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35화 (35/255)

35화. 막걸리 (2)

“저 형님…….”

“왜요? 한 잔 주려고요?”

“그게 아니라…….”

유거성이 주전자를 들고 와 놓고선 몸을 배배 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멀찌감치 떨어져 식사를 하는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보였다.

요리팀 헬퍼들이 알아서 갖다줬는지 그녀들도 식사하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권수정 부마스터한테 사과하고 싶은데 같이 가 주실 수 있습니까?”

“사과하고 싶다고요? 이제 좀 화가 풀린 건가요?”

“네. 화가 좀 풀리기도 했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곳에서 함께 겨울도 지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처럼 데면데면하게 지내면 저희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그렇죠. 잘 생각했어요.”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유거성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한때 잘못된 선택을 할 뻔했지만 이제 다 지난 일이었다.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괴롭히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었다.

“부성아, 같이 가자.”

“저도요?”

“그럼 나 혼자 가라고?”

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부성을 쳐다봤다. 아니 사실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유거성이 부탁을 하니 선뜻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나도 발키리 길드 식사 자리에 가는 건 부담스러웠다.

발키리 헌터들은 전부 다 특유의 포스와 아우라가 있었고 왠지 혼자서 그녀들의 시선을 받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러질 않길 바라지만 혹시나 권수정과 지휘부가 유거성과 기술팀 헬퍼들의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있기에.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기면 난 내 권위와 체면을 내세워서라도 화해를 강요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나도 믿을 수 있는 버팀목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할 듯했다.

그 사람이 바로 이부성이었고.

“아니요. 당연히 같이 가야죠. 헤헤.”

이부성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기 싫은 모양인데 나 때문에 억지로 가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현지랑 다영이는 저쪽에 가서 앉을래?”

“네. 언니.”

우리가 다가오는 걸 본 권수정이 옆에 빈자리를 만드는 게 보였다.

짐작건대 그녀도 유거성을 기다린 듯했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제가 찾아뵈려고 했는데 먼저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부마스터님…….”

“팀장님이 먼저 이렇게 와주셨으니까 사과는 저부터 할게요. 그때 제가 현명하지 못하게 일 처리를 했어요. 헬퍼님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대화하고 상의하는 시간을 가졌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다급했었나 봐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요.”

“아닙니다. 제가 죄송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제가 괜히 꼬투리를 잡은 겁니다. 그렇게라도 불안한 마음을 좀 달래 보려고…… 잘못했습니다. 그때 제가 한 말은 다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지휘부에서 저희 헬퍼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권수정이 먼저 사과를 하자 유거성이 황송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바로 사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마치 외딴 섬에 갇힌 사람들처럼 언제나 쓸쓸히 자기들끼리 밥을 먹고 있던 발키리 길드 헌터 사이사이에 헬퍼들이 함께 식사하고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크으! 좋다.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네.”

막걸리 한잔을 들이 킨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생사고락을 함께 넘겨 놓고도 어제까지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헌터와 헬퍼들이 깔깔대며 서로 어울리는 걸 보고 있자니 이제야 오크들을 몰아낸 게 실감이 났다.

“형 혹시 이런 거까지 계산해서 막걸리를 만드신 거예요?”

옆에서 막걸리 한잔을 쭉 들이킨 이부성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난 그저 내가 술이 먹고 싶어 만든 것인데 혼자 또 상상의 나래라도 펼치고 있는 듯했다.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미래를 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것까지 예상했겠어? 그냥 내가 술이 먹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만든 것뿐이야.”

“흠!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노림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거 없어. 나도 그렇고 사람들도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 좀 숨통이 트일 만한 것이 없는지 생각하다가…….”

“거봐요.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이부성이 날 보며 새초롬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게 단단히 콩깍지가 쇠인 모양이다.

그저 조금이나마 유희를 즐기려고 만든 술 하나에도 그는 의미를 두려 하고 있었다.

“형, 원하는 바도 이루었으니 우린 이제 우리 자리로 돌아갈까요?”

“그럴까?”

적당히 취기가 오른 이부성이 주위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항상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곳에서 지내다가 여자들이 더 많은 곳에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오빠, 벌써 가시게요?”

“밥 먹고 있는데 방해해서 미안했어. 이제 불청객들은 빠져 줄 테니 편히 식사해.”

“불청객이라니요.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저랑도 한잔해요.”

권수정이 다가와 날 다시 자리에 앉혔다.

“저흰 단 한 번도 헬퍼 분들이랑 따로 식사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

“저희도 태백산맥 헌터 분들처럼 헬퍼 분들이랑 같이 식사도 하고 어울리고 싶었는데 헬퍼 분들이 불편해해서 자리를 피해 주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권수정이 억울하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며 하소연을 해 왔다.

주위에 있던 발키리 길드 헌터들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그동안 나도 오해를 하고 있었던 듯했다.

솔직히 나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선민의식에 의해 헬퍼들이랑 따로 밥을 먹는 줄 알고 있었으니까.

“레이드가 무난하게 될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 같아요. 조금 불편하고 어색해하더라도 처음부터 같이 밥을 먹었어야 했었는데 말이죠.”

권수정이 자책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술이 들어가서일까?

평소완 달리 오늘은 표정이 다양했다.

“하긴…….”

난 헬퍼들을 쳐다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직장 생활을 하며 수도 없이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한 직장에 다니면서도 이상하게 밥 먹을 때가 되면 남직원은 남직원대로. 여직원은 여직원대로 따로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구내식당을 이용하면서도 같은 팀끼리도 남, 여를 구분해서 밥을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나도 의아할 때가 많았다.

“그럼 너희는 헬퍼들이랑 함께 밥을 먹고 싶은 거지?”

“네. 맞아요. 그래서 저희도 팀장들에게 몇 번이나 같이 먹자고 얘기를 했는데 일부러 그럴 필요 없다며 정중히 거절하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앞으론 같이 먹자. 내가 김성준 팀장한테 얘기해 놓을게.”

“그래 주실래요?”

“물론이지.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밥 같이 먹는 게 뭐 어렵다고.

고민하고 자시고 할 문제도 아니었다. 아니 가족이라면 응당 밥을 같이 먹는 게 맞았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얼굴 맞대고 계속 밥을 먹다 보면 어지간한 일은 자연스레 풀리게 되어 있으니까.

권수정이 말한 것처럼 애초에 밥을 같이 먹고 대화하는 시간이 많았다면 헬퍼들이랑 트러블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 * *

“고마워요. 오빠. 제 술 한잔 받으세요.”

“그래.”

권수정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지으며 내 술잔을 채워줬다.

그런데,

‘너무 쓰다듬는데?’

그녀의 손이 내 허벅지 위를 맴돌며 계속 스킨십해 왔다.

유거성과 헬퍼들이 화해를 하며 막걸리를 깨나 마셨는지 그녀의 얼굴은 취기가 올라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오빠가 있어서 참 든든해요.”

“나도 너희가 있어서 너무 든든해.”

“치! 전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정말 오빠가 있어서 큰 힘이 된단 말이에요. 지금 우린 고립 되어 있고 이번 겨울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 더 머물러야 할지 모르잖아요.”

“……?”

“이런 상황에서 오빠처럼 생산성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지휘부로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를 거예요. 게다가 오빠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헤아릴 줄 알고요.”

쓰담쓰담.

“사람들도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 오빠를 의지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도 오빠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암담해요. 만약 오빠가 없었다면 기술팀 헬퍼들이 정말 떠나갔을지도 모르니까요.”

쓰담쓰담.

술 먹으면 이런 캐릭터였나?

나를 자신의 옆에 앉힌 권수정은 쉼 없이 얘기를 이어갔고 또 스킨십을 해 왔다.

내 허벅지를 만지고 또 팔짱을 꼈다가 지금은 자연스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형, 전 저쪽 가서 마실게요.”

“어, 왜? 같이 마시지 않고?”

이부성이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보기엔 그저 오빠, 동생을 하기로 해서 내가 좀 편안해져서 그러는 것 같았는데 이부성이 오해를 하는 듯했다.

‘좋긴 한데…….’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든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부성이라도 옆에 있으면 괜찮았을 텐데 단둘이 이러고 있으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허나,

“저 고등학교 때 놀이동산에 갔었는데…….”

권수정은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지 내 손을 잡고선 계속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오빠는 남산 타워 가 봤어요? 전 나중에 남자친구 생기면…….”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게슴츠레 눈을 뜨고선 얘기를 하는 권수정의 모습은 꽤 귀여웠다.

“……파스타랑 스테이크가 엄청 맛있더라고요.”

그녀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말을 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을 이어갔다.

“……나중에라도 제주도 한번 꼭 가 보려고요.”

난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만히 들어주었다.

여자들이랑 말을 섞어 본 적이 하도 오래되어 뭐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녀도 무언가 대답을 원하고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 듯했다.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라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막걸리를 마셔서일까.

권수정은 아직 한참 할 말이 남아 있는 모양인데 배뇨감이 몰려왔다.

이대로 있으면 곧 바지에 쌀 것 같은데 난 선뜻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더 있고 싶어.’

이 자리에 앉아서 손을 잡고 계속 그녀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녀가 순수하게 나를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이러는 것일지 몰라도 난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허나,

“수정아, 미안한데 오빠 화장실 좀 다녀올게.”

“……네.”

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이 서른여덟 먹고 바지에 오줌을 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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