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하늘다리
‘정말 고추랑 소금이 있는 거 맞아? 고추는 그렇다 치고 소금이 산에 있을 턱이 없잖아?’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노움을 쳐다봤다.
선뜻 그를 따라가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이대로 일어나면 사람들이 마음 편히 밥을 먹지 못할 거야.’
밑반찬을 나누어 받아 놓고도 사람들은 오히려 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일어나면 아무래도 김성준이 푸닥거리를 한번 제대로 할 듯했다.
-흠! 잠깐만…….
노움이 잠시 고민 어린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노란색 빛이 내 머리를 감싸 왔다.
다시 한번 내 기억을 읽고 있는 듯했다.
컴퓨터로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주마등처럼 계속 스쳐 갔다. 그렇게 노움은 내 기억을 계속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6살 때쯤인가?’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시골집 풍경이 보였다.
마당 평상에 앉아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상추와 오이, 당근, 깻잎, 가지나물, 쌈장에 시래깃국까지.
시골집 뒤 텃밭에 키운 작물로 온 가족이 오순도순 밥을 먹고 있었다.
고기 한 점 없지만, 음식은 맛있었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꿀꺽.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절로 군침이 삼켜졌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과거의 기억이었지만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생생했다.
-네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이랑 외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같은 성분과 맛을 내는 것들이 저곳에 있어.
내 기억을 읽은 노움이 확신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마워.’
-별거 아니야. 바로 출발할 거야?
‘아니 일단 밥 좀 먹고.’
난 빙그레 웃으며 노움을 쳐다봤다.
그가 내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처럼 나도 희미하게나마 노움이 느끼고 있는 것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내 기억과 시야를 모두 오픈하면 네가 감당할 수 없어. 그래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을 거야.
노움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운디네와 카사도 그러더니 아직 네 몸과 정신으론 정령들과 백 프로 교감을 이루기는 힘든 듯했다.
허나,
-조급해할 필요 없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성준 씨, 창고에 있는 밑반찬이랑 채소 가져와서 모두 나누어 주세요.”
“형님, 그럼 앞으론 진짜 고기만…….”
“나누어 주세요. 한 끼를 먹어도 제대로 먹어야죠. 제가 생각해 둔 것이 너무 염려하지 말고요.”
“……네.”
김성준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창고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밑반찬을 나누어 주었다.
“이제야 좀 먹을 만하네.”
난 빙그레 웃으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역시 고기는 쌈장에 찍고 김치랑 같이 먹어야 맛이 있었다.
“형,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왜 싫어?”
“아니 맛있긴 한데 내일부턴 정말 고기만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겁이 나네요.”
“걱정하지 마. 노움이 우리가 먹을 만한 채소가 어디 있는지 안대.”
“정말요?”
“어. 그러니까 걱정은 접어두고 맛있게 먹어. 다 먹고 찾으러 가 보자.”
“네. 형.”
근심 어린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아 식사하던 이부성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라앉았다.
오물오물.
오물오물.
우걱우걱.
우걱우걱.
내가 맛있게 식사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때서야 마음 편안히 식사하기 시작했다.
* * *
식사를 마친 난 권수정과 나현지가 이끄는 정찰대와 노움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이쪽으로 가면 길이 없는데…….”
“길이 없다고?”
나현지가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네. 이쪽은 지난번에 말씀드린 절벽이 있는 곳이에요.”
우린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정말 길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천 길 낭떠러지였다.
마치 어렸을 적 갔었던 63빌딩에 올라간 것처럼 아주 높고 가파른 절벽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저 앞으로 가면 아까 내가 말한 것들이 있어.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노움을 쳐다봤다.
‘100m쯤 되려나?’
낭떠러지 건너편에 또 다른 산맥이 있기는 했는데 날아가지 않는 이상 넘어갈 방법이 없을 만큼 거리가 너무 멀었다.
‘우리가 차지한 땅을 쳐다보기에 당연히 쉽게 찾을 수 있을지 알고 다 먹어 버린 것이었는데…….’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오빠 혹시 저 건너편에 채소가 있는 거예요?”
“……어. 그런 것 같아.”
“에궁. 저쪽 정상은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이라 돌아가는 길도 모르는데…… 혹시 길이 있어도 오크 부락과 조우를 할 수도 있고요.”
수정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절벽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모두 화살에 와이어 좀 묶어보자.”
“네. 언니.”
수정이와 헌터들이 화살에 오크 힘줄을 꼬아 놓은 줄을 묶기 시작했다.
“수정아, 혹시 여길 건너려는 건 아니지?”
“저기 건너편에 채소가 있다면서요?”
“어, 그렇긴 한데…….”
“그럼 시도는 해 봐야죠. 이렇게 그냥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채소 다 나누어줬다면서요?”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가만히 헌터들을 지켜봤다.
뭘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켜보다 정 위험하다 싶으면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고기만 먹는 게 곤욕이라 하지만 그깟 채소 좀 먹겠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그녀의 동생들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었다.
“모두 준비됐지?”
“네. 언니.”
“그럼 한 명씩 나와서 저쪽 절벽 위에 있는 큰 나무를 조준해서 발사해.”
“네. 언니.”
슈우웅!
휘리릭!
슈우웅!
휘리릭!
화살에 와이어를 묶은 헌터들이 반대쪽 절벽에 쏘아 댔고 대부분 원하는 나무에 명중했다.
이십 명 모두 신궁이라 불려도 무방할 실력을 자랑했다.
그런데 그때,
“어때? 건너갈 수 있겠어?”
“네. 조금 헐렁하긴 하지만 얼추 버틸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헌터들이 와이어 끝부분을 잡고 나무에 묶기 시작했다.
나현지는 그 위로 올라가 탄성을 시험하고 있었고.
“설마 그걸 밟고 저리로 건너가겠다는 건 아니지?”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현지의 팔목을 잡았다.
밑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아무리 이능을 각성한 헌터라 하지만 떨어지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철썩철썩.
철썩철썩.
낭떠러지 밑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있었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시릴 만큼 아찔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허리에 하나 묶으면 혹시 떨어져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오빠, 현지를 믿으세요. 아니 우리를 믿으세요. 이것보다 더한 곳도 뚫어 냈던 아이들이에요.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꼬옥.
내가 불안한 표정을 짓자 수정이가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부들부들.
부들부들.
애써 숨기고 있었지만 사실 고소공포증이 있던 난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언니들 저 그럼 출발할게요. 꽉 잡아 주세요.”
“오케이. 걱정하지 마.”
“걱정은 무슨.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저 때문에 해용이 오빠가 저리 염려하니까.”
찡긋.
후다닥.
후다닥.
와이어 위에 올라간 현지가 내게 윙크하고선 앞으로 내달렸다.
‘헐…….’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정말 경이로웠다.
그녀는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줄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 금세 건너편 절벽 위에 도달했다.
“현지야, 화살 뽑아서 와이어 나무에다 묶어.”
“네. 언니!”
건너편으로 넘어간 나현지는 화살을 뽑아 커다란 나무에 묶었고,
후다닥.
후다닥.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어때? 주위에 위험 요소가 될 만한 것은 없었어?”
“네. 자세히 살펴보진 못했지만, 오크나 다른 생명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어요.”
“줄은 튼튼하게 묶어 놨지?”
“네. 물론이죠.”
현지가 수정이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들이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살기에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담력까지 이렇게 좋은지는 몰랐다.
“현지야, 혹시 채소 봤어?”
“제가 본다고 아나요?”
“그래도 기본적인 것들은 알 거 아니야? 상추는…….”
난 나현지를 쳐다보며 노움이 공유해준 채소의 외형을 설명해 주었다.
“오빠?”
“응?”
“그렇게 얘기해도 전 못 알아봐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오빠가 넘어가서 확인해 주시는 게 빠를 것 같아요.”
“아니야. 내가 언제까지 계속 쫓아다니면서 다 확인해 줄 순 없잖아. 이참에 좀 배워 놓자. 그럼 정찰하다가도 먹을 만한 걸 발견하면 굳이 내가 확인하는 번거로움 없이 채취해 올 수 있잖아.”
“잘 들어봐. 고추는…….”
난 최대한 자세하고 친절하게 채소의 생김새를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그동안 살아오며 먹은 게 있으니 설명을 듣고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때,
“오빠.”
“응?”
“혹시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죠?”
“어?”
나현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
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저기 있는 줄을 밟고 넘어가는 절벽 위를 건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등이 시려왔고 발에 힘이 풀렸다.
고소공포증.
이건 어떻게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절로 다리가 떨려 와서 겨울에 보드 한번 제대로 타본 적이 없는 나였다.
보드를 타다가 엎어지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 곤돌라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게 너무 무서웠다.
기껏 참아내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봤자 다리에 힘이 풀려 보드를 탈 수 없을 만큼.
“얘들아, 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
“네.”
“네.”
내가 너무 손을 꼭 잡아서일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눈치챈 수정이가 주위를 물렸다.
허나,
“오빠, 괜찮으세요? 손에 땀이 흥건한데…….”
“너 때문에 그래.”
“…….”
그녀가 하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저 절벽뿐만이 아니라 수정이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로서 그녀에게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지금 내 모습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동생들까지 함께 있지 않은가.
만약 이부성이나 태백산맥 헌터들만 있었다면 나도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거나 정 안 되면 장지원의 등에 업혀 건너가면 그뿐이니까.
나현지의 모습을 보아하니 헌터들이라면 나를 업고도 문제없이 건너갈 수 있을 듯했다.
“……이런 모습 보여주기 싫었는데.”
난 수정이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풉! 전 오빠가 리더십이 있고 머리가 똑똑해서 좋아한 게 아니에요.”
“…….”
“전 오빠의 이런 점이 좋아요. 고소공포증이 있어 무섭지만 저걸 건너려고 마음을 먹어서 이렇게 겁을 내고 계시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어, 근데 도저히 못 건너갈 것 같아.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제가 안아 줄게요. 오빠는 눈 만 감고 계세요.”
수정이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나의 약한 모습에 그녀가 실망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냥 나 혼자 자신이 쪽팔릴 뿐.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 진짜 눈꼴 시려서 못 보겠네. 남자친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꼭 저희 앞에서 그렇게 티를 내야겠어요?”
우리 모습이 보기 힘들었는지 나현지가 투덜거리며 우릴 타박했다.
“미안. 그럼 오빠는 내가 안고 건널 테니 혹시 헬퍼 분들 중에 무서운 분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손들어주세요. 괜히 줄 중간에 가서 길 막고 있는 것보다는 애초에 안고 건너가는 게 나을 테니까.”
수정이가 헬퍼들을 살펴보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저요.”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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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성을 시작으로 채소를 채취하기 위해 따라온 헬퍼들 모두가 조심스레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여긴 고소공포증이 적은 사람도 무서운 곳이에요.”
“저도 빌딩 창문 닦기도 했을 만큼 높은 데를 잘 올라가는 사람인데 여긴 제 발로 넘어갈 자신이 없네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헬퍼들 모두 두려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헌터들에게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