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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36화 (36/255)

36화. 퍼스트 데이

“형, 수정이 누나랑 무슨 얘기 했어요? 엄청 다정해 보이던데?”

화장실에 가고 있는데 이부성이 부랴부랴 날 따라왔다.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이래저래 살았던 얘기 주고받았어.”

“그래요? 제가 볼 땐 수정이 누나가 형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네가 자꾸 그러니까 수정이가 왠지 더 예뻐 보이더라.”

“그래요? 그럼 한번 들이대 보세요.”

“그러다 아니면? 나 혼자 착각한 거면?”

“흠…….”

이부성이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내가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 거냐?’

난 이부성을 뒤로 하고 볼일에 충실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부성은 연예에 관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볼일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선뜻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수정이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정말 그녀가 좋아질 것만 같았기에.

11살이나 차이 나는데…….

게다가 그녀는 나이를 떠나서 외모도 훌륭했다.

서른여덟의 노총각인 내가 좋아하기엔 너무나 과분한 상대였다.

근데,

‘손잡고 싶다. 그리고 계속 얘기 듣고 싶은데…….’

그걸 알면서도 계속 그녀에게 마음이 향했다.

진짜 만에 하나라도 날 좋아할지도 모르니까.

‘모르겠다. 일단 돌아가자.’

난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들어 올리며 다시 권수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대로 아무런 말 없이 숙소로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가서 인사라도 하고 들어가야 할 듯했다.

“언니, 저기 오빠 왔다.”

“그래?”

자리로 돌아가니 권수정은 나현지와 윤다영과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난 쭈뼛거리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오빠, 왜 인제 왔어요. 오크들이 물어간 줄 알고 쫓아갈 뻔했잖아요.”

“미안…… 부성이랑 잠깐 얘기 좀 하느라…….”

꼬옥.

“…….”

“…….”

하얗고 가느다란 긴 손가락.

내가 다시 자리에 앉아 권수정이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현지와 윤다영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손을 잡는 게 무척이나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술김에 얘기하다가 우연히, 은연중에 잡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일부러 손을 뻗어 내 손을 붙잡았다.

두근두근.

쿵덕쿵덕.

고작 손을 잡은 것뿐인데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저 힐러 님…….”

“오빠라고 해야지.”

“네?”

“나랑 오빠, 동생 하기로 했는데 힐러 님은 아니지.”

“아. 그런가? 근데 오빠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그냥 형부라고 부를까요?”

“그럴래? 그럼?”

“와! 이 언니 봐라. 놀리려고 한 말인데 박력 장난 아니네요.”

나현지가 어이가 없다는 듯 권수정을 쳐다봤다.

두근두근.

쿵덕쿵덕.

그리고 이내,

“오빠, 애들이 형부라고 해도 괜찮죠?”

“……어.”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게 허락을 구했고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굴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내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는 것을.

“거봐요. 내 말이 맞죠. 해용이 오빠, 언니 좋아했다니까요. 헤헤.”

“그러게.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나현지와 권수정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설마 장난이었던 건가?’

당황스러웠다.

내심 수정이도 내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인 것인데 분위기가 왠지 술자리에서 통상 이루어지는 짓궂은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만약 장난이라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노기가 끓어올랐다.

아무리 술을 먹어도 그렇지.

이런 것 갖고 장난을 치다니.

복수할 것이다.

남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낀다는 것을 반드시…….

쪽!

“고마워요. 오빠. 용기 내줘서.”

“……?!”

“현지가 그러더라고요. 오빠도 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너무 나이 차이가 나서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제가 부탁했어요. 전 오빠를 좋아한다고 나름 표현을 한 것 같은데 오빠가 계속 선을 긋는 것 같아서 확인하고 싶어서.”

내 볼에 입을 맞춘 권수정이 날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두근두근.

쿵덕쿵덕.

차갑게 식어가던 심장이 다시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설마 뽀뽀까지 하면서 장난을 치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진짜 수정이도 내게 마음이 있는 듯했다.

드디어 내 인생에도 꽃이 피는 것이다.

온몸 곳곳에서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기분이다.

난 운디네를 만나 이능을 각성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행복했다.

그동안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 레이드가 끝나면 원정 결혼이라도 할까 고민을 했었다.

서른여덟이나 먹고도 양심 없이 예쁘고 어린 여자를 만나고 싶었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그런 조건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선 원정 결혼밖에 없기에.

물론 결혼하면 난 그녀에게 내 남은 삶의 동반자로서 최선을 다해 헌신할 마음마저 갖고 있었다.

“형부도 형부지만, 언니도 너무 연애 지수가 떨어져요. 맨날 오크만 때려잡을 줄 알지. 남자 마음은 하나도 모르잖아요.”

“야, 나도 어느 정도는…….”

“어허! 어디 멘토님께서 얘기하는데 말을 끊나요.”

“미안…….”

권수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나현지에게 사과를 해 왔다.

“오늘도 봐요. 제가 분명 형부도 언니를 좋아한다고 했는데도 혼자 상심해서 그냥 숙소로 들어가려고 했잖아요.”

“그거야, 용기 내서 먼저 손까지 잡았는데 오빠가 자리를 피하니까…….”

“나 진짜 오줌이 너무 마려웠어. 막걸리를 너무 많이 마셨다니. 나도 수정이 너랑 손잡고 얘기 듣는 게 너무 행복했는데, 그대로 있다간 바지에 오줌을 쌀 것 같더라고.”

난 손사래를 치며 이제 와 뒤늦은 변명을 했다.

바지에 오줌을 싸는 한이 있더라도 가만히 있었어야 했나 보다.

나현지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 일 날 뻔한 것 같다.

그런데 그때,

“풉! 귀여워.”

“그러게. 우리 힐러 님, 아니 형부한테도 이런 면이 있었네요.”

나현지와 윤다영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나 보다.

근데 난 그만큼 절실했다.

수정이도 날 좋아한다는데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 * *

세 시간쯤 술을 마셨을까.

어느새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사람들도 대부분 취기가 올라와 숙소로 돌아갔고 몇 사람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있고 싶은데…….’

수정이와 손을 잡고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이제 들어가야 할 때가 된 듯했다.

“언니, 저희도 이제 들어가 볼게요.”

“나도…….”

“언니는 형부랑 가셔야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요? 언니가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형부가 혼자 밤을 지새우는 게 불안하시다 고요.”

“어. 불안하긴 해. 혹시나 밤에 야생 동물이나 오크들의 기습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거봐요. 오늘부터 언니가 형부를 지켜주면 되겠네요. 옆에 태백산맥 헌터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요인 경호에 있어선 우리가 더 특화되어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오빠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불편해도 감수해야죠. 형부의 몸은 지금 본인의 것만이 아니잖아요. 형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긴긴 겨울을 우리가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겠어요.”

“그렇지. 아무래도 내가 옆에 있어야겠지?”

“언니 힘드시면 저희가 경호하고요.”

“아니야. 내가 할게. 너희도 힘들 텐데…….”

권수정을 손을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두근두근.

쿵덕쿵덕.

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함께하고 싶었다.

진짜 다른 흑심 없이 이렇게 손만 잡고 있어도 행복할 것 같은데 나현지 덕분에 자연스레 그렇게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난 현재 무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경호 인원이 없었던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육체 능력을 각성한 헌터들과 달리 난 오크 한 마리만 숨어들어도 위기 상황을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 이유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오크 한 마리 정도는 내가…….

‘들어가 있어.’

말이 그렇다는 거다. 말이.

똑똑한 줄 알았는데 눈치가 없었다.

‘고마워 처제!’

자리에서 일어난 난 잠시 나현지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에 자연스럽게 수정이의 손을 잡고 내 숙소로 걸어갔다.

* * *

“오빠, 일어나셨어요?”

쪽.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뜨니 수정이가 입맞춤을 해 주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뭉클뭉클.

난 눈을 뜨자마자 수정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꼭 포옹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일분일초가 내게는 행복 그 자체였다.

언제나 홀로 잠을 자고 쓸쓸히 일어나야 했던 삶에 누군가 항상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근래 나를 괴롭혔던 공허함과 외로움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

“이거 무슨 냄새야?”

수정이의 품에 안겨 그녀의 체온과 체취를 느끼고 있는데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꽤 익숙한 향기였다.

“우리 마스터 커피 중독자거든요. 몰래 숨겨 놓고 마시고 있는 거 오빠 주려고 제가 몇 개 훔쳐 왔어요. 헤헤.”

수정이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내 입에 갖다 대었다.

그녀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모닝 키스에 이어 모닝커피까지 마시더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오빠, 그럼 드시고 나오세요. 전 지휘 막사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지휘 막사?”

“네. 아까 현지가 와서 찾았는데, 오빠 깼을 때 저 없으면 찾을 것 같아서 인사하고 다녀오려고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아, 내가 너무 늦잠을 잤구나. 알았어. 얼른 가 봐.”

“네. 이따 봐요.”

쪽.

수정이가 내 입에 입을 맞추고 숙소를 나갔다.

그녀의 얼굴도 나만큼이나 웃음꽃이 만개했다.

내심 나만 좋았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 * *

오랜만에 늦장을 부리며 숙소에서 나오니 저 멀리 수정이의 뒤를 따라 발키리 헌터들과 요리팀 헬퍼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낚시하러 가려고요?”

“그게 아니라 주변 정찰을 한다기에 따라가는 중입니다.”

“정찰한다고요? 근데 요리팀은 왜 같이?”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김성준을 쳐다봤다.

“채소랑 향신료가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거라곤 밥이랑 고기 밖에 없어서 혹시나 주위에 먹을 만한 게 있나 찾아보려고요.”

김성준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기껏 하나를 해결했더니 또 다른 문제가 생긴 듯했다.

“저희끼리 가겠다는데 성준이 오빠가 부득불 따라온다네요.”

“코앞에 대파가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잖아. 내가 같이 가야 해.”

“그건 그렇지만 도망친 오크들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그렇죠.”

나현지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김성준을 쳐다봤다.

투석기의 공격을 받은 오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대로 위치 추적되지 않아 그런 듯했다.

허나,

‘무장이 너무 빈약해.’

내가 보기엔 헌터들도 불안해 보였다.

특히 나현지와 윤다영이.

그동안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이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는데 수정이와 가까워서 그런지 오늘은 유독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저거 녹일 수 있을까?’

-어, 문제없어.

오크 지휘관들이 입고 있던 미스릴 무구들을 보고 카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지야, 잠깐만 기다려 볼래? 아, 참 내가 현지라고 불러도 되지?”

“네. 물론이죠. 근데 왜요?”

“고마워서 옷 한 벌 맞춰 주려고.”

난 나현지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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