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미스릴 방어구
“옷을 맞춰 준다고요? 갑자기?”
나현지가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살짝 어이가 없어 하는 얼굴이었다.
“수정이가 그러던데 미스릴로 만든 무구를 헌터들이 환장을 한다며?”
난 나현지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원래 예전부터 중매를 서주면 옷 한 벌 맞춰 주지 않는가.
만약 어제 나현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으면 수정이와 내가 가까워지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더 걸렸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일 모래면 마흔이라 이제 남은 인생도 얼마 안 남아 일분일초가 소중한데 말이다.
우리가 잘됐으니 망정이지 남녀 사이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피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리스크까지 생각하고 도와준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 그 보답을 줄 차례인 듯했다.
“미스릴을 녹여서 방어구를 만든다고요? 그게 가능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수정이마저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미스릴을 녹이는 것도 녹이는 거지만 화살촉과 달리 방어구를 만드는 것은 꽤 정교하고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어.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겠지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난 자신이 있었다.
40년 전통의 짱구네 수선집.
우리 아버지 역시 나처럼 수없이 많은 직장을 옮겨 다녔지만, 꾸준히 했던 직업이 한 가지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직장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교복 공장에 취직하여 일하셨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12~2월.
5~7월.
일 년에 6개월은 교복 만드는 일을 하고 계셨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아버지는 교복 철이 되면 어려서부터 내게 용돈을 쥐여 주며 보조를 시켜서, 나도 원단만 있으면 교복 정도는 혼자서 만들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공부도 하기 싫으면 기술이라도 있어야 굶어 죽지 않는다며 일손도 덜 겸 아버지가 겸사겸사 가르쳐 준 덕분이었다.
주조와 원형. 그리고 재단 기술이 합쳐진다면 미스릴을 녹여 충분히 방어구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2m 정도 되겠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난 바닥을 살펴 적당한 길이의 나무줄기를 찾아 손에 들었다.
줄자가 없으니 이걸로 대용해 치수를 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빠.”
“응?”
“……만들 수 있으면 저도 갖고 싶어요.”
수정이가 볼이 잔뜩 붉어져 몸을 배배 꼬며 내 앞에 마주 섰다.
“당연히 네 것도 만들어줘야지.”
“정말요?”
“그럼. 수정이 거부터 제일 먼저 만들려고 했어.”
“앗싸. 정말 고마워요. 저 예전부터 미스릴로 만든 방어구가 정말 갖고 싶었거든요. 헤헤.”
수정이가 날 보며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으니 나도 행복했다.
다만,
“아나! 이 언니 보소. 남자 친구 생기더니 이제 뭐 체면도 뭐고 다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거예요?”
“그러게. 얼음 마녀는 어디 가고 애교쟁이만 남았네. 정찰 나가는 동생들 장비 맞춰 준다는데 애교로 그걸 스틸해 가네?”
나현지와 윤다영은 권수정의 모습이 조금 못마땅한 듯했다.
“나현지. 윤다영. 너희가 몇 기였지?”
“헐! 갑자기? 지금 힘으로 누르겠다, 이건가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 건데요? 서열 안 되면 그만 까불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거 아닌가요?”
“…….”
나현지와 윤다영이 몰아붙이자 수정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얼굴만 붉혔다.
‘귀엽네.’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겉으론 코끝을 찡그리며 인상을 쓰고 있지만 내게 보기엔 적의는 없어 보였다.
그저 수정이가 곤란해하니 재밌어서 일부러 더 그러는 듯했다.
그런데,
“오빠가 만들어 주는 거잖아. 내가 제일 먼저 갖고 싶어. 너희한테 먼저 무구를 만들어 주면 왠지 화가 날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내가 너희들을 많이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
“…….”
수정이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정색을 했다.
짐작건대 수정이도 연애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했다.
동생들의 장난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아니 원체 성격이 진지한 스타일인 것 같기도 하고.
“잠깐 실례 좀 할게.”
“……네.”
난 분위기가 더 어색하기 전에 나무줄기를 이용해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어깨와 가슴, 허리, 골반, 팔, 다리…….
“모양은 지금 입고 있는 것처럼 만들어 주면 되지?”
“……네.”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정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신장 169cm
32, 20, 32.
어제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 놓고도 자신의 신체 사이즈를 알게 된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현지야, 너도 이리 와.”
“네.”
“현지야, 가슴을 그렇게 내밀 필요는 없어. 숨도 좀 쉬고.”
“내민 거 아니에요. 평상시 그대로예요.”
나현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슴을 내밀며 치수를 재는 데 열중했다.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보아하니 방금 일로 수정이한테 삐져서 타깃을 나로 바꾼 듯했다.
“그래? 그럼 진짜 이렇게 만든다. 나중에 헐렁하다고 뭐라 하면 안 돼.”
“AS 안되나요?”
“주형으로 떠서 만들 건데 그게 될 턱이 없잖아.”
“힝…….”
나현지가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딴에는 나라도 골려 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상대를 잘 못 골랐다.
나 역시 이성의 신체 사이즈를 재는 게 부끄럽고 두근거리긴 했다.
게다가 일부러 가슴까지 내미니 당혹스럽기도 했고.
허나 난 이미 이런 경험을 수도 없이 겪었다.
우리 때만 해도 중학교,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교복을 맞출 때 3년 동안 입을 것을 고려해서 품을 넓게 입고 다녔지만, 요즘은 신체 사이즈에 맞게 바짝 줄여서 입는 게 유행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아이가 부모님과 가서 옷을 맞출 때는 품을 넓게 해서 맞췄지만 입학을 하고 나면 우리 가게에 와서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옷을 줄여 입곤 했다.
과연 이걸 입고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타이트하게.
남자아이들은 괜찮은데 여학생이 와서 옷을 줄여 달라고 하면 꽤 애를 먹곤 했었다.
집 근처에 있는 학교라곤 남중 하나가 전부였지만, 보통 3천 원씩 받는 수선비를 2천 원씩 받다 보니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것이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돈 천 원을 아낄 수 있다며 그 정도 발품 파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여학생들도 남자인 내가 치수를 재는 게 불편했겠지만 난 그보다 두 배로 힘들었다.
시대적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기에.
아마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난 얼굴이 후끈거려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가까이서 본 나현지는 정말 하얗고 예쁜 몸매를 갖고 있었다.
‘현지도 우리 부성이랑 잘 되면 좋을 텐데.’
보면 볼수록 정말 매력적인 여자였다.
장난기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이부성이랑 더 잘 어울리는듯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약간 자격지심이 있는 그에게는 나현지처럼 구김 없고 좀 천방지축인 사람이 조화를 맞춰 주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현지야, 다 했으면 비켜.”
나현지의 치수를 다 재자 윤다영이 경쟁하듯 바로 내 앞에 자리했다.
보아하니 다들 미스릴로 만든 방어구를 어지간히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 * *
오크들의 덩치가 커서 이대로 녹여서 만들면 발키리 길드 헌터 이십여 명을 무장시킬 수 있을 듯했다.
“헌터들이 환장할 만하네요. 경무장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두당 2억 원 이상의 방어구가 생기는 것이니까요.”
“그렇게나 값어치가 나가나요?”
“네. 상위 몬스터를 잡아야 조금씩 나오는 것이라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금속이에요. 2억도 최소로 잡은 거지. 돈 많은 헌터를 만나면 그 이상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한참 미스릴을 녹여 갑옷을 만들고 있는데 유거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미스릴을 쳐다봤다.
뭔가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미스릴을 헌터들에게 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나요?”
“네?”
내가 정곡을 찔러서일까.
유거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거성 씨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미스릴을 헌터들에게 다 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오크들과 싸우는데 저희도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기술팀 헬퍼들이 있어서 화살촉이랑 투석기를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지금도 성곽을 만들어 주고 있어서 덕분에 안전하게 생활하고 있고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시니 위로가 되네요. 그럼 전 계속하던 일 하겠습니다.”
“말이라도?”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유거성을 쳐다봤다.
표정이 풀리긴 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여전히 불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짐작건대 뭔가 오해가 있는 듯했다.
“거성 씨, 혹시 제가 제 임의대로 미스릴을 발키리 헌터들에게 그냥 준다고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죠?”
“그럼 아닌가요?”
“끙…….”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오해를 하고 있었던 듯했다.
“제가 뭐라고 제 마음대로 이걸 처분하겠어요.”
“아닙니다. 힐러 님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몰라도 힐러 님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헬퍼들도…….”
“거참. 내가 무슨 공산당도 아니고 헬퍼들이 이해해 줘도 전 그럴 생각 없어요. 헌터들에게 미스릴 갑옷을 만들어주려는 건 정찰 임무가 현재 가장 위험한 일이라 그러는 것뿐이에요. 나중에 이곳에서 빠져나가면 다 정산을 받을 거예요.”
“정산을 받는 다고요?”
“물론이죠. 거성 씨가 말한 것처럼 이번 전투는 헬퍼 분들의 도움이 매우 컸어요. 당연히 전리품에 대한 권한도 헬퍼들이 더 많이 갖고 있고요.”
“아닙니다. 그래도 헌터들이…….”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들으세요.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네.”
던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정색을 한 듯했다. 헌데 이번엔 그럴 필요가 있을 듯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기에.
“부성아, 오크들이 꽤 잡힌 걸로 아는데 코어가 얼마나 나왔어?”
“지금 오천 개 정도 나왔고 천 마리 정도만 더 해체하면 될 것 같아요. 일전에 능선 전투에서 나온 것까지 합치면 팔천 개 정도 될 것 같아요.”
“그럼 코어만 한 40억 정도 되는 건가?”
“네. 형.”
이부성이 날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갑자기 코어 개수를 확인하자 그 의도가 궁금한 표정이었다.
“이제 전리품 정리는 어느 정도 된 거지?”
“네. 맞아요.”
“그럼 지휘부한테 얘기해서 헬퍼들의 지분도 보장해 주라고 해.”
“헬퍼들의 지분을 보장해 주라고요? 형님 일전에 얘기해 드렸지만 헬퍼들은 월급을 받고…….”
“지금은 비상 상황이잖아. 헬퍼들의 기여도만큼 전리품을 같이 나눠 주라고 해. 원래 코어는 잡은 사람이 갖는 거라며.”
“……네.”
이부성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동안의 룰을 바꾸는 것이었지만 딱히 반박할 수 없는 듯했다. 아마 지휘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헬퍼들은 평소에 후방에서 지원만 했지만, 이번엔 전장에서 같이 진지를 만들고 투석기를 쏘며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