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34화 (34/255)

34화. 막걸리 (1)

“이럴 때 소주라도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이제 좀 여유가 생겨서일까.

술 한 잔이 생각났다.

이래서 사람의 몸을 간사하다고 하나 보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오크들의 위협에 죽네 사네 했으면서 막상 조금 여유가 생기니 유흥을 즐기고 싶으니 말이다.

아니 애초에 하루가 멀다고 술을 달고 살았던 내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 저도 그 생각을 했는데. 진짜 많이도 아니고 딱 석 잔만 먹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꿀꺽.

소주라는 말에 이부성이 군침을 흘리며 날 쳐다봤다. 나만 술을 먹고 싶은 건 아닌가 보다.

그런데 그때,

“소주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막걸리라도 시원하게 한 잔 쭉 들이켰으면 좋겠다. 젠장.”

장지원이 투덜거리며 걸어와 내 옆에 걸터앉았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술 한 잔들 하고 싶을 거야. 특히 오크들 해체하는 헬퍼들은 더 간절할 테고. 아무리 사람 잡아먹는 몬스터라 하지만 배 갈라서 내장 파헤치고 힘줄 뽑아내는 게 정신적인 피로가 대단하거든.”

“그렇겠죠.”

난 장지원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전에 마장동에 지원을 갔을 때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도축하는 직원들이 다들 허리에 소주 한 병씩 꽂아 놓고 마시면서 일을 해서 의아해했는데 몸이 힘든 걸 떠나서 맨정신에 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해 뜨면 일어나 고기 해체하고 해 지면 들어가서 자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맨정신엔 오랜 시간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그건 야생 벼를 탈곡하고 투석기를 신설하는 헬퍼들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리 황금 들판을 차지해 당장 위기는 넘겼다 하나 저렇게 죽어라 일만 하려고 살아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일했으면 그 보답이 따라와야 할 거 같았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살맛이 나지 않겠는가.

“막걸리라…….”

난 자리에서 일어나 요리 팀을 책임지고 있는 김성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해용이 형? 어디 가세요?”

“만들어 보려고.”

“네? 뭘요? 혹시 막걸리를 만들겠다는 건 아니죠?”

“맞아. 막걸리.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걸 만드는 걸 보긴 봤거든.”

“헐! 대박!”

“진짜? 진짜 막걸리를 만들 수 있다고?”

장지원과 이부성이 호들갑을 떨며 날 쫓아왔다.

봤다고 했지. 만들 수 있다고는 안 했는데 이미 막걸리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신이 난 얼굴이었다.

아무리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하지만 이렇게 단지 먹고 싸고 자기 위해 살아가는 건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할 듯했다.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지원을 기다리며 이렇게 고단하기만 하루하루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 * *

“성준 씨, 야생 벼 탈곡한 거 빻아서 햇빛에 좀 말려주세요.”

“얼마나?”

“최대한 많이. 양은 넉넉하죠?”

“이번 겨울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몇 년은 먹을 만큼 충분합니다. 그럼 100kg 정도 말려 볼까요?”

“네.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네요.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테니.”

막걸리를 만들겠다는 말에 김성준을 필두로 요리 팀 헬퍼 전원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내 수발을 들었다.

다들 나만큼이나 술 생각이 간절한 듯했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일인데 사람들의 호응이 뜨거워 어떡해서든 성공시켜야 할 듯했다.

‘고두밥을 만들었던 것 같은데…….’

김성준이 쌀을 빻아 말리는 동안 난 또 다른 쌀을 씻고 물을 부어 불리는 작업을 했다.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선 누룩이 필요했고, 누룩만 만들어 낸다면 90%는 성공한 것이었다.

조, 수수, 밀, 쌀과 같이 전분이 있는 곡물만 있으면 누룩을 만들어 막걸리를 제조할 수 있다.

곡물마다 약간 제조방식이 달랐는데 워낙에 오래전에 본 거라 기억이 희미해져 이것저것 시도해 볼 참이었다.

‘분명히 그때 다른 것은 넣지 않았어.’

농주 동동주.

평소에는 그냥 슈퍼에 가서 소주나 막걸리를 사드셨지만 제사가 있을 땐 항상 동네 어르신들은 손수 직접 누룩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리곤 했었다.

기억이 희미하긴 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전분이 있는 곡물만 있으면 누룩을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걸리 역시 콩을 삭혀 만드는 메주처럼 효소를 이용한 발효 음식 중에 하나라 대충 그 원리는 이해하고 있었고 시행착오가 있을지언정 만들어 낼 수 있을 듯했다.

곡물과 시간 아니 정성.

그거면 충분했다.

* * *

보름의 시간동안 백여 번이 넘는 시행착오 끝에 난 누룩을 만들어 냈고, 또 그걸 이용해 막걸리를 만드는 최적의 레시피를 찾아냈다.

“이제 적당히 발효된 것 같네요.”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네요. 쌀 하나 갖고 술을 만드시다니…….”

꿀꺽.

김성준이 군침을 삼키며 주전자를 쳐다봤다.

주전자 안에는 우유 빛깔을 뽐내며 막걸리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거 그렇게 마시면 훅 갑니다. 기다려 봐요.”

김성준은 주전자를 들고 통째로 막걸리를 마시려고 했고 난 부랴부랴 그의 손에서 주전자를 뺏었다.

그대로 마셨다간 너무 진해서 한순간에 핑 도는 수가 있었다.

지금은 막걸리라기보다는 원액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물이랑 설탕을 섞어서 희석도 시키고 단맛도 좀 내야 더 맛있고 부담 없게 먹을 수 있었다.

막걸리를 만드는 최종 단계였다.

“크으! 죽인다.”

막걸리를 한 모금 들이켜니 막걸리 특유의 알싸함이 목젖을 넘기며 온몸을 감싸왔다.

짜릿 그 자체!

밖에서도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소주, 맥주, 막걸리 가리지 않고 즐겨 마시는 스타일이었던 난 어설프게나마 만든 막걸리를 마시는 것으로도 가슴에 막혀 있던 무언가 뻥 뚫리면서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황홀함을 체험했다.

꿀꺽꿀꺽.

술을 한잔 들이킬 때마다 그동안 했던 걱정과 노독이 싹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형님, 이제 먹어도 되는 건가요?”

“네. 드셔보세요. 간이 딱 된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형님.”

꿀꺽꿀꺽.

“크으! 진짜 죽이네요. 형님이 시켜서 하기야 했지만 진짜 막걸리를 만들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절 죽이고 싶을 정도로 너무 맛있습니다.”

막걸리 한잔을 단숨에 들이켠 김성준이 날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표정을 보아하니 꽤 감동한 듯했다.

‘던전에서 술을 만든 최초의 사람이 되는 건가?’

나도 이번엔 내가 참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솔직히 밖에서 천 원이면 사 먹을 수 있는 싸구려 막걸리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맛이었지만, 그래도 술은 술이었다.

맛이 좀 쓰고 텁텁하면 어떠한가. 먹고 취기만 올라오면 되는 거지.

“부성아, 너도 한 모금 하고 사람들 오라고 해. 마침 밥 먹을 때도 됐네.”

“네. 형.”

뎅뎅뎅! 뎅뎅뎅.

이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막걸리를 마시며 종을 울렸다.

일일이 작업 현장에 가서 전달하면 시간이 걸리니 종소리로 약속을 정한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후다다다다!

후다다다닥!

사람들이 마치 달리기 경주라도 하는 것처럼 먼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뛰어왔다.

“드디어 완성된 건가요.”

“대박. 던전에 들어와서 막걸리를 다 마시더니. 형님 덕분에 이런 호사도 다 누리네요.”

꿀꺽꿀꺽.

꿀꺽꿀꺽.

막걸리로 대동단결.

헬퍼들은 잘 익은 소고기와 생선구이가 있는데도 뒷전에 두고 막걸리를 흡입했다.

* * *

“안 그래도 술 생각이 간절했는데 막걸리를 마실 수 있게 될 줄이야. 정말 감사드립니다. 형님.”

“ㅅ…… 발 너무 맛있다.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막걸리를 맛본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스타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기쁨을 표현했다.

어째 투석기를 사용해 오크들을 몰아냈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고립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유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야생벼 수확하느라 힘드시죠. 제가 한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밖에 나가면 형님이랑 술 한잔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자리가 생기네요. 여, 영광입니다.”

난 자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오크들 해체하기 힘드시죠. 앞으론 새참으로 막걸리를 갖다 드릴 테니 고단해도 힘 좀 내주세요.”

“당연히 힘을 내야죠. 이렇게 막걸리까지 만들어서 먹게 해 주는데 농땡이 부릴 수야 없죠.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맞습니다. 농땡이 부리는 사람 있으면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버리겠습니다.”

“이 사람아, 말조심해. 그러다 자네 다리가 제일 먼저 부러지는 수가 있어. 하하.”

“거참. 형님은…….”

해체팀 헬퍼들이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다들 오크들로 인한 불안함 때문인지 작업하는 것에만 열중했는데 술이 한잔 들어가자 다들 한결 더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때,

“거성이 형님, 일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제 술 한잔 받으세요.”

“……?!”

“형님들이 화살촉이랑 투석기를 만들어서 오크들을 몰아냈는데 염치가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요. 감사드립니다.”

“거성아, 내 잔도 한잔 받아라. 미안하다. 나라도 챙겼어야 하는데 내 몸 챙기기 바빠서 신경을 못 썼다.”

요리팀을 이끄는 김성준과 해체팀을 이끄는 배상우가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유거성에게 다가가 술을 권했다.

‘받으세요.’

난 유거성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습니다. 형님. 상우 너도 고맙다. 흑.”

유거성이 눈물을 글썽이며 막걸리를 받아 마셨다.

육체적 노동도 노동이지만 이 중에서 가장 마음고생을 한 사람은 아마 유거성일 것이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헬퍼들이 술을 핑계로 슬며시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자! 술들 채우세요. 제가 건배 제의 한번 하겠습니다. 이 술로 지난 일은 다 털어버리고 앞으론 으쌰으쌰해서 우리 한번 잘 지내보죠.”

난 막걸릿잔을 들고 일어나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다 눈을 마주쳤다.

“제가 ‘우리의 미래를’ 하면 여러분은 ‘위하여’ 하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벌컥벌컥.

짝짝짝! 짝짝짝!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옆에 있는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며 술을 들이켜고 박수를 쳤다.

“해용이 형. 제 술도 한잔 받으세요.”

“그럴까?”

벌컥벌컥.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부성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받아 마셨다.

“크으. 좋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런 복잡한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행복감이 맴돌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왠지 이곳에서 그냥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있겠다.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겠다.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집 있겠다.

게다가 밖에선 사회 낙오자였던 내가 이곳에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통솔하고 있었기에.

오크들의 위협만 없으면 지구에서 사는 것보다 이곳에서 이렇게 지내는 것도 제법 괜찮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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