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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25화 (25/255)

25화. 카사

최고급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해도 오랜 시간 두면 상한다. 냉동고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이 흔히 착각을 하는 게 냉동고에 음식을 넣고 얼리면 한도 끝도 없이 선도가 유지될 거라 아는데 아무리 꽝꽝 얼려도 부패가 진행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이 냉장실만큼이나 시원한 것도 아니었고.

허나,

‘옛날 어르신들은 이런 걸 어떻게 알아냈을까?’

부패가 좀 진행 되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다.

묵은지와 삭힌 김치 그리고 신김치까지.

그 세 가지가 대표적인 음식이었고 소고기도 마찬가지였다.

발효 음식의 왕국. 대한민국.

오래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한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생산물을 오랫동안 저장하는 방법으로 발효 음식을 발전시켰다.

김치는 물론이고 물고기나 조개도 소금에 절여서 발효시킨 젓갈로 만들어 긴 시간 동안 저장할 수 있었고 열매나 과일은 물론이고 고기까지 절이고 말리고 담그는 등의 방법이 많았다.

소고기 숙성 육.

따듯한 곳에 오래 두면 아예 먹지 못하게 상해 버리지만,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김치처럼 숙성을 시켜 장시간이 지나도 먹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백화점에서는 일부러 숙성을 시켜 최고급 고기로 더 비싸게 파는 곳마저 많았다.

물론 하얗고 푸르스름하게 곰팡이가 생겨 일부 마니아층들만 사가서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난 김성준에게 소고기 숙성 육에 대해서 내가 아는 대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요리를 그렇게 해 놓고선 그 생각을 못 했네요.”

“괜찮은 생각 같나요? 썩혀서 버리느니 한번 시도해 봐도 될 것 같은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 생각을 못 한 제가 바보스러울 지경이네요. 헬퍼들에게 얘기해서 바로 이리로 고기 가져오겠습니다.”

김성준이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굴을 나갔다.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매일 같이 발효음식을 사용해 요리하는 그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너무 익숙해서 내가 얘기를 하고 나서야 상기시킬 수 있었던 모양이다.

요리를 깨나 오래 한사람이기에 시행착오가 있을 진 몰라도 그라면 분명 숙성 육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듯했다.

“이야! 진짜 말이 안 나오네. 넌 이런걸.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장지원이 반쯤 넋을 놓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고,

“부럽네요. 저희 길드에도 힐러 님 같은 분이 계셨다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권수정은 탐욕 어린 눈빛을 하고선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그냥 이래저래 주워들은 거예요.”

두 사람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 난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직장을 하도 옮기다 보니 이래저래 잡다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나도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난 그 잡다한 경험과 지식으로 인해 또 다른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제가 어떡해서든 먹을 것은 수급을 할 테니 두 분도 이제 인상 좀 피세요.”

“네?”

“어?”

“두 분이 계속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헬퍼들은 물론이고 헌터들도 동요를 하게 될 거예요.”

난 박민정과 장지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전에 근무했던 회사의 사장도 항상 이들과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명절 대목을 치르면서 수억 원의 매출을 올려도 사장은 고기 원가가 올랐다며, 부자잿값이 올라 남는 것이 없다며 항상 죽는시늉했다.

그래서 직원들은 한창 으쌰으쌰 하며 일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이직을 생각할 정도로 침울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회사는 결국 망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고기 원가가 오르고, 부자잿값이 오른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손해를 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장이 맨날 죽는소리만 하니 진짜 회사가 어려운지 알고 직원들이 모두 회사를 관두었기 때문이었다.

고기를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는데도 사장의 앓는 소리에 고기를 손질할 사람과 판매할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린 것이었다.

내가 판단할 땐 지금 상황이 그때와 비슷했다.

비록 오크들이 계속 몰려와 부상자가 생기고 포위를 당해 고립이 되었다 하지만, 우린 그걸 막아냈고 천 마리가 넘는 오크들마저 해치웠다.

“웃어 주세요. 그래야 밑에 사람들이 힘을 냅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힘들다. 힘들다 하면 정말 힘들어지는 법이다.

허나, 같은 일을 해도 즐겁게 일을 하면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길 마련이고.

특히 리더의 미소는 일원들의 얼굴에 마저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리더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져 있어야 일원들이 절망하지 않는 법이에요.”

“네, 알겠어요. 감사드려요. 그 말을 조금 일찍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권수정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헬퍼들을 쳐다봤다.

헌터들과 반목을 하며 퇴각을 하려 했던 이들을.

이제 와서 후회되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크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절망 어린 표정으로 있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표정으로 인해 헬퍼들의 두려움을 더 가중시킨 건 아닐까 하고.

“그럼 전 두 분만 믿고 밥하러 내려갈게요.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오래 산 놈을 찾아야 해요. 제 가정이 맞는다면 분명 오크들을 지휘하고 있는 놈이 있을 거예요.”

“네, 알겠어요. 기필코 찾아낼게요.”

“그래. 알았어. 네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우리가 그 정도는 알아내야지. 걱정하지 마.”

장지원과 권수정이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풍경 죽이네.’

두 개의 태양이 저물며 석양이 내리쬈다.

휘이익.

휘이익.

‘날씨 참 지랄 같네.’

낮에는 폭염에 가깝게 날씨가 덥더니 밤이 되면 쌀쌀함을 느낄 정도로 부쩍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사골 육수 좀 내 볼까?’

머리, 사골, 우족, 엉덩이뼈와 잡뼈들.

바닷가에 가서 옐로 아이를 잔뜩 잡아 온 난 블랙 앵거스의 부산물을 챙겨 주방으로 걸어갔다.

음식은 맛도 중요하지만, 분위기도 중요했다.

웰빙 시대의 여파로 지방 함유량이 많은 사골 국물은 예전만치 사랑받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날씨가 싸늘해지면 여전히 보양식으로 찾는 사람이 많았다.

나 역시 뻔히 사골 육수의 성분을 알면서도 왠지 설렁탕에 밥 한 그릇 말아 먹으면 왠지 속이 든든하고 건강해지는 착각을 일으키곤 했었으니까.

밤새 진지를 구축하고 아침에 오크들과 전투마저 치르고 낮에 쪽잠을 잔 사람들에게 오늘 같은 날 딱 안성맞춤인 요리인 듯했다.

“불이 약해서 그런가?”

“장작 좀 더 가져올까요. 형?”

“어. 그래 줄래.”

사골 국물을 끓이길 2시간.

베이스캠프에 완전한 어둠이 몰려왔지만 난 여전히 장작불 앞에 앉아서 계속 사골 국물을 젓고 기름 뜨는 걸 걷어 냈다.

인덕션이 있어도 최하 서너 시간은 끓여야 하는데 장작불에 끓이려니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장작이 필요했다.

“형, 근데 이것들은 왜 가져 온 거예요?”

“조금 있다가 넣으려고.”

“이것들도 넣으려고요? 저번에 먹어보니까 많이 질기던데?”

양지, 우둔, 사태, 힘줄.

사골에 넣기 위해 가져온 고기들을 보며 이부성이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다들 굽거나 삶아 먹기에는 다소 뻣뻣한 부위였지만 사골 국물을 끓일 때 넣고 푹 삶으면 국물도 더 진해지고 쫄깃쫄깃한 맛에 씹는 재미가 있었다.

“먹어봐. 이번엔 좀 다를 거야.”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장작불을 쳐다봤다.

‘불이 있으니 다행이지. 이것마저 없었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장작불을 보고 있자니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때였나.

아버지가 3개월 동안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온 적이 있었다.

평소에도 딱 굶지 않을 정도로만 생활비를 주셨기에 당연히 기름값을 낼 돈이 없었고 딱 2번 연체가 되니 냉정하게 보일러를 끊어 버렸었다.

그때 그 한 달이 뇌리에 각인 되어 지금도 잊지 못할 만큼 정말 추운 겨울을 보냈던 것 같다.

“형, 장작불을 왜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세요? 질투 나게.”

“고마워서.”

솔직히 밖에선 잊고 살았다.

보일러와 전기장판.

돈만 있으면 버튼 하나만 누르면 겨울에도 항상 따듯하게 지낼 수 있기에.

허나, 삶이 열악해지자 모닥불이라도 있는 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지루하고 단조로웠던 삶이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하나하나가 다 너무 소중한 것들이었다.

불이 있어 생선과 소고기도 구워 먹고 사골국도 끓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어랏?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데요?”

“그치? 나무를 너무 많이 넣었나.”

붉은색으로 타오르고 있던 불길이 조금씩 파란색에서 또 하얀색으로 변해 갔다.

넘실넘실.

‘따듯하다.’

하얀색 불길이 바람을 타고 조금씩 내게 다가왔다.

“형, 피, 피하세요.”

이부성이 호들갑을 떨며 다가와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형, 괜찮으세요?”

“어 괜찮아.”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여기 어딘가 불똥이 튀는 걸 제가 봤거든요.”

이부성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내 몸을 훑어봤다.

하늘을 수놓으며 다가왔던 하얀색 불길이 내 몸에 닿자 모두 사그라졌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네?”

난 이부성의 시선을 뒤로 하고 가만히 하늘을 쳐다봤다.

불길은 사라졌지만 마치 해 질 녘 노을처럼 붉은빛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게 보였다.

-카사

‘그게 네 이름이야?’

-응. 나 부른 거 맞지?

‘어.’

끄덕끄덕.

난 붉은빛을 보며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고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어린아이의 모습.

물이 먹고 싶은데 일어나기 귀찮을 때.

늦은 밤 라면이 먹고 싶은데 끓여 먹기 귀찮을 때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남동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꽤 많이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인 듯했다.

여동생에 이어 이번엔 남동생을 투영화 시킨 모양이다.

파이어웨폰.

파이어볼.

파이어윌.

인페르노.

.

.

.

붉은빛이 날 감싸며 교감이 시작됐다.

‘불의 정령.’

고등학교 3학년. 공장으로 실습을 나가 1,000도가 넘는 열처리 기계 옆에 있는 것처럼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근두근.

쿵덕쿵덕.

‘이 친구는 또 내게 어떤 능력을 갖게 해 줄까?’

허나, 이미 운디네를 접한 경험 때문인지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운디네와 때처럼 지금 이 순간 역시 카사와 동기화를 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런데,

뿌드득

뿌드득.

“아응.”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이 찾아와 절로 신음 소리가 내뱉어졌다.

-천천히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봐. 운디네가 장기는 정화를 시키고 있나 본데, 골격이 다 뒤틀려져 있어. 이대론 내가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어.

‘……그래.’

난 카사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뿌드득, 뿌드득.

목, 허리, 어깨, 팔, 다리, 손가락…….

온몸에 있는 뼈가 조금씩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타이 마사지, 아니 경락 마사지를 받을 때처럼 온몸에서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대는 것만 같았다.

허나,

-정 힘들면 잘래?

‘얼마나 걸리는데?’

-한 사흘 정도?

‘아니야. 그냥 버텨 볼게.’

난 고통을 참아 내며 계속 사골 육수를 저었다.

경락 마사지를 받을 때 역시 죽을 것만큼 아팠지만, 15만 원이나 주고 4회 이용권을 구매했는데 환불이 안 된다고 해서 난 결국 3번이나 더 받았다.

단돈 15만 원 때문에도 참았던 고통을 이능이 생기는데 참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사흘이나 자고 있기엔 신경 쓸 일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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