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성곽
“해용이 형, 무슨 얘기 하신 거예요? 분위기가 장난 아니던데. 권수정 부마스터가 고백이라도 했나요?”
“그런 거 아니야.”
“에이. 맞잖아요.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거기서 왜 둘이서 포옹을 해요? 그것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부성이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사실대로 말을 하는데도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수정이가 많이 힘들었나 봐. 그래서 포옹이 하고 싶었나 보더라고. 그럴 때가 있잖아. 남녀 사이를 떠나서 너무 힘이 들 때면 누구라도 안아 줬으면 할 때가.”
“형, 진짜 실망이네요. 저한테는 속에 있는 말 숨기지 말고 다 하라고 했으면서 형은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죠?”
“내가 뭘 어쨌다고?”
“지금 부마스터한테 ‘수정’이라고 했잖아요. 그 말은 둘 사이에 무슨 관계 변화가 있다는 증거죠! 그런데도 저한테까지 계속 숨기실 건가요?”
“거참. 그거야 너랑 다른 헬퍼들이랑 지내는 것처럼 자기도 오빠, 동생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거고. 수정이랑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만데. 무슨 고백이야.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나이 차가 무슨 상관이에요. 누가 형을 서른여덟 살로 보겠어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저랑 형이랑 친구라 해도 믿을걸요?”
“엥?”
“진짜예요. 형 요즘 거울 안 보셨죠. 시간 나면 한번 보세요. 형 피부 장난 아니에요. 누가 보면 혼자 탈출해서 몰래 마사지 샵이라도 다니는 줄 알 정도라니까요.”
이부성이 부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얼굴을 보아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듯했다.
이미 머릿속으로 내가 권수정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단정을 지은 듯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오해가 커지지 않도록 진지하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부성아.”
“네?”
“솔직히 얘기해서 난 수정이가 좋다. 동료로서도 좋고, 여자로서도 좋아. 얼굴도 예쁘고, 날씬하고, 리더십도 있고. 수정이 같은 여자가 좋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거야. 더욱이 나같이 나이까지 많은 노총각이라면 더더욱.”
“형…….”
“근데 딱 거기까지야. 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수정이한테 부담 주기 싫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 하는 거잖아. 형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예요.”
“형이 언제 너한테 거짓말하디. 정말 많이 힘들었나 보더라고. 내가 안아 주니까 어렸을 때 아빠도 이렇게 안아 줬다고 고마워하더라.”
“아빠요?”
“어.”
“아…… 죄송해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일전에 형한테 농담한 적도 있고 해서 마음 있나 했어요.”
이부성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내심 나와 권수정이 잘되길 바랐는데 아니라고 하니 서운한 듯했다.
“형 말을 들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동료들은 다쳐서 다 쓰러졌지. 그 와중에 오크들은 쳐들어오고 있는데 믿었던 헬퍼들은 자기들끼리 도망간다며…… 어휴!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부마스터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장난 아니었겠어요.”
“……그렇지.”
난 이부성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기 있는 연예인도, 잘 나가는 스포츠 선수도. 부잣집에서 태어난 금수저도.
남들이 볼 땐 마냥 부럽고 동경하는 삶이었지만 다 나름에 삶의 고충이 있는 것인데 그동안 그걸 내가 너무 간과한 것 같다.
No. 9 발키리 길드의 부마스터.
선입견으로 인해 한없이 강하고 단단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수정이도 한창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창 무르익고 성장하고 있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헌데 힘들고 가끔은 투정을 부리고 싶어도 위치가 위치다 보니 그런 것조차 마음껏 할 수 없었을 테고.
그녀마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더 동요를 했을지도 모르니까.
* * *
슈우웅 펑!
슈우웅 펑!
능선 위로 올라간 헌터들이 마치 여의도 불꽃 축제라도 하는 것처럼 형형 색깔의 폭죽을 터트렸다.
퇴각에 성공한 일진 파티 헌터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지현아, 하루에 한 번씩 계속 같은 색깔의 폭죽을 쏘아 올려.”
“……알아듣겠죠?”
“어. 민정이라면 분명 알아볼 거야.”
권수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박민정 부마스터가 퇴각에 성공한 거야?”
“네. 폭죽이 터진 모양이 민정이 것이었어요.”
“아, 그래? 근데 지금은 무슨 신호를 보내는 건지 물어봐도 돼?”
“안전, 대기, 시간…… 여러 가지 의미가 혼합된 신호이긴 한데 종합하면 우리는 안전하니 조급해하지 말고 병력을 꾸리는데 시간을 갖고 만전을 기하라는 신호예요.”
“폭죽 하나로 그렇게까지 의사 전달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하네.”
“저희도 폭죽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사용한 건 처음이에요. 근데 민정이라면 분명 알아들을 거예요.”
권수정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게이트가 있는 하늘을 쳐다봤다.
퇴로에 수만 마리의 오크들이 지키고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박민정 부마스터가 병력을 데리고 구하러 온다고 확신을 하는 얼굴이었다.
이부성이 그랬다.
퇴각에 성공한다 해도 지원 병력을 꾸리기에 애를 먹을 것이라고.
허나,
‘태백산맥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권수정의 얼굴 어디에도 지원 병력이 오지 못하거나 늦을 거라는 의심을 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는 겨울 준비만 하면 되겠네요. 이대로 버티고 있으면 민정이가 우릴 구해 줄 테니까요.”
“밖에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데 정말 겨울 준비만 해도 되겠어?”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민정이가 나갔으니 어떡하든 저희를 구하러 올 거예요. 상황이 정 여의치 않으면 대통령 멱살이라도 잡아서 군대를 투입 시키거나, 그도 힘들면 군부대를 습격해서 미사일이라도 들고 올 친구니까요.”
“헐…….”
“마스터가 지원군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했으니 목숨이 살아 있는 한 그 지시를 이행할 아이니 이제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권수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통령 멱살.
군부대 습격.
난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일인데 권수정은 마치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가는 거마냥 자연스럽게 얘기했다.
그동안 너무 쉽게 대화를 섞고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No. 9 발키리 길드.
내 옆에 있는 헌터들이 대한민국에서 아홉 번째로 강한 무력 집단이었다는 것을.
“오빠,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려면 석벽을 지워야 할 것 같은데 오빠가 헬퍼 분들을 설득해 주실 수 있나요?”
권수정이 황금 들판을 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능선과 달리 이곳은 평야 지대였고 사방이 오픈되어 있어 방어하는 게 용이하지 않았다.
설득이 아니라 이곳을 사수하려면 강제라도 시켜야 할 일이었다.
“알았어. 내가 가서 말해볼게.”
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헬퍼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진지와 목책, 그리고 투석기까지. 지금도 골병이 들 정도로 지쳐 있는데 석벽까지 만들자고 하면 아마 다 혀를 내 두를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부탁하지 않아도 더 이상 권수정이 악역을 맡는 건 내가 원하지 않았다.
* * *
“거성 씨, 여기에도 깃발 하나 꽂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 지시를 받은 유거성이 바닥에 깃발을 꽂았다.
그렇게 난 기역 자 모양으로 세 개의 깃발을 땅에 심게 했다.
“거성 씨.”
“네.”
“지금 표시한 곳을 이어 석벽을 쌓았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이렇게 넓게요? 높이는 어느 정도까지 올려야 하나요?”
“한 십 미터?”
“헉!”
유거성 놀람과 당황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지금 설마 성곽이라도 만들려는 건가요?”
“오! 성곽! 맞아요. 그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네요.”
난 유거성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석벽.
말 그대로 돌로 쌓는 벽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오크들을 막기 위해 조금 더 크고 두껍고 넓게 짓는 것이었기에 성곽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거 같았다.
“만들 수 있을까요?”
“후방은 투석기가 자리한 능선이 있어 천혜의 장애물이 있으니 괜찮을 것 같고 그렇다면 앞쪽과 양쪽을 다 막아야 하는데…….”
“왼쪽에도 성곽을 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둘러보니 계곡이 흐르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깃발을 기역 자 모양으로 심은 거고요.”
“흠…… 그럼 다행이긴 한데 앞쪽과 오른쪽만 막는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능은 하다는 거죠?”
“네. 최근에 제주도에 펜션을 짓고 돌담을 만드는 게 유행이라서 경험이 있는 헬퍼가 여럿 있기는 합니다.”
성곽을 짓는다는 가정하에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
난 그가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대규모 공사.
능선 위에 진지를 만들고 투석기를 만드는 것도 힘들었지만, 성곽을 쌓는 건 그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 자명했다.
아마 공사가 시작되면 입에선 단내가 날 만큼 힘들 것이다.
장비가 갖춰진 공사장에 가서 벽돌만 날라도 골병이 들기 일쑤인데, 우린 지금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해야 할 것까지 다 수작업으로 해야 했으니까.
“힐러 님께서 원하시는 규모의 성곽을 지으려면 정말 커다란 바위를 수없이 많이 옮겨야 합니다. 그건 헌터님들께서 맡아주시는 건가요?”
유거성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장지원과 권수정을 바라봤다.
규모가 규모다 보니 헬퍼들만으로 공사를 시작하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듯했다.
“물론이죠. 바위를 나르는 건 저희가 맡을게요.”
권수정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곽 짓기.
헬퍼들에게 제대로 쉴 틈도 주지 못한 채 대규모 공사에 착수했다.
* * *
성곽 공사 시작 첫날.
“부성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우리 잠깐만 쉬었다 하자.”
난 등에 짊어졌던 바위를 내팽개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예상은 했지만, 성곽을 짓는 건 정말 인력으로만 할 일이 아닌 듯했다.
오크고 자시고, 이렇게 계속 일을 했다간 진짜 골병이 들어 죽을 수도 있을 듯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옐로 아이를 넉넉하게 먹어서 지금 네 몸 상태는 최상이니까.
운디네가 형상화되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왠지 저 미소가 얄미워 보였다.
나도 안다.
내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내가 지금 말하는 건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다들 너무 지쳐 있어.’
난 자리에 앉아 가만히 사람들을 둘러봤다.
성곽을 짓는 헬퍼들.
야생 벼를 베어 내고 탈곡하는 헬퍼들.
오크들을 해체하는 헬퍼들.
투석기를 보수하고 신설하고 있는 헬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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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퍼들은 다들 맡은 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살 수 있다는 희망.
지원 올 거라는 믿음.
권수정과 마찬가지로 헬퍼들 역시 퇴각에 성공한 박민정 부마스터가 지원 병력을 데리고 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꽉 물고 버티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