피해는 입히지 않지만, 멧돼지는 난폭하고 힘까지 좋아 농부들에게 상해를 입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결국 유해 야생 동물로 지정까지 되었고.
인간이 지구의 주인인 것마냥 자연을 파괴하고 도시화시킨 지구에서도 멧돼지는 그렇게 생존하고 있었다.
“오빠, 왜 그러세요?”
“산짐승들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우리 보고 어디 숨어 있는 거 아닐까요?”
“아니 초식 동물이 서식하지 않은 지 한참 된 지역인 것 같아. 멧돼지나 노루 서너 마리만 있어도 이런 풍경은 유지되려야 유지될 수가 없거든.”
“흠…… 근데 그게 왜 위험하다는 거예요?”
수정이와 헌터들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초식 동물이 서식하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그녀들은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더 설명이 필요할 듯했다.
“오크 부락이 있던 하늘 목장엔 오천 마리가 넘는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던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도처에 산짐승들이 즐비해 있었잖아.”
“설마 그럼?”
“하늘 목장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오크 부락이 있거나 아니면 오크보다 더 뛰어난 상위 포식자가 있을지도 몰라.”
“경치가 예뻐서 마냥 좋아했는데 좋아할 일이 아니었네요.”
하늘 목장을 예로 들며 설명을 하고 있는데 수정이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현지야, 꽃구경 그만하고 우리 긴장 좀 하자. 우리 꽤 위험한 곳에 들어 온 것 같아.”
“네. 알았어요. 언니.”
아름다운 풍경에 방심했던 헌터들의 눈빛이 금세 진중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내가 왜 위험하다고 했는지 인지를 한 모양이다.
미천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괜한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듯했다.
-다 왔어. 여기야!
산 정상에 있는 커다란 동굴 앞에 도착한 노움이 얼른 오라며 내게 손짓을 하는 게 보였고 우린 최대한 주위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거야. 이걸 음식에 넣어 먹으면 네가 원하는 것처럼 짭짜름한 맛이 날 거야.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노움이 벽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동굴 안, 벽은 핑크빛을 띠고 있었고 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맛을 보았다.
“역시 암염이었던가?”
노움이 자신한 대로 동굴 벽 암석은 꽤 강렬한 짠맛을 품고 있었다.
소금이 있는 곳을 알려 준다고 하면서 산으로 데리고 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암염이요? 그게 뭐예요?”
“암염이라고 못 들어봤어?”
“네. 처음 들어봐요. 이거 진짜 먹어도 되는 거예요?”
나를 따라 암염을 맛본 수정이가 코끝을 찡그리며 날 쳐다봤다.
천일염.
우리가 아는 소금은 염전에 바닷물을 대서 태양광과 바람으로 물을 증발시켜 만든다.
헌데 그것 말고도 소금을 구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암염처럼 먼 옛날에 바다 또는 소금기가 녹아 있던 호수였던 곳이 증발하여 소금이 서로 뭉쳐서 광물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을 채취하는 방법이 있었다.
지구에선 히말라야 암염이 대표적이었다.
연관 진열.
보통 백화점이나 마트에서는 축산, 농산, 수산 상품들을 따로 진열하지만 몇 가지 품목들은 PC에 상관없이 같이 진열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상추, 쌈장, 양념장, 후추, 소금 같은 것들은 축산 코너 옆에 진열하는 경우가 많았고, 200g짜리 손바닥 반만 한 소금 한 통을 히말라야 암염이라며 몇만 원이나 되는 가격으로 측정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관리하고 팔아야 할 상품이 아니었지만 고기 옆에 진열되어 있으니 고객이 물어볼 수 있기에 기본적인 지식은 갖고 있어야 했으니까.
‘안 돼요. 몰라요. 없어요.’
마트 직원은 고객에게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 없어 반강제적으로 배워 둔 것이었지만, 난 그때 들은 지식을 수정이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와우! 대박! 그럼 이 암염이 일반 소금보다 더 맛있고 몸에도 좋다는 말이잖아요?”
“어. 그때 판매 직원이 그런 말을 하기는 했어. 미네랄이 훨씬 풍부하다나. 어쨌다나.”
난 대답을 하면서 슬며시 노움을 쳐다봤다.
그때 기억을 토대로 설명을 해 주긴 했지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들은 거라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미네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 기억 속에 있는 소금보다 더 깨끗하고 몸에 좋기는 할 테니까. 게다가 오랜 시간 이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의 기운을 듬뿍 흡수까지 한 놈들이야.
‘자연의 기운을 흡수했다고? 얼마나 오래됐기에?
-한 삼억 년? 이놈들 정령력이랑 마나를 꽤 머금고 있어. 이걸로 요리하면 헌터들한테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헐…….”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암염을 쓰다듬었다.
삼억 년이라는 숫자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곳이 어쩌면 지구와 같이 또 다른 행성이나 차원이 아닐까 하는 내 짐작이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오빠, 이것 좀 보세요.”
“어라? 그거 어디서 났어?”
“이거 무 맞죠?”
동굴 입구의 경계를 맡았던 나현지가 핑크색 빛을 머금고 있는 무를 손에 들고 왔다.
-안 그래도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알아서 찾아왔네. 네가 원하던 게 저거 맞지?
끄덕끄덕.
“그런 것 같긴 한데 어떻게 알고 무를 캐낸 거야?”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현지를 쳐다봤다.
무.
깍두기와 단무지, 열무김치를 만들 수 있는 채소.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대중화되어 있는 음식이긴 하지만 무는 열무 부분을 제외하곤 땅속에 심겨 있었다.
나조차도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땅속에 심겨 있으면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마나가 느껴져서 가 봤더니 이것들이 잔뜩 있더라고요.”
“무에서 마나가 느껴진다고?”
“네. 희미하긴 하지만 마나를 머금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올 때가 됐는데?”
나현지가 말끝을 흐리며 동굴 입구를 쳐다봤고 또 다른 헌터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힐러 님, 이것 좀 보세요.”
“힐러 님, 이것도요.”
오이, 당근, 콩, 양파, 대파, 쪽파, 마늘, 고추…….
그녀들의 손엔 갖가지 채소는 물론이고 나조차도 생소한 갖가지 식물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지구의 것과는 다소 생김새가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얼추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다들 하나 같이 핑크색 빛을 띠고 있었다.
“설마 그것들도 마나를 머금고 있나요?”
“네. 마나 느낌이 나서 가 보니 이것들이 잔뜩 있어서 캐왔어요.”
헌터들이 어깨를 으쓱 거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어리벙벙해 있자 신이 난 듯했다.
그런데 그때,
“아오오오오오!”
“아오오오오오!”
동굴 밖에서 절로 닭살이 돋을 만큼 소름 돋는 맹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늑대 소리예요.”
“왜 하필 늑대야. 어후.”
울음소리를 들은 수정이와 헌터들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늑대면 다행인 거 아니야? 오크보다는 낫지 않아?”
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들을 쳐다봤다.
“늑대가 오크보다 약하긴 하지만 오크만큼 개체 수가 많아요. 게다가 힘이 좀 약할 뿐이지. 훨씬 빠르고 교활하고 사냥 다닐 때도 수십 마리씩 무리 짓고 다니는 놈들이라 상대하기가 훨씬 까다로워요. 일단 필요한 만큼 채취하고 빨리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 알았어. 다들 들었죠. 핑크색 빛을 띠는 게 암염이니 대충 부셔서 가져온 가방에 담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쾅! 쾅!
헬퍼들이 손 망치를 들고 부랴부랴 바위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 * *
“휴우. 다행히 우리를 발견하고 울부짖은 건 아닌 듯하네요.”
암염을 채취하고 무사히 다시 절벽을 넘어오자 수정이가 주위를 둘러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지야, 넌 오빠랑 헬퍼 분들 모시고 하늘 목장으로 돌아가.”
“언니는 더 살펴보고 오시게요?”
“어. 그래야지.”
수정이와 현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헬퍼들의 가방을 쳐다봤다.
가방 안에는 헬퍼들이 채취한 암염 소금과 헌터들이 채취한 채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상대하기 까다롭다며 괜찮겠어?”
“저희끼리만 있으면 문제없어요. 어차피 정찰이 목적이니 아예 상대를 안 하면 그만이에요.”
내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하자 수정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짐작건대 나와 헬퍼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급하게 퇴각한 모양이었다.
“고작 늑대 울음소리 좀 들었다고 꽁무니를 뺄 수는 없잖아요.”
수정이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가서 조심히, 천천히 살펴보고 올게요. 그래야 전쟁을 할지 아니면 지금처럼 몰래 조금씩 가져올지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난 수정이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