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22화 (22/255)

22화. 식사하세요

‘간만에 하려니까 죽겠네.’

어깨, 무릎, 팔, 다리, 허리까지…….

군대에 있을 땐 곡괭이랑 삽 하나씩만 던져주면 진지는 물론이고 헬기장도 뚝딱 만들었는데 지금은 늙어서 그런지 잠깐 땅을 판 것만으로도 삭신이 쑤셔 왔다.

-늙긴 누가 늙어. 지금 네가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신체 나이는 가장 젊을걸?

‘그래? 그럼 배고파서 그런가?’

난 삽질을 하다 보니 구부렁해진 허리를 펴며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군대에서 진지를 만들었던 기억,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날랐던 기억.

운디네 덕분에 몸이 건강해지긴 한가 본데 몸이 그때를 기억하고 힘들다고 최면이라도 거는 모양이었다.

“해용이 형, 힘드시면 그늘에 앉아서 잠깐 쉬셨다가 오세요.”

“에이. 다들 일하고 있는데 나 혼자 어떻게 그래.”

“형은 어제저녁에 헌터들 치료하느라 잠도 얼마 못 주무셨잖아요. 조금 쉰다고 뭐라 하는 사람 없을 거예요.”

안 그래도 몸이 힘든데 이부성이 달콤한 유혹을 해 왔다.

‘진짜 그래도 되려나.’

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슬쩍 사람들을 훑어봤다.

그런데 그때,

“제기랄! 힘들어서 못 해 먹겠네.”

“또 왜 그러는 건데? 늘 해 왔던 일이잖아.”

“상황이 다르잖아. 상황이. 오크들이 천 마리가 넘게 몰려오고 있다는데 이러고 있는 게 지금 맞는 거야?”

유거성.

오며 가며 보았던 발키리 길드 헬퍼 한 명이 곡괭이를 집어 던지며 신경질을 부리는 게 보였다.

좋지 않은 상황에 힘든 노동까지 하려니 많이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런데,

“그럼 어쩌자고? 우리끼리 도망, 아니 퇴각이라도 하자는 거야?”

“가자고 하면 갈래?”

“……?”

분위기가 뭔가 요상하게 흘러갔다.

“난 너만 오케이 하면 같이 갈 의향 있다. 어떡할래?”

“정말 우리 둘이 가자고? 가다가 오크들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할 건데?”

“뭘 어떡해? 죽는 거지. 근데 이렇게 여기서 열나게 삽질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겠냐?”

“형님들 가실 거면 저도 데려가 주세요.”

“형님들 저도요.”

한 명, 두 명, 세 명…… 열 명.

그저 힘들어서 투정을 부리는 건지 알았는데 어느새 퇴각하겠다는 헬퍼가 열 명이나 모여들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아무리 돈 받고 심부름이나 한다지만 이런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우리한테 상의 한번 안 한 것도 너무 한 거 아니야?”

“그치. 우리가 무슨 키우는 개새끼도 아니고. 생사가 달린 일인데 자기들끼리 결정 다 하고 어떡하든 살려 줄 테니까. 진지를 구축하라고?”

사람이 모여서 그런 걸까?

처음엔 조심스레 대화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아예 인상까지 찡그리며 지휘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게다가,

‘동요하고 있어.’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뿐 헬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그들을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왠지 저대로 두면 진짜 헬퍼들 전부 단체로 퇴각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다 발키리 헬퍼들이네.’

그나마 다행인 건 태백산맥 헬퍼들은 한 명도 동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쯧쯧. 동료가 쓰러져서 저리 병상에 누워 있는데. 자기들이라도 살겠다고 저리 추태를 보이다니. 정말 꼴불견이네요.”

“글쎄.”

“네?”

“애초에 동료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을 수도 있잖아.”

“해용이 형?”

이부성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우리야 헬퍼가 열 명밖에 없지만, 발키리는 백 명이나 되잖아. 안 친했을 수도 있지.”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헬퍼들을 쳐다봤다.

이부성은 그들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태백산맥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나도 발키리에 들어갔었다면 저들과 함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 년, 이년을 한 직장에 같이 다녔어도 친분이 없으면 남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다가도 직장을 관두면 연락이 소원해지다가 자연스레 인연이 끊기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선택의 차이일 뿐 저들을 마냥 나무랄 일은 아닌 듯했다.

군대에 있을 때 교육 장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전쟁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비윤리적인 무기는 살상 목적이 아닌 부상 입히기 위해 만들어진 발목 지뢰라고.

다친 전우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데리고 가자니 양쪽에서 부축하며 세 명의 전투력이 손실되어 결국 잔인한 선택을 하게 만든다며.

전우가 쓰러져도 그런 고민을 하는데 하다못해 관두면 안 볼 사람들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누구나 갈등이 될 것이다.

“뭣들 하는 거죠? 왜 허락도 없이 작업을 중단한 거죠?”

분위기 파악이 되지 않은 것인가?

권수정이 사나운 얼굴을 하고선 헬퍼들에게 다가갔다.

“허락? 당신들은 우리 허락받고 잔류를 결정했나?”

“당신? 지금 저한테 당신이라고 했나요?”

“말꼬투리 잡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쇼. 아무리 우리가 심부름이나 하는 잡일이나 해도 그렇지. 생사가 걸린 일인데 우리랑 상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요?”

“끙…….”

권수정이 앓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온 헬퍼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유거성.

곡괭이를 집어 던지며 가장 먼저 불만을 제기했던 헬퍼였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린 쉬지도 못하고 죽어라 일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헌터들은 뭔 상전 납셨다고 저리 멀뚱멀뚱 서 있는 거지?”

“그건 후방에 남아 있을 몬스터랑 야생 동물들이 있을까 염려되어 경계를 서고…….”

“같이 작업하다가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저기 있는 태백산맥 헌터들은 다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유거성이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내게 손짓을 해 왔다.

‘왜 불똥이 나한테 튀냐?’

경계근무를 서던 발키리 헌터들과 헬퍼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에게로 쏠렸다.

“……전 헬퍼입니다.”

“…….”

“…….”

헬퍼라서 헬퍼라 한 건인데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어쩌라고?’

난 눈에 힘을 주고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뭐라도 한마디 해 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난 해 줄 말이 없었다.

헌터들의 사정도 이해하고, 헬퍼들의 사정도 이해하기에.

난 중립이었다.

결정적으로 난 발키리 길드가 아닌 태백산맥 소속이라 내가 끼어들기가 난감했다.

그런데 그때,

“헬퍼 님들을 고용할 때 저희는 이런 상황까지 대비해 충분한 페이를 지불했어요.”

“뭐요? 그러니까 지금 돈 줬으니까 돈 준 만큼 알아서 기라는 말이요?”

권수정이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동안 저흰 헬퍼 님들이 고생하는 것을 인정하고 충분한 페이를 지불했어요. 그리고 물론 이번에도 무사히 위기를 넘긴다면 그에 상응하는…….”

“됐고. 그까짓 것 돈 돌려줄 테니 당신들끼리 진지 만드쇼. 우린 젓 같아서 공사 못하겠으니.”

챙그랑.

챙그랑.

터벅터벅.

터벅터벅.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데 돈 얘기를 꺼내서일까.

그나마 어느 쪽에 서야 할지 망설이던 헬퍼들마저 장비를 내려놓고 아무런 말 없이 산을 내려갔다.

정적.

헬퍼들이 떠나간 자리를 보며 헌터들이 아무런 말 없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있던 살길마저 위태로워졌다.

그리고 그때,

꼬르륵.

눈치도 없이 배에서 알람이 울렸다.

“밥이나 하러 가야겠다.”

“네?”

“저녁 먹어야지.”

“…….”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헬퍼들을 뒤따라갔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했다.

이대로 공사가 중단돼 오크들에 맞아 죽든, 도망가다가 죽든 어쨌든 지금은 살아 있어야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워낙에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기에 이 정도 고난은 익숙했다.

이 정도 고난에 멘탈이 나갔으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죽기밖에 더 하겠냐.’

그 시간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

어차피 잃을 것도 없던 삶. 이미 각오하고 들어왔었다.

“한평생 잘 놀았지. 뭐.”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난 멧돼지를 나무에 매달아 놓고 핏물을 빼며 휘파람을 불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숙취에 괴로워하며 잠을 청할 때 가끔, 아니 꽤 자주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고단하기만 한 삶에 지쳐 이대로 그냥 쭈욱 잠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죽고 싶을 만큼 사는 게 힘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등바등 살아야 할 만큼 삶이 그렇게 즐겁지도 않았기에.

‘월세 보증금이랑 통장에 있는 돈이 아버지한테 잘 전달되려나.’

월세 보증금 2천만 원.

퇴직금과 함께 통장에 들어 있는 6백만 원.

다만, 그나마 가진 몇 푼 안 되는 돈이 아버지한테 잘 전달이 될지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대충 다 된 것 같은데?’

목심, 삼겹살, 등심, 안심, 앞다리, 뒷다리, 갈비…….

여기저기 찢어지고 살을 많이 파먹어 마트에서였다면 혼만 잔뜩 나고 진열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하다 보니 대충 먹을 수 있게 손질이 되었다.

‘김치찌개도 끊여야겠다.’

꿀꺽.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

천 단위를 넘는 오크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데도 눈앞에 고기가 있으니 이렇게 군침이 도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부성아, 김치 좀 갖다줘.”

“괜찮으신 거죠?”

“왜 안 괜찮아 보여?”

난 어깨를 으쓱하며 이부성을 쳐다봤다.

어차피 내가 걱정을 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현재에 충실한 건데 그가 보기엔 불안해 보였나 보다.

“네. 많이 안 좋아 보여요. 지금 밥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부성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김치를 건네줬다.

‘냄새 좋네.’

삼겹살과 김치를 프라이팬에 넣고 볶으니 얼큰한 김치 향과 삼겹살 기름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늘 이렇게 해 주셨다.

이렇게 볶고 나서 물을 넣고 끊이면 국물 맛이 깊고 감칠맛이 좋았다.

‘밥 먹어. 밥.’

김치찌개를 끓이다 보니 괜스레 할머니의 유언이 떠올랐다.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돈도 많이 벌고 잘 살라고 할 법도 한데 할머니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내 끼니 걱정을 하셨다.

할머니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먹고 사는 거 앞에선 다 무의미한 법이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난 할머니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배불리 먹어야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돈도 벌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전투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밥을 먹어야 하고.

병상에 누워 있는 부상병들을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게 하려면 든든하게 밥을 먹어야 하는 법이었다.

‘다 삶아 버려야겠다.’

난, 마치 김장 파티라도 할 때처럼 손질해둔 돼지고기와 양파, 대파, 마늘, 된장과 같은 갖가지 야채를 넣고 끓였다.

상황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잘 먹어야 힘을 낼 수 있을 테니.

가뜩이나 상황도 안 좋은데 배까지 고프면 괜히 마음만 더 심란해지는 법이니까.

“부성아, 가서 헬퍼들한테 밥 먹으라고 해.”

“뭐 이리 많이 하셨어요? 설마 발키리 헬퍼들도 주려고 하는 건 아니죠?”

“주려고 하는 거 맞는데?”

“뭐 예쁘다고 저 사람들한테 밥을 줘요. 자기들끼리 살겠다고…….”

“갖다줘.”

“형…….”

“아무리 미워도 밥은 줘야지. 그래야 힘내서 한 명이라도 더 무사히 퇴각할 거 아니야.”

“끙…….”

상황이 이 지경이 되니 나도 저들이 야속하기는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무리 미워도 밥은 먹여서 떠나보내고 싶은걸.

우리 할머니도 그러셨다.

아무리 없이 살고 미운 사람이라도 집에 찾아오면 시래깃국이라도 끓여서 따듯한 밥 한 끼는 먹여서 보냈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헬퍼들은 아직 의견을 모으지 못했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떠나지도 못하고 그저 눈치만 살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식사하세요.”

“힐러 님…….”

“괜찮습…….”

“괜찮아도 제 성의를 봐서 좀 드셔보세요. 맛있을 거예요.”

이부성은 내키지 않는지 꼼짝을 하지 않아 난 일일이 헬퍼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갖다줬다.

다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입맛이 없어 했지만 난 억지로 떠넘겼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전 여러분들을 응원할 거예요. 그러니 일단 식사는 하세요.”

“그럼…….”

“그럼…….”

헬퍼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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