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전쟁의 시작
“벌써 아침이네.”
운동을 핑계 삼아 시작한 진지 공사는 밤새 계속됐고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꽤 그럴싸해졌는데?’
백 명이 넘는 헬퍼와 이능을 갖고 있는 헌터 수십여 명이 사력을 다해서 그런지 어느새 능선은 요새를 방불케 할 정도로 탈바꿈되어갔다.
곳곳에 땅을 파 함정을 만들고 방책을 세워 오크들의 돌격을 저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쏘는 화살의 화력에 방해되지 않게 시야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때,
“오크들이에요.”
능선 아래 평야 지대에 끝이 보이지 않는 많은 오크가 몰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2m가 넘는 신장.
녹색 피부.
사람의 체형에 돼지머리.
맹수처럼 솟아 나온 송곳니.
꽤 거리가 멀리 있는데도 등골이 오싹했다.
“인근 부락에 있는 오크들이 전부 몰려온 것 같아요.”
“우리가 부상당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 이전에도 레이드에 왔다가 실패를 한 길드는 많아요. 근데 오크들이 이렇게까지 몰려온 적은 없었어요.”
“아니죠. 한 번 있었잖아요. 게이트가 생기고 6개월 있다가…….”
“이런, 제기랄!”
권수정과 대화를 주고받던 장지원이 하늘을 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게이트가 생기고 나서 6개월 후의 일이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헌터 협회가 만들어지게끔 한 대형 사건.
몬스터 웨이브.
수만 마리의 오크들이 게이트를 빠져나와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놔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동안 꾸준히 토벌한 거 아니었나요?”
“토벌을 꾸준히 한다고 했지만 한 번에 열 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고 6개월이면 성체가 되어 계속 세를 넓혀 갔어요. 그래서 이번에 좀 제대로 줄여 놓으려고 가용할 수 있는 길드원들을 전부 데리고 온 건데…….”
권수정이 몰려오고 있는 오크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6개월이라…… 어린 몬스터였네. 근데 어떻게 저렇게 똑똑할 수가 있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요. 덩치는 그렇다 치고 고작 태어난 지 6개월밖에 안 된 놈들이 함정을 만들고 매복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오크들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긴 해. 우리가 처음 토벌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오크들은 자기들끼리 싸워 잡아먹기도 하고 살아 있는 것만 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거든. 근데 언젠가부터 수가 불리하면 도망가고 머리를 쓰기 시작하더라고.”
장지원도 나와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하이에나.
헌터들은 흔히 오크를 하이에나라고 표현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밀림의 왕 사자와 맞짱도 불사하는 놈들.
하이에나는 사자의 발톱에 긁히기라도 하면 설사 당장 배를 채운다더라도 곧 죽는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근데 이제 보니 오크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사자에 가까웠다.
기껏 물소와 같은 큰 동물을 잡아 놓고도 사자는 뒷걸음질을 치기에.
하이에나를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몇 마리와 싸워도 물어 죽일 수 있지만, 사자들은 하이에나의 발톱에 긁히면 자신 역시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아서 괜한 드잡이질을 피하는 것이었다.
“오래 산 놈이 있나 보네요.”
“네?”
“누군가 가르쳐 주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통솔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난 두려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오크들을 쳐다봤다.
가뜩이나 생긴 것도 흉측한 것들이 헌터들과의 전투를 통해 학습하고 배워서 성장해 가는 것이었다.
“지휘하는 놈을 잡아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힐러 님은 이제 헬퍼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 계세요. 지수야, 넌 베이스캠프로 가서 지원 요청을 해. 활을 쏠 수 있는 인원은 전부 올라오라고 해.”
“네, 알겠어요.”
권수정의 지시를 받은 헌터들이 맡은 자리로 이동을 하며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부상자들마저 올라오라고 할 만큼 오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밤새 자지 않고 진지를 구축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학익진.
이제는 지형적 이점과 진법의 도움을 받으며 헌터들이 잘 싸워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쿠르륵.”
“쿠륵쿠륵.”
“쿠흐르륵.”
챙챙
“형님, 우리 지금 위험한 거 맞죠?”
휘익휘익
“아주 많이 위험하지. 저기 봐봐. 오크들이 수천 마리나 몰려오고 있잖아.”
샥샥
“그러니까요. 근데 왜 전 하나도 위기감이 생기지 않는 거죠?”
사앙악
“나도 좀 그런 감이 없잖아 있다.”
휘웅
“다음!”
쉬지 않고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장지원과 김현규는 대화하고 오크들을 보며 손짓까지 하는 여유를 선보였다.
꾸룩.
“진법이라는 거 정말 무서운 거였네요.”
“그러니까 나도 지금 통감하는 중이다.”
꾸르륵.
장지원은 오크의 목을 베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 단위 이상의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동시에 돌격해 오고 있는데 막상 눈앞에 도착하는 오크들은 한 명씩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줄을 서 있다가 차례대로 죽으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어제 해용이가 그랬거든. 마린 한 부대만 있어도 지형만 잘 잡으면 수백 마리의 저글링을 잡을 수 있다고.”
“저도 들은 것 같아요. 좀 뜬금없는 말이긴 했지만 진짜 그보다 좋은 비유가 없는 것 같네요.”
휘익휘익.
오크의 가슴에 칼을 먹이고 빼며 김현규는 주위를 둘러봤다.
오크= 저글링.
태백산맥 길드 헌터= 질럿
발키리 길드 헌터= 마린.
언덕 위 입구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질럿과 마린.
그곳을 뚫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오는 저글링들.
자신이 자리 잡은 곳뿐만 아니라 헌터들이 자리 잡은 곳곳마다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전장에 서 있는 게 아니고 소싯적에 즐겨 봤던 스타크래프트 방송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백 마리의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지만 헌터들은 죽기는커녕 단 한 명도 다친 사람이 없어서 더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형님, 어째 오크들 돌격 속도가 좀 느려진 것 같지 않아요?”
꾸륵.
“저기 봐 봐. 죽은 오크들이 쌓여서 점점 길을 막고 있어.”
꾸웩
“헐…… 언제 저렇게 오크들이 죽었데요.”
헌터들의 칼과 화살에 죽임을 당한 수백 마리의 오크들 사체가 능선 아래 쌓여 갔고 그게 장애물이 되어 오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저게 돈이 다 얼마냐?”
꾸르룩.
“최소 오억은 될 것 같은데요? 얼핏 봐도 천 마리는 넘어 보이는데?”
“그치? 그 정도는 될 것 같지?”
장지원은 눈이 초롱초롱해져 능선 밑을 바라봤다.
세 시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남는 걸 걱정해야 했는데 지금은 오크 코어를 팔아 돈을 벌 생각에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그때,
뿌우웅!
능선 밑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고 오크들이 돌격을 멈췄다.
“이런! 벌써 포기하는 건가? 젠장 이참에 최대한 마릿수를 줄여 놔야 하는데…….”
장지원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능선 밑을 바라봤다.
천여 마리가 넘는 오크들을 해치웠지만, 어느새 그 뒤엔 몇 배나 더 많은 오크가 모여들어 있었다.
* * *
이순신 장군님이 그러셨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그리고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난 지금 직접 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능선 아래 보이는 수천 마리의 오크들.
우리보다 수십 배는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오크들은 진격에 실패해 으르렁거리며 우리가 있는 능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투에 패배해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숫자도 더 늘어나고 잔뜩 독까지 오른 모습이었다.
천여 마리의 오크들을 학살하며 방어에 성공은 했지만, 왠지 상황은 전보다 더 악화된 듯했다.
그 때문일까?
헌터들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해 대승하고도 장지원과 권수정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김성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져온 식량이 일주일 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멧돼지랑 블랙 앵거스가 꽤 잡히지 않았나요?”
“그게 밤에는 괜찮은데 낮에는 날씨가 더워서 내일쯤 되면 다 못 먹게 될 것 같습니다.”
김성준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오크들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오크들은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고 능선 아래를 넓게 포위하며 막사를 짓고 불을 지피는 게 보였다.
“아껴 먹으면 열흘 정도 버틸 수 있지만 환자들이 문제입니다. 멀쩡한 사람들이야 조금 덜 먹어도 어떡하든 버틸 수 있겠지만 환자들은 골고루 영양분을 섭취해도 모자랄 판에 먹는 거마저 시원치 않으면…….”
김성준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은 암울 그 자체였다.
이번 전투로 우리가 죽거나 아니면 오크들을 물리칠 줄 알았는데 상황이 공교로워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오크를 1티어로 분류시켜놨는지 모르겠네요.”
“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별안간 언성을 높이며 말을 하자 장지원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제가 직접 싸워 보지 않아서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놈들 불을 다루고 있어요.”
“응?”
장지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직접 눈으로 보고 말을 해 주는데도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코끼리, 곰, 호랑이, 사자…….
지구에도 인간보다 육체 능력이 뛰어난 동물들은 많았다.
하다못해 조금 외진 산에만 가도 볼 수 있는 멧돼지조차도 일반인들은 일대일로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까.
허나 지구는 인간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시작은 바로 불을 다루고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오크도 지금 음식을 데워서 먹는 것은 물론이고 검과 도끼는 물론이고 갑옷과 같은 방어구까지 만들어 착용하고 있었다.
“저놈들 우리가 식량이 없는지 아는 것 같아요.”
“에이. 설마! 그건 너무 과대 해석하는 거 아니야?”
“네. 저도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근데 하나 확실한 건 오크들이 지금 이곳을 힘으로 뚫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퇴각을 했다는 거예요.”
“흠…….”
“흠…….”
나의 말을 들은 권수정과 장지원의 얼굴에 더 깊은 고민이 서리기 시작했다.
내가 과대망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으니까.
오크들의 지능이 우리가 예상 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거였다.
“재미있네요. 과연 얼마나 오래 산 놈이 있기에 저렇게 빨리 성장을 하는 것인지.”
난 비릿한 미소를 오크 막사를 쳐다봤다.
지구에 게이트가 열린 지 3년.
궁금했다.
과연 오크들은 헌터들과의 전투를 통해 성장한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우리 말고도 오크들과 대척 하는 다른 지능 높은 존재가 있는 것인지.
“성준 씨, 헬퍼들에게 부탁해 손질해 놓은 고기를 이쪽으로 가져 와 달라고 해 주세요.”
“고기를 이쪽으로 가져오라고요?”
“네. 제가 봐둔 곳이 있어요. 말 나온 김에 같이 가보시죠.”
“……네.”
난 사람들을 안내해 산 정상 인근에 있는 동굴로 걸어갔다.
“힐러 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저희 여태 일하다가 방금 막 누운…….”
“네. 다들 고생한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편히 쉬셔도 돼요.”
속초에 갔을 때였던가.
낚시하다 비가 와서 잠시 몸을 피했던 동굴과 비슷한 형태를 한 장소에 헬퍼들이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다가 보관하면 오랜 시간 두어도 괜찮을 거예요.”
살랑살랑.
동굴 안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백화점 근무 시절 냉장실에 들어간 것처럼 땀으로 흠뻑 젖어 찝찝했던 기분이 사라질 만큼 차갑고 상쾌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헬퍼들이 굳이 이곳까지 올라와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형님, 여기가 시원하긴 한데 음식을 보관할 정도는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보다…….”
“네. 알고 있어요. 여기다 보관해도 부패는 진행될 거예요. 근데 소고기는 부패가 좀 진행 되도 먹을 수 있어요.”
난 김성준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