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28화 (28/255)

28화. 주조

“이거 벼 아니야?”

권수정에 이어 장지원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노란색 풀을 건네받았다.

“넌 이 먼 데서 이걸 어떻게 알아본 거야? 아니 그동안 수없이 오고 갔던 길인데 왜 난 그동안 보지 못한 거지?”

장지원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도 의식하지 못했던 걸 거예요.”

난 장지원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시골에서 자랐으면 몰랐을까.

땅에 심겨 있는 잡초와 곡물을 구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곳에 들어오기 전 예능 프로에 나오는 일부 연예인들은 바로 앞에 대파와 쪽파, 상추, 깻잎과 같은 것들이 심겨 있는데도 그걸 구분하지 못해 헤매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주거 지역이 도시화 되어 익숙하지 않아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윗부분에 이삭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노란색 풀.

난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며 풀을 건네받아 껍질을 까보았고 하얀색 알맹이들이 나왔다.

‘벼가 맞는 것 같긴 한데…….’

18년 전. 군대에 있을 때 몇 번 대민 지원을 나가서 본 게 전부라 나 역시 특정을 할 수는 없었다.

“쌀이랑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는데…… 근데 쌀은 물이 고여 있는 논에서 자라는 거 아니에요?”

“듣기론 밭에서도 자란다고 하더라고요.”

과수원에서 일할 때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밭에서도 쌀을 키울 수 있다고.

허나 효율이 높지 않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대충 밭이나 논에 씨를 뿌리고 물만 잘 주면 되는 걸로 알지만, 현대의 농사는 그동안 축적됐던 경험과 과학의 발전으로 가장 최적화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토양의 영양분.

물의 양.

햇빛의 양.

온도.

씨의 종자 교배.

.

.

.

해충 피해 방지를 위한 면역력까지 생각할 정도로.

동네 슈퍼에만 가도 먹을 수 있는 쌀이 사실은 근 백 년에 걸쳐 발전되고 또 발전된 과학의 산물인 것이다.

이런 정글 같은 곳에 똑같이 생긴 것이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오드득오드득.

난 알맹이 몇 개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먹어봐야 맛을 알 테니까.

‘먹을 만한데?’

생으로 먹는데도 쌉싸름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아니 항상 공복에 가까운 상태에 있어서 그런지 이마저도 정말 맛있게 느껴졌다.

“부마스터님.”

“네?”

“아무래도 저희한테 선택권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네요.”

“쌀이 맞는 건가요?”

“쌀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곡물인 것 같아요.”

난 저 멀리 황금색 들판을 지그시 쳐다봤다.

지식이 얕고 넓어 쌀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배를 채우고 허기를 면하게 해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게이트로의 퇴각.

이대로 베이스캠프에서 존버.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던 우리에게 새로운 활로가 하나 더 생겼다.

진격.

저곳을 차지할 수 있다면 이번 겨울을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설마 저길 차지하자는 건 아니죠?”

권수정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힘든가요? 제가 볼 땐 오크들을 조금만 뒤로 물려도 꽤 많은 벼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권수정의 어깨에 걸려 있는 활을 쳐다봤다.

오크들을 완전히 물리치는 거라면 몰라도 활을 이용해 원거리 공격을 하면 조금은 뒤로 물릴 수도 있을 듯했다.

“지금 원거리 공격을 감안해서 얘기를 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힘들어요. 그런 식으로 화살을 사용했다가는 오크들이 역으로 돌격을 했을 때 화살이 없어서 낭패를 겪게 될 수도 있어요.”

궁수들의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검과 방패만 있으면 되는 탱커들과 달리 궁수들은 화살이 없으면 전투력이 상실되었다.

오크들이 쳐들어왔을 땐 화살을 사용해도 회수할 수 있지만 상대 진형으로 쏘아대면 회수가 안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저기까지 날려 보낼 수는 있다는 말이죠?”

“그렇긴 한데…….”

“만들어 보죠.”

“네?”

“화살을 만들어 볼게요.”

“화살을 만들겠다고요?”

“네.”

난 주변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 깔린 게 나무였다.

게다가 일전에 오크들을 학살하고 빼앗은 금속제 무기와 갑옷들이 쓰레기처럼 한편에 쌓여 있었다.

오크들의 덩치가 크다 보니 헬퍼들은 입고 싶어도 입을 수가 없고 무게마저 무거워 방치되고 있었다.

저것들을 사용하면 지금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사용하는 합금 화살을 만들지는 못해도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을 듯했다.

“나무 화살이라도 만들어 보시려고 하나 본데 이게 보기엔 단순해 보여도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쉽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근데 이렇게 넋 놓고 있는 것보다는 시도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나요? 아니면 부마스터님이 헌터들 데리고 돌격이라도 해 보실래요? 제가 보기엔 헬퍼들이랑 부상자들 데리고 퇴각을 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살 가능성이 클 것 같은데?”

“끙…….”

권수정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날 쳐다보았다.

진지 안에서 방어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곳을 벗어나 돌격을 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 만큼 오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에.

허나 퇴각을 하는 건 그보다 더 위험했다.

지금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화살만 만들 수 있다면 퇴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이곳에서 원거리 공격을 해 오크들을 뒤로 물리면 되니 더할 나위 없이 상황이 좋아졌다.

“부성아, 베이스캠프로 가서 기술직 헬퍼들 좀 다 올라오라고 해줘.”

“네. 알겠어요.”

난 화살을 만들기 위해서 눈칫밥을 먹고 있는 기술직 헬퍼들을 능선 위로 소집했다.

* * *

“……화살을 만들어야 해요.”

난 기술직 헬퍼들을 모아놓고 현재 상황과 왜 화살이 필요한지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이내,

“화살을 만들 나무라면 마냥 단단한 것보다는 탄성이 있고 좀 질긴 나무가 좋겠네요?”

“네. 그럴 거예요. 혹시 그런 나무가 어디 있는지 아나요?”

“베이스캠프 후방에 있는 숲에 나무가 그런 성질을 갖고 있던 것 같습니다. 한번 잘라 와 볼까요?”

“네. 그래 주세요.”

유거성을 필두로 한 기술직 헬퍼들이 능선 밑으로 내려갔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권수정과 달리 헬퍼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화살을 만든다는 사실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탄성과 경도

미쳐 내가 신경 쓰지 못한 부분까지 감안하며 나무마저 찾아왔다.

수년째 이곳을 드나들며 집과 울타리를 지으며 이미 이곳 나무들에 대한 특성을 인지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힐러 님, 여기 가져왔습니다.”

“네, 고마워요.”

유거성은 화살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나무를 잘라 적당한 크기로 토막까지 내서 가져왔고 난 바로 자리에 앉아 모양을 내기 시작했다.

“해용이 형?”

“어? 왜?”

“설마 밖에서 화살도 만들어 보셨던 거예요? 나무 깎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요?”

“화살을 만든 건 아니고 학교 다닐 때 비슷한 실습을 많이 했었어.”

이부성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19년 전.

고등학교 3학년 의무 실습 기간에 나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만져봤기에 나무를 성형하는 내 손놀림이 제법 그럴듯해 보였나 보다.

원형 기능사 2급.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국가 공인 자격증.

취업을 나가고 1년 만에 회사를 관둬서 사회생활을 할 때 하등 쓸모없는 기술이었지만 이제 와 선생님에게 따귀 맞고 방망이질 당하면서 따 놓은 보람이 생겼다.

원형 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선 나무를 성형할 때 필요한 힘도 힘이지만 1cm의 오차도 허락지 않았기에 정교함마저 필요했고 난 어렵지 않게 화살의 외형을 똑같이 따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힐러 님. 도움이 될까 하고 저희도 만들어봤는데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기술직 헬퍼들마저 제법 그럴싸하게 나무를 깎아 화살을 따라 만들어 냈다.

“글쎄요. 저도 그것까지 잘 모르겠네요. 사용할 사람한테 물어봐야겠네요.”

난 십여 발의 나무 화살을 손에 들고 권수정을 쳐다봤다.

“놀랍네요. 이렇게 간단하게 화살을 만들지는 몰랐어요. 근데 이걸로 오크 진형을 뒤로 물리기는 힘들 것 같아요.”

권수정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살을 매 만졌다. 제법 그럴듯하게 따라 만들긴 했는데 뭔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오크 진형까지 날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가면 힘이 빠져 오크들의 질긴 가죽을 뚫어 내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한번 쏴 보실래요? 직접 눈으로 봐야 단점을 보완할 수 있으니.”

“……네.”

권수정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능선 아래로 최대한 걸어가 오크 진형이 있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휘이익!

80도 정도 되려나?

중간에 장애물도 있고 거리가 있다 보니 곡사로 화살을 날렸다.

조악해 보였지만 화살을 쏠 때 그녀의 이능이 곁들었는지 제법 그럴싸한 포물선을 그렸다.

허나 그녀의 예상대로 날아간 화살은 오크들이 세워 놓은 방책에 닿고도 박히지 않고 땅으로 떨어졌다.

“화살촉만 있으면 무게감이 생기니 더 멀리 날아가고 관통력도 좋아지겠네요.”

“네. 화살촉만 있으면 금상첨화죠. 저희가 쓰는 화살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오크들이 저리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게 될 거예요.”

“네, 알았어요. 그럼 이제 화살촉만 만들면 되겠네요.”

“네?”

권수정이 반쯤 넋이 나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나무로 화살을 만든다고 했을 땐 그러려니 했나 본데 화살촉까지 만든다고 하니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나의 이력과 카사의 존재를 모르는 그녀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사, 저것들 녹일 수 있지?’

-어. 문제없어.

불의 정령 카사.

그가 오크들에게 빼앗은 검과 도끼, 갑옷과 같은 무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번 만들어 볼까!’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손깍지를 끼고 움직이며 다시 한번 몸을 풀었다.

주조.

주물을 만들기 위하여 실시되는 작업으로 주물의 설계, 주조 방안의 작성, 모형(模型)의 작성, 용해 및 주입, 제품으로의 끝손질의 순서로 진행된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죽어라 했던 실습이었다.

화살촉은 물론이고 모형만 있으면 오크들의 무구를 녹여 삽은 물론이고, 톱과 끌과 같은 공사 장비도 더 만들 수 있었다.

의무 검정 기간에 원형 기능사 자격증을 땄지만 사실 금속과에 들어가면 제일 많이 하는 실습은 주조였다.

의무검정 기간 6개월 동안 바짝 실습하는 원형과 달리 주조는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내내 삽질을 하며 실습을 했기에.

주조.

원형.

열처리.

3학년이 되면 의무검정으로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일하게 되고 과의 80% 이상의 인원이 원형 기능사를 선택한다.

원형 기능사 시험은 1:1 비율의 도면을 보고 그대로 따라 만들기만 하면 됐고 금속과 과장 선생님이 시험의 감독관이기도 해서 똥 멍청이 짓만 하지 않으면 손쉽게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격증을 딴 원형 기능사보다 오히려 주조가 내게는 더 친숙했다.

19년이 지난 지금도 절로 이론이 떠오를 만큼.

자고로 몸으로 배운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었다.

“……금속과 출신이거든요.”

난 권수정에게 내 이력을 자세히 설명 해 주었다.

“그런 과도 있었군요.”

권수정이 생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속공학과.

지금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재학을 했을 때마저 인천에 금속공학과는 내가 졸업을 한 모교가 유일했고 이제 그 모교마저 금속공학과는 없어졌다.

아마 지금은 전국에 열 군데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스타킹이 필요해요. 흙 채가 없으니 그걸로 대용해 보려고요.”

“네, 알았어요. 지현아. 내려가서 스타킹 좀 모아서 갖다줘.”

내 설명을 들은 권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지현을 쳐다봤다.

주형을 뜨기 위해선 아주 얇으면서도 고운 흙이 필요했다.

최대한 얇고 고운 흙을 꽉꽉 눌러 담아서 촘촘히 해야 쇳물을 부었을 때 엄한 데로 스며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힐러 님, 그럼 나무 틀이 필요하겠네요?”

“네. 만들어 줄 수 있죠?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대충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사용할 흙도 저희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스타킹으로 걸러 내겠지만 애초에 고운 흙을 찾으면 작업이 더 수월할 테니까.”

“네. 맞아요.”

서지현이 움직임과 동시에 유거성과 기술직 헬퍼들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수정과 달리 그들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새겨듣고 자신들의 할 일이 뭔지 캐치했다.

자기들끼리 살겠다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던 사람들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다들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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