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전운
오늘도 역시나 야생마들이 같은 자리에서 풀을 뜯고 있는 게 보였다.
“히이잉.”
터벅터벅.
할짝할짝.
할짝할짝.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들이 내게 걸어와 혀로 내 얼굴을 핥았다.
수박 껍질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먼저 이리 다가와서 친근감을 표시하는 걸 보니 이제는 내 얼굴과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 듯싶었다.
“잠깐만. 지금 꺼내고 있잖아.”
아그작아그작.
아그작아그작.
가방에서 수박 껍질을 꺼내자 말들이 아무런 경계 없이 입에 넣어 맛있게 먹기 시작했고 난 콧잔등과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들을 살펴봤다.
다른 말들보다 유난히 커다란 덩치를 가진 하얀색 백마.
짐작건대 이놈이 무리의 대장인 거 같다.
“루카 아니 루카스가 좋겠다.”
루카스.
난 대장 말에게 이름을 정해 주었다.
아그작아그작.
아그작아그작.
(*RUCAR, 아작아작 깨물다)
맛있게 수박을 먹는 모습을 보니 절로 떠올랐다.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름을 만들어 주니 조금 더 친해진 기분이다.
귀족 스포츠 승마.
과수원에 일할 때 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면 꽤 부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500만 원짜리 중고차도 부담스러워 사지 못하는 내게 있어 취미로 말을 보유하고 타고 다닌다는 건 정말 꿈같은 생활이었기에.
헌데,
‘조금만 더…….’
이제는 그 꿈이 현실로 이뤄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말들의 태도로 봤을 때 이대로 친분을 쌓아 가면 머지않아 내게 등을 허락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히이잉”
비비적비비적.
루카스도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비비적거렸다.
이제는 꽤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졌다.
난 콧잔등과 갈기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루카스를 천천히 둘러봤다.
‘멋있어.’
봐도 봐도 정말 멋있는 놈이었다.
‘
이 정도면 종마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
승마장 주인의 말에 의하면 국내 대회에 참가하는 말들의 가격이 대략 천만 원에서 1억 원 사이였고. 올림픽에 나가는 말 중엔 무려 20억 원짜리도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런 말들은 말 자체의 가격은 둘째치고 정액의 가격 또한 어마어마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라 확신할 순 없지만 내가 보기엔 루카스가 그런 말들보다 더 귀품 있고 뛰어나 보였다.
그런데 그때,
“형…….”
이부성이 슬며시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
덜덜덜.
그의 손이 땀으로 흥건해 떨리고 있었다.
“저기…….”
“헐…….”
이부성의 시선을 따라가니
‘블랙 앵거스…….’
집채만 한 소 세 마리가 다가와 근처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슬금슬금.
이부성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뒤로 더 물러나 계세요.”
반대로 나현지와 윤다영은 활에 화살을 장전하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보아하니 둘이서 사냥을 하려는 거 같다.
허나 난,
“잠시만요.”
손을 들어 올려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세요?”
“확인할 게 있어요.”
난 가만히 소들을 쳐다봤다.
‘다 상처 입었어.’
소의 몸 곳곳에 무언가에 찔리고 베인 자국이 가득했다. 자세히 보니 바닥 여기저기에도 핏자국이 가득했다.
심지어 소 한 마리는 상처가 심해 드문드문 내장이 보일 정도였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고도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설마? 너희들도?’
난 다시 한번 야생마들을 둘러봤다.
이제 보니 루카스의 몸 여기저기에도 상처가 아문 자극들이 보였다. 짐작건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약초에요.”
“네?”
“……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배고파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게 아니에요.”
승마장 주인과 술을 먹다 보면 그가 가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동물들은 몸에 탈이 나면 신기하게도 그에 도움이 되는 약초를 귀신같이 찾아내 먹는다고.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죠?”
나현지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내장이 보일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도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소를 보며 난 그녀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하지만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데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는 않아요.”
난 소들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게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건가?’
노란색 풀. 아니 동그랗고 면적이 작은 게, 마치 나무 줄기 같은 것을 유독 찾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형, 쟤네 이거 먹고 있는 것 같은데요?”
“흠…….”
마침 우리가 서 있는 곳 근처에도 노란색 줄기가 뭉쳐 있는 게 있었고 이부성이 손짓을 하며 내게 알려 주었다.
하도 눈칫밥을 먹으며 살다 보니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내가 무얼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으윽. 징그러.”
노란색 줄기를 잡아당겨 뽑아내자 이부성이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줄기 끝에 곤충의 애벌레로 추정되는 것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징그럽긴 하네.’
나름 비위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팔에 닭살이 돋을 만큼 흉측했다.
벌레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인 듯했다.
‘버섯인가?’
촉각마저 말랑말랑한 것이 아무래도 일반 풀은 아닌 것 같다.
산에서 나는 보약.
수백, 수천 가지나 되는 버섯의 한 종류인 듯하다.
게다가,
“동충하초야.”
그 버섯 중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종인 듯했고.
“동충하초요?”
“어. 애벌레를 숙주 삼아 자라난 것 같아.”
“으윽. 정말 싫다.”
덜덜덜.
이부성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서리를 쳤다.
나도 듣기만 했지.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과수원에서 일을 할 때 산 안쪽에서 송이버섯을 키우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가끔 같이 막걸리를 나눠 마시다 주워들은 기억이 전부였다.
나무의 잔뿌리에 기생하며 자라는 송이버섯처럼 애벌레나 곤충의 몸에 기생하며 자라는 버섯이 있다고.
난 가방에서 칼을 꺼내 또 다른 동충하초가 없는지 둘러봤다.
대지의 음식물.
요정의 화신.
신의 식품.
불로장수의 영약.
산 사람들이 부르는 버섯의 또 다른 이름들.
‘심 봤다.’를 외치고 싶을 만큼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현지 씨.”
“네?”
“미안한데 시간을 좀 주실 수는 없나요?”
“상처가 낫는지 지켜보시려고요?”
“네. 저 정도 상처면 굳이 지금 사냥하지 않아도 자연사하게 될 테고 만약 제 짐작대로 이게 약초가 맞아 치료된다면 그보다 더 값진 것을 얻게 되는 거니까요.”
“네, 알겠어요.”
나현지가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때,
“히이잉.”
터벅터벅.
할짝할짝.
할짝할짝.
수박 껍질을 다 먹어 치운 루카스가 다가오더니 동충하초를 들고 있는 내 손을 핥았다.
“이거 달라고?”
“히이잉.”
마치 자기 것이니 얼른 내놓으라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알았어. 너 먹어.”
“히이잉.”
내가 손을 펴자 루카스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헌터들을 경계했던 야생마들.
뻔히 우리가 매일 이곳을 지나치는 것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상처가 아문 자국도 그렇고. 짐작건대 말들 역시 단지 수박 껍질을 얻어먹겠다고 이 자리를 사수하고 있던 건 아닌 거 같다.
“맹수에게 당한 상처가 아니야.”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나현지와 윤다영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들의 상처를 쳐다봤다.
“블랙 앵거스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헐…….”
나현지와 윤다영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으며 베이스캠프를 바라봤다.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경계가 뚫린 건가?’
저리 큰 상처를 입고도 블랙 앵거스가 살아 있는 채로 여기 있다는 건 인근에서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오크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그때,
슈우웅 펑!
슈우웅 펑!
“비상 신호에요. 빨리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젠장. 어째 너무 평화롭다더니…….”
헌터들이 레이드를 나간 숲 위로 빨간색 폭죽이 연이어 터졌다.
* * *
“이렇게 깨끗이 잘렸는데도 안 되는 건가요? TV에서 보면 잘린 손가락도 다시 붙이고 그러던데…….”
“죄송합니다. 여기선 방법이 없어요. 아무래도 팔은 포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생명도…….”
“하아…….”
팔이 잘린 채로 붕대로 눈을 가린 헌터.
그리고 그 옆에 덩그러니 높여 있는 사람의 팔.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니 장지원이 발키리 길드 의료 헬퍼랑 실랑이를 하다 깊은 한숨을 토해내는 게 보였다.
“그럼 전 이만…….”
“그냥 이대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환자들이 많아요. 제가 계속 여기 있으면 살 수 있는 사람까지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있어요.”
팔이 잘린 헌터.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의식마저 없는 헌터.
.
.
.
그대로 두면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환자들 십여 명을 앞에 두고도 의료 헬퍼가 등을 돌렸다.
사형선고.
아직 분명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료 헬퍼는 그들을 포기했다.
“마스터, 아니 지원이 형님.”
“어, 영균아. 나 여기 있다. 여기.”
“형님 손 정말 오랜만에 잡아 보네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형님 아니었으면 술집 기도나 보면서 살았을 인생인데 덕분엔 멋지게 살다가 가네요.”
“뭔 개 같은 소리야. 버텨. 어떡해서든 버텨. 내가 당장 밖으로 나가서 의사들을 납치해 와서라도 치료해 줄 테니까.”
장지원이 누워 있는 헌터의 손을 꼭 잡고 울부짖었다.
의료 헬퍼마저 손을 놓았는데도 그는 아직 포기를 하지 못한 모양이다.
“네. 버틸게요. 버텨야죠. 근데 혹시라도 제가 잘못되면 저 대신 제 재산 처리 좀 부탁드려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서도 멍청하게 집이랑 차랑 모두 제 이름으로 했지 뭐예요. 저희 어머니에게 온전히 갈 수 있게 뒤처리 좀 부탁드려요.”
김영균 헌터.
그는 고통이 심한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남아 있는 가족들을 걱정했다.
“해용이 형, 저흰 나가 있을까요? 여기 있어 봤자 방해만 될 것 같은데…….”
“그러자.”
난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이부성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첫 번째 레이드부터 이런 상황이 발생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이리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그래서 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아 위로도 하지 못하고 같이 울어 주지도 못했다.
“발키리 길드가 오크들의 매복에 빠졌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구하려다가 다들 저렇게 됐나 봐요.”
“매복에 빠졌다고?”
“네. 협곡 밑을 지나가는데 하필 오크들이 그 위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나 보더라고요.”
“이런. 그럼 발키리는 우리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은 거 아니야?”
“네. 그런 것 같아요. 저쪽은 절반 이상이 중상에 빠진 것 같더라고요. 오늘 저녁이 지나 봐야 정확한 전상자 통계가 나올 것 같아요.”
이부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발키리 섹터를 바라봤다.
‘왠지 불안하더라니.’
어째 이상하다 싶었다.
빌어먹을 인생. 평생 지지리 복도 없이 살아 요즘 들어 잘 풀려 왜 이러나 싶었는데 역시 안 될 놈은 뒤로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모양이다.
병력이 온전할 땐 더없이 안전한 곳이었지만 이렇게 부상자들이 대거 생긴 이상 이곳도 더이상 오크들의 침략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해가 지며 보이는 노을이 죽음의 그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내가 치료해 줄까?
따스하고 포근한. 파란색 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내 몸을 감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