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42화 (42/255)

42화. 동충하초

“와우! 그놈 참 토실토실하게 생겼네. 안 그래도 소고기만 먹어서 물리던 참인데 잘 됐다.”

“앗싸. 오늘 저녁은 치킨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밖에 엄청 많은데 더 잡아 올까요?”

“그래? 얼마나 더 있는데? 백 마리는 있어야 몇 점씩이라도 돌아갈 텐데.”

“많아요. 다 잡으면 그 정도는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일단 잡아 온 것부터 이리 줘.”

꿀꺽.

김성준이 군침을 흘리며 헌터들에게서 야생 닭을 건네받았다.

“여기요. 그럼 전 헌터들 데리고 마저 다 잡아 올게요.”

윤다영은 헌터들을 데리고 바로 사냥에 나서려 했고.

“다영아, 잠깐만.”

“네? 왜 그러세요? 더 시킬 일 있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알은 없었어?”

“알이요?”

윤다영이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닭이 있으니 당연히 알이 있는지 묻는 것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저 오늘 저녁을 치킨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나현지도 그렇고 윤다영도 그렇고 먹을 거 앞에선 유독 백치미를 자랑하는 경향이 있었다.

“알이 있는지 찾아봐. 그리고 웬만하면 죽이지 말고 살려서 데리고 오고.”

“살려서요? 이놈들 닭치곤 제법 높고 멀리 날아서 그러면 오래 걸릴 텐데…….”

“오래 걸려도 되니까 살려서 잡아 와 줘. 부탁할게.”

“네. 알았어요.”

윤다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설명을 해줘야 할 듯했다.

어차피 단백질은 지금 블랙 앵거스 고기만으로도 충당이 되고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언제까지 잡히리라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날씨가 점점 싸늘해지고 있다.

그 말은 겨울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였고 식량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다.

지원군이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언제 당도할지 기약을 할 수 없었고 바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장담도 할 수 없었다.

계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닭을 바로 잡아먹는 것보다는 사육해서 안정적으로 계란을 얻는 게 더 이득일 듯싶었다.

“그러니까 오빠 말은 이것들을 가둬 놓고 키우자는 말이에요?”

“어, 맞아.”

“힝. 치킨 먹고 싶었는데…….”

내 설명을 들은 윤다영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치킨을 먹을 생각을 하다가 못 먹게 되니 힘이 빠지는 모양이다.

“몇 마리 잡아서 치킨 만들어 줄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저 혼자 먹어요.”

“너랑 너희 팀이 닭들을 발견하고 잡아 왔잖아.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지. 눈치 보지 않고 오빠가 먹게 해줄게.”

“그래요? 그럼 알았어요. 일단 나가서 닭부터 잡아 올게요.”

윤다영이 쭈뼛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팀만 닭을 먹는 것이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먹고는 싶은 모양이었다.

“거성 씨. 닭장을 좀 지어야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닭들이 얼어 죽을 수 있으니 그것까지 감안해서 튼튼하고 보온에 신경을 써주세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유거성이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장비를 챙겼다.

자세한 설명도 필요 없이 옆에서 들은 것만으로도 내 의도를 캐치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힐러 님, 이것 좀 보세요.”

음메!

음메!

“산양인가?”

또 다른 정찰 팀을 이끌고 있던 헌터가 염소 비스무리한 동물을 끌고 걸어왔다.

“힐러 님, 이것 좀 보세요.”

음메!

“어라. 이놈이 진짜 염소 같은데?”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주변 정찰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헌터들이 연이어 야생 동물을 잡아 오기 시작했다.

양, 염소, 사슴, 토끼, 닭, 칠면조, 거위, 오리, 메추리…….

지구에서의 가축과 같으면서도 약간은 다른 생김새들을 가진 동물들이었다.

보아하니 다들 뭔지도 모르면서 어디선가 본 듯한 동물이 보이면 무조건 일단 잡아 오고 있는 듯했다.

“오크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쪽 숲에 고립된 모양이에요. 숲 안쪽 여기저기에 야생 동물이 득실득실해요.”

정찰을 나갔다가 토끼를 손에 들고 온 수정이가 잔뜩 흥분해서 내게 보고를 해 왔다.

미스릴 광산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주변에 먹을 것이 득실득실하니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거성 씨, 잠시만요.”

“저것들 살 집도 만들면 되는 거죠?”

“네. 그리고…….”

“뭘 먹는지도 확인해 보겠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저놈들이 먹는 풀도 다 얼어 죽어 버릴 테니 미리 좀 잔뜩 베어놓아야 할 테니까.”

“네. 맞아요.”

난 유거성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아주 척하면 척이었다.

하나를 말하면 둘, 셋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

살짝 트러블 메이커 기질이 있기는 했지만, 눈치와 일머리는 하나는 타고난 듯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착하고 눈치 없는 사람보다는 조금 얍삽하고 싸가지가 없다 하더라도 난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사람이 좋았다.

그런데 그때,

“루카스!”

난 잊고 있던 야생 동물 한 마리가 생각났다.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사귀었던 친구.

기껏 수박까지 맥이며 친해졌었는데, 오크들과 전쟁을 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부성아,”

“네. 형. 수박껍질 준비하면 되는 거죠?”

“남은 게 있나?”

“혹시 몰라서 성준이형한테 먹지 말고 수박 한 통 남겨 놓으라고 했어요.”

“오! 굿!”

유거성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역시 내 단짝은 이부성 밖에 없었다. 그는 나마저도 깜빡하고 있던 것을 잊지 않고 챙겨 놓고 있었다.

“빨리 가자.”

“네.”

난 이부성과 함께 부랴부랴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현지야.”

“네. 언니.”

“따라가서 경호해.”

“네, 알겠어요.”

나현지가 이끄는 정찰팀과 함께.

* * *

“전투가 이렇게 쉽게 끝날 줄 알았으면 마스터랑 다른 언니들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투에서 빠졌다고 부상병들을 배제할 생각은 없으니까.”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오빠가 신경을 써주면 고마워는 하겠지만 아마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을 거예요.”

경호를 위해 따라나선 나현지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참여하지도 않은 전투의 전리품을 받고 좋아할 사람들은 없거든요. 마음은 고맙지만, 일부러 챙겨줄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저희에게 배당된 것을 나눠도 적지 않을 테니까요.”

“미안해.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어. 부상병들까지 데리고 전투를 하자고 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웠거든.”

“네. 이해해요. 그리고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속상한 마음도 어쩔 수가 없네요. 돈을 떠나서 이 기쁨을 같이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마스터랑 언니들은 계속 소외되어 있으니까요. 아마 제가 언니들이었다면 답답해서 미쳐 버렸을 거예요. 동료들은 다 싸우고 있는데 침상에 누워 있으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닐 테니까요.”

“……그렇겠지.”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닷가로 걸어갔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는 알지만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히이잉!”

나현지와 얘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동충하초 밭에 도착했고 여전히 루카스가 동료 말들과 함께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미안, 미안. 형이 좀 소홀했지. 바빠서 그랬어. 조금만 이해해줘.”

할짝할짝.

할짝할짝.

다행이었다.

루카스는 날 아직 기억하고 있었고 풀을 뜯다 말고 걸어와 내 가슴에 머리를 비비고 이내 혀로 내 얼굴을 핥았다.

그래도 명색이 말인데 새대가리도 아니고 그새 잊어버리면 많이 서운할 뻔했다.

“그 대신 이거 줄게.”

아그작아그작.

아그작아그작.

“히이잉!”

루카스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수박을 먹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휴우. 다행이다. 딴 데로 갔으면 어쩌나 했는데.”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해용이 형, 저놈들도 아직 저기 있는데요?”

“헐……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네.”

이부성이 가리킨 곳을 쳐다보니 일전에 가죽이 벗겨져 내장이 보였던 블랙 앵거스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이미 죽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커다란 상처였는데 피가 멈춘 것은 물론이고 어느새 가죽이 다시 달라붙으며 딱지가 생겨 있었다.

마치 상처 부위만 시간이 빨리 흐른 것처럼 눈에 띄게 호전되어 있었다.

“부성아.”

“네, 형.”

“우리 동충하초부터 캐야 할 것 같지?”

“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잠시 눈빛을 교환한 우리는 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동충하초를 캐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었다.

블랙 앵거스가 치료된 것처럼 인간에게도 효능이 있다면 부상병들이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털어 내고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설마 이게 저놈들을 치료시킨 거예요?”

“어, 확실하진 않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것 같아.”

“와! 대박. 얘들아, 너희도 얼른 같이 캐.”

“네.”

일전에 같이 이곳에 왔던 나현지도 대충 눈치를 채고 헌터들과 함께 주저앉아 동충하초를 캐기 시작했다.

“와우! 형 진짜 빠르시네요. 도대체 못 하는 게 있긴 한 건가요?”

한참 집중하며 동충하초를 캐고 있는데 이부성이 마치 괴물이라도 보듯이 날 쳐다봤다.

같은 조건에서 캐내는데도 내가 거의 두 배 이상 빨리 캐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낚시, 요리, 나물 캐기.

특출나게 뛰어나진 않지만, 이래저래 경험이 많은 난 초보들보단 잘하는 것이 많았다.

“어렸을 때 나물 캐러 많이 다녔었거든.”

“시골에서 자라신 거예요?”

“시골까지는 아니고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지.”

“엥? 인천은 도시 아닌가요?”

이부성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스물여섯 살.

띠동갑인 그의 머릿속엔 인천은 도시로만 기억된 것 같았다.

허나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인천은 어렵지 않게 논과 밭을 볼 수 있고 구수한 소똥 냄새가 나는 곳이 많은 시골의 정경을 가진 도시였다.

‘할머니가 해준 개떡 맛있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할머니 심부름으로 뒷산에 올라가 쑥을 캐러 다녔을 정도로.

1988년에서 1990년대 초반.

물론 그때도 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서 떡을 해 먹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은 아니었지만, 동네 어르신들이 할머니가 만든 쑥개떡을 좋아하셔서 꽤 자주 올라가곤 했었다.

‘삐라 줍는 것도 쏠쏠했는데.’

게다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북한의 불온 선전물을 파출소에 갖다주면 총기류가 그려져 있는 책받침을 줬는데 그걸 모으는 재미도 쏠쏠했었다.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부성에게 그때 산에 가서 놀았던 기억을 설명해 주었다.

“아, 그래서 빠르셨나 보네요. 저희 아버지도 명절 때 같이 산에 가서 낫 들고 벌초할 때 보면 정말 멋있었거든요. 진짜 옛날 어른들은 정말 이런 걸 잘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

당황스러웠다.

‘아버지? 옛날 어른?’

표정과 말투를 보면 분명 칭찬하는 것 같은데 묘하게 사람을 먹이는 것도 같았다.

조금 양보해서 삼촌까지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는 좀 너무 나간 듯했다.

“앗, 죄송해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아니야.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인데 뭐. 그래도 형은 여자 친구 있어서 괜찮아.”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부성의 등을 토닥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