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며칠 뒤, 제나의 주인으로부터는 은밀한 메시지가 있었다.
물론 이미 예고된 내용들이다.
[지금부터 약 1시간 뒤 당신은 실버 고블린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다른 군주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지속 시간은 최대 30분가량이지만, 이조차 확실하지 않으니, 가능한 빠르게 임무를 완료해 주길 바랍니다.]
[실버 고블린의 모습을 하더라도 당신의 능력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은밀한 내용이다 보니 메시지들은 후다닥 지나가 버린다, 사실, 다음 회차의 종말을 위한 이 임무는 의무 사항이 아니다.
제나의 주인이 내게 일방적으로 제시한 비밀 임무일 뿐이니까.
하지만 나 하나의 만용으로 미래를 내팽개칠 수는 없는 일. 보험을 위한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잠깐의 수고면 되는 일이다.
씨앗을 건넬 대상은 이미 마음속으로 굳혔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그 대상이 약 1시간 뒤 지나가게 될 길목.
제나의 주인은 친절하게도 장소까지 소상히 안내해 주었다.
‘신주아라면 가장 좋았겠지만…….’
아직 생존 중인 신주아는 이곳 최종층의 주민이 아니었기에 할 수 없이 기각했다.
다음 후보로는 탑 이전에 나와 관계를 맺어 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고려해 보기도 했었다.
냉철하고 담대하며 신념이 굳은 인물들로만 추려 보았더니 몇 사람만 남는다.
그들 중 최고의 옥석을 고르기 위해 한참을 고민하던 도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그런 사람이었던가?’
단연코 아니다.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까.
때론 우유부단하며, 때론 정에 이끌려 실수를 저지르고, 때론 호구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나는 그런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난관들을 뚫어내고 이곳 최종층에 도달했다는 것.
어쩌면 탑 이전의 능력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힘을 주는 곳이었기에.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손서연이 갑자기 떠올랐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른다.
며칠 전, 스스로 생을 끊었을 당시 붙잡고 있던 그녀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손서연이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이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녀가 곧 지나가게 될 길목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 녀석은 다음 회차에서도 살성의 길을 걷게 될까?’
이전에 본 손서연의 트라우마에 따르면,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할 것이다.
탑 이전에도 그녀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부디 이 씨앗이 그녀의 미래를 바꾸어 주길 바란다.
물론, 최상의 시나리오는 내가 이 빌어먹을 탑을 클리어해 버리며 다음 회차의 종말을 막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전 회차에서 어떤 플레이어였을까?’
바통을 건넬 생각을 하게 되니, 별 잡생각이 다 떠오른다.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따라온다.
‘왜 신주아는 나를 선택했을까?’
‘아니면 신주아는 나를 우연히 선택한 것인가?’
‘우리 둘은 이전 회차의 종말에서 서로 아는 사이였을까?’
물론 영원한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기억을 다 잊었기에.
* * *
인적이 드문 어느 밤의 골목길.
제나의 주인이 준 정보에 따르면, 손서연은 이제 곧 이 길을 지나게 된다.
‘이 야심한 시각에.’
여자 혼자 다니기엔 위험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
살성 손서연에게는 필요 없는 걱정이겠지만, 현재 그녀는 살성도 플레이어도 아닌 평범한 20대의 여성일 뿐이다.
저벅저벅.
절대 감각을 타고 저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플레이어가 아니기에 아무런 마력도 풍기고 있진 않지만, 느껴져 오는 직감이란 게 있다.
분명 손서연이다.
달빛에 비친 나의 온몸은 이미 은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런 나를 보며 그녀가 기절해 버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기절을 해?’
순간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한 고민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손서연이 살성이 아니라 해도 그런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저벅저벅.
그녀의 발걸음은 이제 상당히 가까워졌다.
저기 보이는 코너 하나만 돌면 이제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게 뭐라고 또 긴장이 되는군.’
이제부터 진행될 레퍼토리는 이번 회차의 시작 부분과 거의 비슷하다.
지금 내 등에는 총알이 박혀 있고, 손서연에게 그걸 빼 달라고 부탁을 할 것이다.
그녀가 나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면, 나는 씨앗 하나를 건네며 은혜를 갚을 계획.
거절이나 도망의 선택지는 없다.
초인의 경지에 올라온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녀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등에 박힌 걸 빼 달라고?"
"케륵!"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등을 보여 주었다.
손서연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의연한 모습으로 나를 대하였다.
얼굴에 그늘은 있으나, 탑에서 본 모습과는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네가 요즘 뉴스에 나오는 괴물들 중 하나구나."
"케륵!"
손서연은 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더 당황스러울 정도.
"그런데 총에 맞은 거야?"
"많이 아팠겠구나."
도리어,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고 있다.
손서연은 내가 건넨 나뭇가지로 등에 박힌 총알을 하나하나씩 빼 나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손길은 섬세하며 따뜻했다.
벌벌 떨며 식은땀을 흘리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미안, 아팠나 보구나! 살살 해 줄게."
"케륵!"
마치 손서연은 나를 상처 입은 유기견이나 유기묘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분명 맨정신인데, 멘탈이 남다르다.
"다 됐어."
상냥한 말투는 아니지만,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이 놀랍다.
어쩌면 나는 최고의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 이거."
손서연은 주머니에서 초코바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케륵?"
확실히 나를 유기견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 포장을 벗겨 달라는 거로군."
내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건 여전하다.
그러니 나를 대살성으로 오해나 하지.
손서연은 초코바의 포장을 뜯어 내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먹어. 배고플 텐데."
어처구니없지만, 달콤한 향이 식욕을 자극한다.
나는 그대로 초코바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잠시 후, 손서연의 손길이 내 목을 향한다.
그리고는 간질간질.
초코바까지는 좋지만 이건 상당히 거슬린다.
"케륵!"
"뭐? 계속 해 달라고?"
더 큰 수모를 당하기 전에 임무를 완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씨앗 하나를 건넸다.
"이거 씨앗이야?"
"케륵!"
다행히 제대로 알아본 모양.
이제 모든 공은 손서연에게로 넘어간 셈.
부디 잊지 않고, 잘 심어 주길 바랄 뿐이다.
물론 그 전에 내가 모든 종말을 종결해 버려야겠지만 말이다.
* * *
연일, 뉴스는 정체불명의 탑과 괴물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했고 재난 문자는 시도 때도 없이 울려 왔다.
사람들의 예상보다 괴물이 위험하지 않다는 정보가 속속 쌓이며, 세상 사람들은 한시름을 놓는 모습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어쩌면 열릴지도 모르는 종말의 문.
그 누구도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미래를 막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지만 말이다.
이제 종말까지는 D-5일.
내가 최종 퀘스트를 완료해야만 하는 제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손서연은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헬스 클럽에 등록해 운동을 하는 중이다.
나는 헬스 클럽의 한쪽 구석에 앉아 손서연의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을 걸까도 싶었지만, 결국 멀리서만 지켜보기로 하였다.
어디까지나 내 망상일 뿐이지만, 어쩌면 신주아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감고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남은 5일을 최대한 잘 보내야만 한다.
여전히 나의 검술은 미완성 상태.
사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준 한 수를 끊임없이 되뇌며, 나의 무영추혼검을 단련했다.
[‘투철한 불꽃의 대장장이’가 당신의 수련 방식에 의아함을 품습니다.]
최종 결전이 다가올수록 이 탑의 군주들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고 있다.
대장장이 군주는 명상이 주를 이루는 나의 방식이 불만인 모양.
한때는 김세용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 역시 그에게 남다른 존재일 것이다.
테이아의 날개 그리고 홍염의 불도깨비.
무려 두 개의 아이템에 그의 권능이 깃들어 있으니까.
특히 불도깨비에 붙어 있는 ‘신의 한 발’은 내 비장의 한 수가 되어 줄 것이다.
[‘포악한 광기의 전쟁광’이 당장 최종 퀘스트를 수행하길 촉구합니다.]
역시 성격 한번 더럽게 급하다.
하지만 이런 쓸데없는 요구를 들어줄 이유는 없다.
이 최종층에서 군주들은 내게 버프도 디버프도 걸 수 없는 모양이니까.
나는 그저 나의 갈 길을 가면 될 것이다.
[‘지혜롭고 순결한 자’는 제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당신의 자유 의지를 존중합니다.]
제나의 주인은 나를 지지해 주었다.
다른 군주들은 눈치채지 못할 평범한 워딩으로.
물론 이런 지지가 없더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쥐어짤 생각이다.
나는 하루하루 강해지고 있다.
남은 5일은 결코 작지 않은 시간.
종착점에 거의 다다랐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실감하며, 나 스스로를 더욱 불타게 한다.
[‘달빛의 명사수’는 검 대신 총을 수련할 것을 조언합니다.]
물론 나 역시 최후의 순간에 사용할 것은 ‘신의 한 발’을 가진 총이 될 거라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내 전투의 기본 베이스는 검.
더욱이 무영추혼검이 궁극에 가까워지고 있는 현재로썬 총보다는 검이 훨씬 더 효율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니 달빛의 명사수의 말은 지극히 쓸데없는 조언인 셈.
군주의 말이라고 다 맞는 건 아니다.
[‘대지를 품은 온기’는 당신의 텃밭을 다시 한번 점검하길 권합니다.]
물론 그럴 생각이다.
텃밭에 자라고 있는 아이템 중에는 치유 및 마나 회복에 특효인 것들이 많다.
최종 퀘스트에서는 내가 가진 모든 전력을 아낌없이 사용할 것이다.
[‘상인들과 도둑들의 수호자’는 마지막 퀘스트를 포기할 것을 권합니다.]
군주들이 많다 보니, 별의별 막말들이 다 나온다.
이제 와서 퀘스트를 포기하라니.
저 녀석은 내가 정말로 종말을 끝내 버릴까 봐 불안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다의 지배자’는 당신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퀘스트가 존재하는 곳은 남태평양의 바다 한가운데에 생성된 탑이니까.
[‘사랑의 난봉꾼’은 당신이 최종 퀘스트에 실패하더라도, 다음 회차 때 당신을 지지할 것을 약속합니다.]
과연 그럴까?
다음 회차 때의 나는 이번 회차처럼 특별한 플레이어가 아닐 확률이 농후하다.
난봉꾼이 그런 나에게조차 지조를 보일 리는 만무한 일.
모든 기억을 잃게 될 터이니, 아무 말이나 막 지르고 보는 것이다.
[‘광명의 예언자’는 당신이 최종 퀘스트에서 실패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는 나의 멘탈을 흔들기 위한 워딩일 터.
흔들릴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바람의 군왕’이 당신의 약혼자를 좋아합니다.]
미친놈.
[‘가정의 수호자’는 바람의 군왕을 응징할 것을 약속합니다.]
마땅히 그래 주길 바란다.
감히 내 약혼자를.
[‘포도밭의 주정뱅이’는 당신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이 군주는 아마도 40층 피의 날을 관장하는 존재일 터.
여전히 후회는 없다.
피의 날이 시작되기 전 최종층에 도전한 나의 선택에.
‘이제는 다 끝났나?’
군주들이 연속으로 메시지를 보내오는 탓에 명상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열두 개의 메시지를 모두 받았으니, 이제는 다시 본격적으로 명상에 돌입할 때.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존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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