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노움
“형, 근데 이 녹색 풀은 왜 캐신 거예요? 이건 동충하초가 아닌 것 같은데?”
자신에게 불리한 얘기가 나오니 이부성이 화제를 돌렸다.
내가 수정이와 가까운 사이가 되어 전보다 나현지와 같이 있는 시간도 더 많아졌는데 둘은 영 진척이 없었다.
‘근데 나 어제 쑥까지 캔 거냐?’
난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동충하초 옆에 쑥이 쌓여 있는 걸 보니 분명 내가 캔 것인데 난 기억이 없었다.
쑥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옛 생각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캔 듯했다.
“아,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캤나 보네.”
“……이게 뭔지 알고 캐신 거예요?”
“쑥 몰라?”
“쑥이요?”
이부성이 다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그는 쑥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평소 땐 몰랐는데 오늘따라 부쩍 세대 차이가 많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엽기도 했다.
요즘은 죄다 시멘트 바닥이라서 손에 흙을 묻히며 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하도 할 게 없어서 산과 들에 가서 뛰어놀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다 하나같이 소중한 추억들이었다.
“쑥개떡 안 먹어봤어?”
“아, 그 쑥개떡의 그 쑥이 이거에요?”
“어, 맞아.”
“와. 진짜 신기하네요.”
이부성이 쑥을 손에 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감탄을 했다.
냄새마저 고약한 풀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거 보이면 너도 캐봐. 그럼 형이 솜씨 한번 발휘해 볼 테니까.”
“헐. 떡도 만들 줄 아세요?”
“어. 대충 흉내는 낼 줄 알아.”
난 빙그레 웃으며 다시 쭈그려 앉아 동충하초와 쑥을 캐기 시작했다.
동충하초의 효능을 발견한 것만 해도 좋은데 오랜만에 쑥까지 캐려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가뜩이나 음식도 부족한 상황이기에 이런 것조차 소중한 식량이 되기도 했고.
“고맙습니다. 이런 귀한 약초들을 자라게 해 주셔서.”
자꾸 옛 생각을 해서일까.
난 나도 모르게 어렸을 때처럼 땅을 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께서 항상 농사를 짓는 농부들과 땅에 감사 인사를 시키곤 하셨다.
땅이 있어 농사를 질 수 있는 거고 농부들이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구슬땀을 흘려 농사를 지어 우리가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거라고 하면서.
지금이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이 갑인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식사할 때마다 농업, 수산업, 축산업에 종사하는 분들께 감사 인사를 하고 먹을 정도로 낭만이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그때,
-기특한 인간이네.
이명이 들려왔다.
‘정령인가?’
연로한 노인의 형체를 하고선 노란빛을 둘러싼 실루엣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혹시나 했는데 결국 노움까지 불러냈네.
-그러게.
어느새 운디네와 카사마저 형상화 되어 날 지그시 쳐다봤다.
‘노움?’
-땅의 정령이야.
‘아…….’
난 고개를 끄덕이며 노움을 쳐다봤다.
여동생과 남동생에 이어 이번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신, 농부였던 할아버지를 투영시킨 모양이다.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가끔 할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울 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우리 집도 제법 먹고살 만했던 것 같기에.
-도와줄까? 동충하초랑 쑥 뽑아내면 되는 거지?
노움이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래 줄 수 있어?’
난 노움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물론이지!’
땅이 잠시 흔들리는 것 같더니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동충하초와 쑥이 땅 위로 쑤욱 올라와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형, 설마?”
“세 번째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와우! 이번엔 어떤 능력이 생긴 건가요?”
이부성이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어째 나보다 더 흥분한 듯한 얼굴이었다.
“땅의 정령이래. 이제 바람이랑 마음만 사귀면 나 후레쉬 맨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후레쉬 맨이요?”
“지구 방위대 후레쉬 맨 몰라?”
“알긴 아는데 고민돼서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제가 지금 웃어야 적절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부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쭈뼛거렸다.
‘웃어. 웃으라고 한 거야.’
세 번째 친구가 생겨 내가 너무 흥분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아재 개그가 튀어나와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럼 고민은 천천히 하는 걸로 하고 우리 일단 이거부터 담을까?”
“네. 알겠어요.”
이부성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동충하초와 쑥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작건대 아마 숙소로 돌아가면 혼자 웃을 게 분명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내 개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 또래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바로 빵 터졌을 것이다. 실제로 오랜 친구인 이세훈은 내가 한 번씩 이렇게 아재 개그를 할 때마다 너무 웃겨서 자지러지곤 했었다.
“형이랑 같이 갈래?”
“히이잉.”
동충하초를 수확하고 루카스에게 다가가 콧잔등을 쓰다듬자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핥았다.
그리고 이내,
“히이잉!”
쿵! 쿵!
“히이잉!”
“히이잉!”
루카스 주위에 있던 두 마리 야생마와 함께 슬며시 뒤를 쫓아왔다.
노움에 새로운 친구가 또 생긴 듯했다.
* * *
“하늘 목장?”
오크 부락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오니 입구에 나무로 만든 현판이 새겨져 있었다.
“오셨어요. 여기를 지칭해야 할 이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내가 현판을 보며 가만히 서 있자 유거성이 달려와 손을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짐작건대 내 허락도 없이 이름을 만들고 현판을 만든 게 눈치가 보인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힐러 님께서 이름을 정하는 게 마땅한데 헬퍼들 중에 한 명이 이런 목장을 갖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기분이라도 내게 해 주려다 보니…….”
“잘하셨어요.”
“네?”
“잘하셨다고요. 예쁜 이름이네요.”
난 유거성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야 아무나 지으며 어떤가.
예쁘면 그만이지.
게다가 같이 고생한 헬퍼의 소원이라는데 굳이 연연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근데 설마 지금 야생마를 잡아 오신 건가요?”
“잡아 왔다기보다는 알아서 따라왔다는 게 맞을 거예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야생마 포획은 상위 헌터들조차 혀를 내두르고 포기를 했는데 올가미도 없이 데리고 오시다니…….”
이제야 루카스가 보이는지 유거성이 잔뜩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에 존경심이 가득했다.
양, 염소, 사슴, 토끼, 닭, 칠면조, 거위, 오리, 메추리…….
다른 헌터들은 여전히 주위를 정찰하며 식량으로 쓸 동물들을 포획하고 있는데 난 조금 클래스가 달라서 그런 듯했다.
짐작건대 막걸리 제조에 이어 야생마를 길들인 것도 아마 내가 최초일 듯했다.
“이놈들이 잘 곳도 만들어 주세요.”
“마구간을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이놈들이 워낙 난폭해서 저희가 컨트롤을 하긴 힘들 것 같은데…….”
유거성이 루카스를 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약간 겁마저 먹은 듯했다.
지금이야 내가 옆에 있어 온순하지만, 행여나 심기가 불편해져 헬퍼들에게 뒷발차기라도 했다간 그런 낭패도 없었다.
“일단 마구간은 만드는데 억지로 가둬 두려 하지는 마세요.”
“그러다 도망이라도 치면?”
“도망치면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해야죠. 단 그 대신 먹을 것을 줄 때 항상 종을 울려주세요.”
“종을 울리라고요?”
“네. 말들도 그렇고 다른 야생 동물한테도 먹이를 줄 때 항상 종을 울리세요.”
“흠…….”
유거성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내 지시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헌터들은 신이 나서 계속 야생 동물을 포획하고 있었고 이대로 두면 금세 수백 마리가 잡힐 듯했다.
헌데 그들이 하나 간과한 게 있으니 동물들을 가둬 놓고 키우는 건 성곽 짓는 것만큼이나 힘이 든다는 것이다.
밥 먹이고 똥 치우고.
이 두 가지만 하려 해도 수십 명은 이곳에 차출해야 했는데 지금 우리에겐 그만한 가용 인원이 없었다.
야생 벼도 수확해 탈곡해야 하고, 투석기도 계속 만들어야 하고, 성곽도 지어야 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선 숙소도 새로 건축하여 보수해야 했고, 미스릴 채취도 시작해야 하고…….
인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해야 할 일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인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선 가축들을 반쯤 풀어 놓고 기르는 게 좋을 듯했다.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 하더라도 밥 주고 재워주는 존재는 알아보는 법이었다.
풍성하게 먹이를 주고 따듯하고 안전한 집에서 자는 것에 적응하게 되면 굳이 일부러 가둬 놓을 필요가 없었다.
밖에 나갔다가도 배고프고 추우면 알아서 돌아올 테니까.
“……방목해서 키우는 방법을 모색해 주세요.”
난 내가 의도하는 바를 유거성에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도축을 해서 고기를 얻는 것보다는 계란이랑 우유, 털을 먼저 수확하는 방향으로 운영해 주시고요.”
“털이요?”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어요. 근데 우리는 춥다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상황이 아니잖아요. 방한 준비를 해야죠.”
“아!”
유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리털 카파.
구스다운.
양털 이불.
.
.
.
난 야생 동물을 보자마자 바로 그 생각이 떠올랐는데 먹을 생각만 한 듯했다.
“좀 잔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부터 살아야지.”
“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미스릴 광산에 한 눈이 팔려 제가 목장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미스릴 채취만큼이나 중요한 일인데.”
유거성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니 이만하면 이제 알아서 헬퍼들을 통솔해 운영을 잘할 듯했다.
다만,
“……주위에 아직 오크 잔당들이랑 맹수들이 많아서 지금 당장은 힐러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기는 힘들 겁니다.”
본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애로사항이 있는 듯했다.
유거성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계획은 제법 그럴싸했지만, 실무자의 입장에서 그려 보니 문제점이 산재해 있는 것이었다.
뭐 나도 바로 내 생각처럼 될 거라 여기지는 않았다.
나 역시 목장을 경영한 경험은 없었고 그저 TV를 통해 승마장 옆에서 일하며 귀동냥으로 들은 게 전부였으니까.
일단 큰 틀만 그려놓고 세세한 거는 하나씩, 하나씩 개선해야 할 듯했다.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마스터랑 부상 당한 헌터들이 복귀를 할 테니.”
이번 해결책은 나현지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오빠, 이제 할 말 다 끝난 거죠? 그럼 우리 빨리 가요.”
“……그래.”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나현지가 대답을 대신한 것도 모자라 내게 팔짱을 끼고 날 끌고 가듯 베이스캠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보아하니 아주 안달이 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지윤미 마스터와 부상병들에게 동충하초를 먹이고 싶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