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놀랍구나! 인간이여!"
드래곤은 진심으로 감탄한 모습이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이 몸이 인간 따위와 이토록 오랜 시간 승부를 펼치게 되다니!"
하지만 더 놀란 것은 내 쪽이다.
제아무리 드래곤이 최상위의 괴수종이라 해도, 괴수는 괴수.
어떻게 해서든 ‘신의 한 발’을 쏠 기회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대의 방어구도 영원히 나의 공격을 막아 줄 수는 없을 터, 이변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드래곤은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드래곤 또한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무한히 펼쳐 낼 순 없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불안감도 살짝 보이는군.’
드래곤이 여유를 부리고는 있지만, 내 방패의 여력을 의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관건은 팔라스의 방패가 얼마나 더 버텨 줄지의 여부.
드래곤은 이에 대해 알 리가 없으며, 정보 면에서는 유리한 건 단연 내 쪽이다.
나는 드래곤이 나보다 더 많은 여력을 남겨 두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만약 ‘신의 한 발’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내가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것도.‘상대가 아직 나의 여력을 가늠하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최대한 드래곤을 쫄리게 만들어야만 한다.
쫄리다 보면 서두르게 되고, 결국 악수(惡手)를 두게 된다.
그 악수의 형태가 어떤 것이 되든지 간에, 나는 그것을 철저히 파고들 것이다.
이를 위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드래곤을 상대로 늦지 않은 시점에 유효타를 성공시키는 것.
드래곤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아직 나의 공격이 큰 위협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딱 한 번만!’
그 한 번이 절실했다.
무엇이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
첫 단추를 꿸 수만 있다면, 두 번째 세 번째는 한층 더 수월해질 것이다.
지혜의 나무로 인해 나는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으니까.
콰카카카캉!
이 빌어먹을 벼락의 공격이 또다시 나를 짓눌러 온다.
뇌전이 팔라스의 방패에 꽂히며 진동할 때마다, 괴수가 아닌 대자연과 싸우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드래곤이 자연 그 자체라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성검으로 베어 내야만 한다.
이제 하나 남은 마지막 관문.
수많은 기연을 내 몸에 덕지덕지 발라 놓고도, 이 마지막 하나를 넘지 못한다면 미치도록 억울할 것이다.
솨아아아악!
성검이 쾌속으로 쏘아지며, 드래곤의 모가지에 실선 하나를 만들어 낸다.
그럴듯한 첫 번째 유효타에 성공한 것이다.
"인간 따위가!"
콰카카카캉!
격노한 드래곤은 곧바로 벼락을 일으키지만, 팔라스의 방패에 바로 무위로 돌아간다.
드래곤이 이렇게 짧은 텀을 두고 벼락 공격을 연달아 걸어오는 건 처음 있는 일.
의미 있는 동요임을 확인한 셈이다.
또한 여전히 팔라스의 방패가 건재함에 마음속에서 싹 튼 조급함은 더더욱 성장했을 터.
여기서 한 번 더 몰아붙일 필요가 있다.
솨아아아악!
솨아아아아악!
더없이 빨라진 쾌검.
그 순간 드래곤은 공간 이동을 시도하며 전방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손맛은 확실히 느껴졌다.
대단한 타격은 주지 못했겠지만, 베어 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드래곤은 내 배후에서 나타나겠지.’
드래곤의 거대한 몸체에 비해 이 탑은 그리 넓지 못하다.
공간 이동이라고 해 봐야, 갈 수 있는 좌표는 상당히 제한적인 것.
솨아아아악!
화르르르르르!
나의 검격과 드래곤의 브레스가 동시에 펼쳐진다.
위력은 드래곤 쪽이 강하지만, 타격을 입는 것도 드래곤이다.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나의 성검이 드래곤의 뱃가죽에 또다시 생채기를 내는 데 성공했다.
드래곤이 이런 상황에서마저 침착할 수 있다면, 내가 깨끗이 지는 것이 맞다.
그냥 불만 없이 모든 기억을 잊고, 기꺼이 다음 회차의 종말에 임할 것이다.
"이노옴!"
드래곤의 노한 음성이 탑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는 내가 알 수 없는 용언을 쏟아 내며 무언가를 시도하는 모습이다.
‘공간 왜곡!’
순간 탑 내부의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탑 자체가 마법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세상 자체를 창조해 낸 경이적인 마법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공간. 드래곤은 창공 위로 유유히 날아오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넓어진 공간이 본인에게 훨씬 유리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비좁은 탑보다는 공간 이동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고맙군.’
나를 상대로 이 정도의 거리를 내어 주었다는 것.
‘신의 한 발’을 가동하기가 한층 더 수월해진 것이다.
화르르르!
화르르르!
화르르르!
거대한 불덩이가 연달아 날아온다.
드래곤으로선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내가 베라드에 탑승하고 있는 동안엔 테이아의 날개 사용은 불가.
상공으로 올라가 나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 채, 방패의 내구도를 일방적으로 깎아 먹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나의 방패가 다 닳아 없어지는 순간, 곧바로 죽이겠다는 생각일 터.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불덩이에 방패의 내구도는 쭉쭉 닳아 가고 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베라드의 모습에 드래곤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불덩이를 퍼부었다.
화르르르르.
화르르르르르!
이 광경은 그야말로 불지옥.
드래곤은 현 상황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여전히 꼼짝하지 못하는 베라드. 그리고 지상을 가득 메운 화염의 바다.
‘대단하긴 하네.’
상공에서 내려다본 이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베라드는 녹아 가기 시작했으며, 드래곤은 그제야 불의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발견했다.
저 멀리, 같은 높이의 하늘에서 본인을 겨누고 있는 작은 총구를.
"잘 가라."
[신의 한 발이 발사됩니다.]
타아아아앙!
이 한 발에는 거대한 힘이 깃들어 있다.
비단 나만의 힘이 아니다.
내가 이 탑을 시작한 이후 만났던 수많은 인연들. 그들이 빌려준 힘과 의지가 이 한 발에 담겨 있다.
많은 기억들이 뒤섞인 채 탄환이 날아간다.
갑작스러운 탄환의 발사에 드래곤은 두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 어떻게? 라고 말하는 듯한 저 눈빛.
위기감을 느낀 드래곤은 곧바로 공간 이동을 감행한다.
스르르르!
자취를 감춘 드래곤의 신형.
이 찰나의 순간에도 즉각적으로 마법을 구현해 낸 최종 보스에게는 경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마지막 한 수가 무위로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다.
탄환은 사라진 드래곤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으니까.
드래곤이 새로운 좌표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그 순간이, 결국 최후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길고 긴 여정이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길었을 이 종말의 탑.
그 무한의 순환 고리는 이제 끊어지게 될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앙!
[‘투철한 불꽃의 대장장이’가 자신이 만든 걸작 아이템에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포악한 광기의 전쟁광’이 모든 전쟁의 종결에 한숨을 짓습니다.]
[‘지혜롭고 순결한 자’가 당신의 단호한 의지에 박수를 보냅니다.]
[‘달빛의 명사수’가 한 치의 오차 없었던 마지막 명중에 만족합니다.]
[‘대지를 품은 온기’는 당신이 일군 두 거대한 나무를 영원히 보존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상인들과 도둑들의 수호자’가 이번 퀘스트는 무효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바다의 지배자’가 지구의 드넓은 바다를 가져가고 싶어 합니다.]
[‘사랑의 난봉꾼’이 벌써부터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광명의 예언자’는 사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태세 전환을 합니다.]
[‘바람의 군왕’은 당신의 약혼자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합니다.]
[‘가정의 수호자’가 당신과 신주아의 재회를 기대합니다.]
빌어먹을 탑.
빌어먹을 열두 군주들.
드디어 모든 여정은 끝이 났다.
[‘고금제일의 검객’은 이제 천마의 별호를 당신에게 넘기기로 하였습니다.]
[‘은둔의 절대자’가 이를 결사반대합니다. 당신에겐 혈마라는 별호가 더 어울린다며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나의 두 스승님도 이젠 안녕이다.
부디, 더 이상의 종말은 없기를.
지구가 아닌 그 어떤 곳이라도.
* * *
탑 이후의 세상.
항상 알고 싶었던, 또한 가고 싶었던 미래였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종말이 오기 전의 우리가 알던 곳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제 탑의 출구를 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생존 중인 모두에게 전달된 메시지였다.
[하지만 당신이 기억하는 지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신주아는 이미 알고 있었던 미래.
그런 이유로 그녀는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탑의 최종층.
탑의 문을 열지 않는 한, 내가 기억하는 이전의 지구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다.
그것도 플레이어로서의 모든 능력을 유지한 채.
물론 종말도 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 최종층의 지구 곳곳에 생긴 탑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시시때때로 발호하던 괴물들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최근의 이 시기를 인류 역사 제1의 미스터리로 기억할 것이며,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이 기 현상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손서연은 지금까지 해 온 뻘짓에 분노했겠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잠깐 관찰했을 뿐이지만, 그녀가 종말을 대비했던 자세는 내가 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내가 최종 퀘스트에 실패했더라도, 손서연이 다음 회차의 종말을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포스.
[탑의 출구를 열 것인지 선택하십시오.]
[제한 시간: 10분]
어찌 되었든 이제는 선택의 시간.
최종층에 있는 나만의 특권이었다.
"캥수야. 내가 이 문을 열면 더 이상 널 만날 수도 없을지도 몰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캥!"
"뭐? 나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캥!"
녀석은 주인의 발목을 잡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을 보낸다.
나는 캥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 캥수야."
"캥!"
나의 뜻을 알았는지 캥수의 눈시울이 바로 붉어졌다.
녀석은 나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눈물을 닦았다.
울컥한 마음이 밀려온다.
"이곳은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야."
비단 이곳이 가짜 세계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탑을 등반하며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를 구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모두가 탑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 그리고 오직 나만이 괴물 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불편할 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탑에서의 기억을 완전히 잊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나는 외로운 이방인일 테니까.
[탑의 출구를 열었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탑의 문을 열고 나가 가혹한 현실이 내 앞에 펼쳐지더라도, 탑의 진실을 기억하는 이들과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나의 약혼자를 만나야만 했다.
아직 어린 그녀를 미망인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주.
그중에 탑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이 가게 될 곳이 어디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지 분명 희망은 존재할 것이다.
이 가혹하고 빌어먹을 탑에서조차 그랬었던 것처럼.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