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지원
“고작 오크들 따위에게…….”
발키리 부마스터 박민정.
게이트 앞에 당도해 폭죽을 터트린 그녀는 분노 어린 표정을 지으며 오크의 숲을 쳐다봤다.
일주일 가까이 땅을 파고 숨어 있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그 와중에 오크들의 경계마저 뚫어내다 생긴 상처로 인해 온몸 곳곳에 혈흔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눈은 활화산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언니, 진정하세요. 분명 다 살아 있을 거예요. 이 정도 고난도 이겨내지 못할 만큼 약하게 키우지 않았잖아요.”
“그래. 분명 살아 있을 거야. 오크들 따위에게 뺏길 목숨이었다면 이미 진즉에 죽었겠지.”
박민정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게이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키리 길드 최정예 헌터들로 꾸려진 일진 파티.
늑대인간의 숲.
언데드의 무덤.
뱀파이어의 탑.
.
.
.
오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위 몬스터가 서식하는 던전에 레이드를 가서도 항상 길드의 선두에 서서 길을 개척했던 최정예 전사들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지원군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
박민정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이곳에 같이 당도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지만, 나머지 파티원들 역시 기회를 엿보며 몸을 추스르고 있을 거라고.
* * *
“왜 저러고 있는 거지?”
게이트를 통과한 박민정은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발키리 길드의 문양을 한 망토를 입고 깃발을 든 이천여 명의 무리가 군인들과 무기를 겨누고 서로 대치를 하는 게 보였다.
“지혜?”
발키리 길드 훈련생의 교육을 맡는 훈련 교관. 정지혜.
낯익은 얼굴을 확인한 박민정은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길드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무력이 출중하지만,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레이드에 참여하지 않고 길드 본부에 남아 있는 숨은 인재 중에 한 명이었다.
“부마스터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군인들이랑 이러고 있어?”
정지혜한테 묻고 있었지만, 박민정의 눈은 군인들을 향해 있었다.
정지혜가 병력을 이끌고 여기에 있는 이유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돌아올 때가 된 레이드 팀이 나오지 않고 연락마저 끊겼으니 길드 본부에선 무슨 일이 생긴가 싶어 병력을 꾸려 출동을 하는 게 당연했기에.
다만,
‘용병들은 그렇다 치고 아레스랑 레인보우 헌터들도 와 있네?’
의아한 것은 마치 게이트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걸 아는 것처럼 대규모 병력이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부산과 인천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는데 방어벽이 뚫린 모양이에요.”
정지혜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현 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었고.
“이런…….”
박민정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부산은 뱀파이어.
인천은 늑대인간.
이능이 근력과 체력에 치우친 오크와 달리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도 할 수 있고 하늘을 날고 마법까지 구사하는 것은 물론이며 인간을 몬스터화 시키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그런 몬스터가 바리케이드를 뚫고 민간에 숨어 들어갔다면 국가 비상 상태에 따르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오크의 숲에서도 웨이브가 생긴 건 아닐까 하고 훈련병을 모두 소집하고 길드 재산을 처분해 용병도 모집하고 친분이 있던 길드에게도 연락해서 지원을 받아 병력을 모았는데…… 저희 보러 부산으로 가라고 하잖아요.”
박민정에게 설명하며 정지혜는 살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한 사람을 쳐다봤다.
재난 관리 본부장 김용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50대 중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비상 소집이 떨어진 거야?”
“네. 모든 레이드를 중지하고 부산으로 모이라는 명령서를 내밀더라고요.”
“흠…….”
박민정은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몬스터 웨이브가 생길 시 모든 헌터 길드는 재난 관리 본부의 통제에 따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코어와 몬스터의 부산물을 처리할 때 세금도 감면해 주고 레이드 지원비까지 후원받으며 혜택을 받고 있었고.
그런데 그때,
“에이! 누나 뭘 고민해. 보아하니 안에 발키리 헌터들 갇혀 있나 본데 이것들 얼른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자.”
“……?!”
검은색 갑주를 차려입고 기다란 장창을 손에 든 사내가 앞으로 나오며 군인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NO. 1 아레스 길드의 부마스터이자 흑기사란 닉네임으로 유명한 A급 헌터였다.
“1분 드릴게요. 그 안에 총 치우고 길 트세요. 죽고 싶지 않으면.”
조성태가 앞으로 나옴과 동시에 같은 복장을 한 헌터 수백여 명이 군인들을 향해 창을 들이밀며 당장이라도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성태야, 잠깐만. 우릴 도와주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군인들을 공격하는 건 안 돼.”
“나도 군인들과 싸우는 거 싫어. 근데 어떡하겠어. 저 빌어먹을 놈들이 길을 막고 비켜 주지를 않잖아. 힘으로 뚫는 수밖에.”
박민정이 앞을 막아서자 조성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쭉 내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나라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여러분들도 같은 생각이시고요?”
김용규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헌터들을 바라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헌터 협회와도 이미 다 얘기가 된 부분입니다. 기차를 대기 시켜났으니 모두 차량에 탑승해 부산으로 이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까는 소리 하고 있네. 헌터 협회고 나발이고 나 그런 거 모르니까 길 터라. 당장 눈앞에서 내 지인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한테 지금 그들을 놔두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라고?”
휘이익.
퍽!
“큭.”
김용규가 협박스런 말로 헌터들을 회유하려고 하자 조성태는 일말의 고민 없이 그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이 새끼가! 모두 사격 개시”
김용규가 공격받자 어깨에 견장을 메고 있던 군인 한 명이 조성태에게 총구를 겨누며 발포를 지시했다.
허나,
“애써 움직이려 하지 마세요. 무리하게 움직이려 하다가 심장마비라도 걸려 죽으면 제 책임 아니에요.”
“……?!”
“……?!”
총을 발사하는 군인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손가락을 움직이려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여자를 쳐다봤다.
최은빈.
NO. 3 헤라 길드의 부마스터이자 닉네임 마녀로 불리는 A급 헌터였다.
어느새 그녀의 몸에서 시작한 검은 아우라가 군인들을 감싸고 있었다.
조성태와 최은빈.
두 사람 모두 발키리 길드 초창기 시절부터 함께 던전을 드나들며 친분을 다진 사이였다.
“민정 언니. 어떻게 할 거야? 들어갈 거야. 말 거야?”
“너희들 정말 이래도 되겠어?”
“몰라. 언니는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봤어. 골치 아픈 일은 우리 마스터가 알아서 해결하겠지, 뭐.”
“끙…….”
박민정은 조성태와 최은빈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우리 마스터는 나 아직 중국에 있는 걸로 알걸? 근데 윤미 누나 구하려고 그랬다 하면 다 이해해 줄 거야.”
“……?!”
두 사람의 태도를 보아하니 길드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병력을 이끌고 지원을 온 듯했다.
발키리 길드 300명.
아레스 길드 헌터 300명.
헤라 길드 헌터 300명.
용병 1,000명.
“고맙다. 얘들아. 이 은혜는 꼭 갚을게.”
박민정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라와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동료들을 먼저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조성태의 말처럼 당장 내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는데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수백 명의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내 사람 한 명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안 그래도 먼저 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할 판인데 먼저 선뜻 나서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에서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을 할 시간도 없었고.
박민정은 베이스캠프에 갇혀 있는 길드원들만 생각했다.
“지혜야.”
“네. 부마스터.”
“모두 제압해.”
“네. 알겠어요.”
박민정은 발키리 길드원들을 시켜 군인들을 뚫고 게이트로 다시 넘어갔다.
* * *
‘……많이 힘들었었나?’
이제 그만 떨어질 때가 된 것 같은데 권수정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저 부마스터님…….”
“힐러 님이 옆에 계셔서 정말 큰 힘이 됐어요. 아마 저 혼자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권수정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듯 읊조렸다.
눈을 마주치고 하기엔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꼬옥.
토닥토닥.
난 두 손에 힘을 주고 그녀를 더 꼭 안아 주었다.
‘밥 좀 잘 챙겨 먹지.’
발키리 길드의 부마스터이자 현재 우리를 지휘하고 있는 총사령관.
멀리서 봤을 땐 한 없이 크고 단단해 보였는데 이렇게 포옹을 하고 나니 왠지 속상한 마음이 들 정도로 작고 너무 마른 듯했다.
‘심장아, 나대지 마라. 그런 분위기 아니다.’
쿵덕쿵덕.
본의 아니게 느껴지는 그녀의 몸과 체취 때문일까.
내 의지완 상관없이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냄새와 가슴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이 내 몸을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미친놈도 아니고…….’
오랜 시간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난 단 한 번도 권수정을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우였기에.
남, 여 사이는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로 이별할 수 있지만, 그녀와 난 돈독한 전우애로 인연을 쌓은 그 이상의 관계였다.
불끈불끈.
위험했다.
더 이상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 아직 살아있다.’
오랜 시간 활동을 하지 않았던 놈이 자신의 건강함을 자랑했고 이대로 있으면 권수정도 느낄 수 있을 듯했다.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난 권수정을 존경했고 또 존중하고 있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실수하고 어색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저 힐러 님, 저도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오빠요?”
쿵덕쿵덕.
권수정의 입에서 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하는 흘러나왔다.
오빠라니?
이 말을 마지막에 들어 본 게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27살.
아니 11살이나 차이 나는 여자 사람한테는 아예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힐러 님이랑 형, 동생 하며 지내는 태백산맥 헌터분들이랑 헬퍼 분들이 부러웠어요. 그리고 왠지 저랑 제 동생들한테는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섭섭하기도 했고요.”
“그런 거 아닌데. 그냥 발키리 헌터들은 좀 어려워서…….”
“왜요? 우리가 왜 어려운 거죠?”
권수정이 품에서 떨어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길드가 다르기도 하고…….”
“저희 헬퍼 분들 몇몇이랑은 형, 동생 하며 지내고 있잖아요.”
“그거야 먼저 형님이라고 하면서 따르니…….”
“그럼 저도 오빠라고 부를게요. 저한테도 편하게 해 주세요.”
“네, 알았어요.”
“어!”
“네?”
“‘어’라고 해야죠.”
“……어.”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짐작건대 지금 내 얼굴이 아주 바보스러울 듯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뭔가 많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오늘 많이 고마웠어요. 그리고 너무 좋았어요. 어렸을 때 저희 아버지도 제가 힘들어하면 이렇게 안아 주곤 했었거든요. 종종 부탁드려도 되죠?”
“……어.”
“고마워요. 그럼 저도 이만 빨리 신호탄 보내러 가봐야겠네요.”
“……그래.”
권수정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하고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