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20화 (20/255)

20화. 고립

발키리의 길드 마스터. 지윤미.

박민정을 따라가자 그녀가 속옷만 입은 채로 거의 나체에 가까운 상태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허나,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그보다 날 더 놀라게 한 건 지윤미의 몸에 자리 잡은 상처들이었다.

온몸에 화살을 뺀 자국과 검에 베인 자국이 가득했다.

게다가 왼쪽 무릎 아래는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반대로 꺾여 짓이겨져 있었다.

짐작건대 철퇴나 도끼 같은 둔 기류에 가격을 당한 모양이었다.

“아응…….”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였으면 혼절을 해도 열두 번을 했을 상처인데 그녀는 여전히 입에 수건을 물고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저희가 응급조치를 한다고 하긴 했는데 치료할 수 있으시겠어요?”

박민정이 걱정과 기대가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치료할 수 있겠어?’

-응. 근데 일단 재워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돼?

‘재울 수도 있어?’

-어.

‘그럼 빨리 재워줘.’

난 운디네를 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처도 상처지만 재울 수 있다면 빨리 재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슬립.

운디네의 몸에서 파란색 빛이 빠져나와 지윤미의 몸을 감쌌고 바로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때서야 마치 내시경 검사를 할 때 수면 주사를 맞을 때처럼 고통에 시달려 잔뜩 일그러졌던 지윤미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이제 수건은 빼셔도 될 것 같아요.”

“잠든 건가요?”

“네.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일단 재웠어요.”

“가, 감사합니다.”

박민정이 조심스레 지윤미의 입에 물려 있던 수건을 빼냈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입술이라도 깨문 것인지 수건은 물론이고 입에 피가 흥건했다.

-다리부터 치료할게.

아쿠아 워터.

반짝반짝.

뿌드득, 뿌드득.

다시 한번 지윤미의 다리를 파란색 빛이 넘실거리는 물방울이 감쌌고 기형적으로 꺾여있던 다리가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짐작건대 팔이 잘렸던 태백산맥 헌터보다 아마 고통이 몇십 배쯤 더 심했을 듯했다.

-이번엔 가슴이랑 허리.

따스하고 포근한. 파란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마치 물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퍼지며 상처에 스며들었다.

-이제 됐어. 너도 그만 쉬어.

‘끝난 거야? 내가 보기엔 아직…….’

-네 몸 걱정이나 해. 이 인간 여자가 너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걱정 그만하고. 이 정도만 해도 나머지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다행이다.’

휘청!

털썩!

치료가 끝났다는 말에 난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굳이 수치를 보여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몸에 단 1의 정령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힐러 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마나가 고갈돼서 잠시 현기증이 났나 보네요. 급한 불은 껐으니 다들 마음 편히 쉬셔도 될 것 같아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박민정이 무릎을 꿇고선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내,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뒤에서 서 있던 발키리의 헌터들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깊게 숙이며 내게 감사 인사를 해 왔다.

* * *

“휴우…….”

치료를 마친 난 막사로 들어와 바로 침상에 누웠다.

이제야 한결 숨쉬기가 편안해졌다.

정령력이 빠져나가는 공허함.

지윤미를 살려야 한다는 압박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여자라는 부담감 때문에 생긴 긴장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고생했어. 나 형체화 풀 테니까 너도 마음 편히 휴식 좀 취해. 정령력 좀 차면 다시 올게.

파란빛을 뿜으며 내 옆을 밝혀 주고 있던 운디네가 마치 무지개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벌써 아침이네.’

어느새 하늘에서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참 길고도 긴 하루였다.

‘졸리다.’

난 침상에 누워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치료가 끝나면 지휘 막사로 오라고 했지만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 * *

“와! 저거 블랙 앵거스 아니야?”

“저기 봐. 멧돼지도 잡아 왔어.”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헌터들이 야생 동물들을 어깨에 들쳐 메고 베이스캠프 중앙에 쌓고 있는 게 보였다.

‘저 무거운 걸 혼자서 드네.’

헌터들의 모습을 본 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1톤.

정육 코너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던 난 소 한 마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기에.

명절이 되면 가끔 마장동에 지원을 간 적이 있었는데, 내장을 제거하고 이분 도체, 절반으로 자른 것으로 옮기려 해도 최하 두세 명이 달라붙어야 했었다.

그런데 헌터들은 그보다 훨씬 큰 블랙 앵거스를 혼자서 어깨에 짊어지고 옮기고 있었다.

“해용이 형, 일어나셨네요.”

“어, 방금 일어났어. 근데 저것들은 뭐야? 사냥이라도 하고 온 거야?”

“사냥을 나간 게 아니고 정찰하려고 나갔는데 야생 동물들이 베이스캠프 주위에 득실거려서 잡아 온 거래요.”

“베이스캠프 주위에 야생 동물들이 득실거린다고?”

“……네”

이부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크.”

“……?”

“이쪽으로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나 봐요. 야생 동물들이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이쪽으로 몰릴 만큼 대규모로.”

“헐…….”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기껏 중상자들을 치료했더니 더 큰 고난이 우릴 향해 찾아오고 있는 듯했다.

“자세한 건 지휘 막사로 가면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안 그래도 다들 형님이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얼마 주무시지도 못했을 텐데…….”

“아니야, 그래도 한숨 잤더니 괜찮아졌어.”

난 이부성의 등을 토닥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 내 몸 하나 조금 피곤한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닌 듯했다.

* * *

발키리 길드 마스터 지윤미

발키리 부 길드 마스터 박민정, 권수정.

발키리 길드 헬퍼. 김성준.

태백산맥 길드 마스터 장지원.

태백산맥 부 길드 마스터 김현규, 김영균.

이부성과 함께 발키리 길드 지휘 막사로 가니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이미 자리해 있었다.

“힐러 님 오셨네요. 이쪽으로 앉으시면 돼요.”

“……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너무 부담스러운데…….’

평소에는 말조차 섞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두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높은 사람들이 회의하는 곳에 가서 음료수를 세팅하고 회의가 끝나면 뒷정리나 하는 삶을 살았었는데 어느새 난 이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을 수 있는 일원이 되어 있었다.

“어제 저를 치료해 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태백산맥 길드 분들께 다시 한번 사죄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너무 자만했고 오늘의 일은 전적으로 저희 발키리 길드 잘못입니다.”

지윤미가 아직 성치도 않은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태백산맥 간부들을 보며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와 사죄 인사를 했다.

“운이 없었던 거죠. 하필 오크들이 협곡 위에 자리를 잡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아닙니다. 아무리 지능이 낮다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 했는데 저희의 과오입니다.”

너무 과한 인사에 장지원이 분위기를 전환해 보려 했지만, 지윤미는 오히려 더 자신을 더 꾸짖는 뉘앙스를 풍겼다.

대한민국에 열 명밖에 없는 B급의 헌터이자.

NO. 9 발키리 길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길드를 운영하는 마스터 지윤미.

그녀는 자신의 힘과 길드의 힘을 너무 과신했던 모양이고 그 결과는 너무 뼈아팠다.

백여 명이 넘는 헌터들을 데려와 놓고도 1티어, 아니 오크 전사와 마법사를 더 한다 해도 2티어 급밖에 안 되는 몬스터인 오크들에게 부상 당한 것은 물론이고 포위마저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일로 태백산맥 길드에서 받을 손실과 피해는 저희 발키리 길드에서 모두 부담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총력을 기울일 테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협조를 부탁드릴게요.”

“물론이지요. 늘 그랬던 것처럼 저희 태백산맥은 발키리 길드를 돕겠습니다.”

장지원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짐작건대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제 발키리 길드와 같이 움직일 듯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윤미가 탁자 위에 있는 차를 한 잔 마시고선 박민정을 쳐다봤다.

부상 때문인지 아직은 말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민정아, 넌 일진 파티 애들 데리고 바로 게이트 넘어가서 재난 관리 본부랑 길드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해.”

“저보러 가라고요? 그것도 일진 파티를 데리고?”

박민정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윤미를 쳐다봤다.

“그럼 여긴 누가 지키는데요?”

“나도 있고 남은 아이들이 있잖아. 그리고 여기 태백산맥 길드 분들도 계시고.”

“마스터는 다쳤잖아요. 그리고 남은 애들이라고 해 봤자 부상자 빼면 전투 인원이 삼십 명도 안 되는데 오크들이 들이닥치면 어떻게 막으시려고요?”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니까 너한테 가라고 하는 거잖아. 부상병들이 치료될 때까지 이곳에서 버티려면 최하 D급 이상의 헌터 백 명은 필요할 텐데 네가 가야 신경 써서 헌터들을 차출해 줄 거 아니야.”

“끙…….”

박민정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지원조로 뽑힌 게 못마땅한 모양인데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태백산맥 길드

경상자 10명.

중상자 5명

남은 인원 35명

발키리 길드

경상자 27명

중상자 43명

남은 인원 30명

부상자가 많아 퇴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머무르고 있기엔 오크들의 위협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 지원 병력을 데리고 오는 게 최선책이었다.

“알아들었으면 오크들의 포위망이 더 좁혀 오기 전에 바로 출발해. 우린 어떡해서든 네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낼 테니까.”

“네. 알겠어요.”

박민정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막사를 나갔다.

* * *

“에후! 과연 지원해 줄 곳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이부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그렇잖아요.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헌터들을 어떻게 구하겠어요. 다들 각자 자기들이 맡은 지역에 생긴 게이트 관리하기도 벅찰 텐데.”

“괜한 소리 해서 분위기 어수선하게 하지 마. 분명 재난 관리 본부랑 길드 본부에서 최대한 협조를 해 줄 거야.”

이부성의 말이 탐탁지 않았는지 장지원이 다가와 그를 야단쳤다.

‘사실이구나.’

허나 장지원의 태도로 인해 이부성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

때로 거짓말보다 진실이 더 아프고 불편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좀 도와주면 좋을 텐데…….”

장지원이 하늘을 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S급 헌터 보유국.

중국 3

미국 3

일본 1

.

.

.

그들은 우리와 달리 일인군단이라 불리는 S급 헌터도 있고 A급과 B급을 필두로 한 상위 헌터들도 훨씬 많았기에.

허나 듣기론 동맹까지 맺어 놓고도 서로 지원을 보내는 것엔 인색한 모양이다.

지원을 왔다가 자국에 새로운 게이트가 생길 수도 있고, 남의 나라를 돕다가 귀중한 상위 헌터들이 다치거나 생명을 잃은 사례가 많아 꺼리는 듯했다.

“어휴. 진짜 그렇게라도 됐으면 좋겠네요. 저기 형님들 오시네요.”

삽과 톱. 그리고 도끼 등등.

헌터와 헬퍼들이 공사 장비를 손에 들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곳은 사방이 트여 있고 대지마저 낮아 숲 안쪽에 있는 능선 위로 올라가 위치를 선점하고 거기에 진지를 구축해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헬퍼들은 오크들이 오기 전 최대한 많은 장애물과 함정을 만들어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따라가는 것이었고.

현재 베이스캠프 주위에 확인된 오크만 천여 마리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몰려오며 숫자가 늘고 있고.

아무래도 벌집을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