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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289화 (289/292)

289화

손서연은 대답 없이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

조금은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왜? 말해 주기 곤란한 얘기인가?"

나의 재차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는 오히려 내게 물었다.

"아니, 그 전에 너에게 하나만 물어보도록 하겠다. 이호영, 너는 대살성인가?"

오늘 이 질문을 할 거라곤 예상했다.

이 오해는 손서연이 탑으로부터 페널티를 받은 이유와도 맞닿아 있으니까.

그 당시 그녀는 1차 피의 날, 표적으로 지정해 놓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도리어 나를 표적에서 해제해 버리며 탑의 분노를 샀던 것.

"아니. 예전에도 너에게 말했잖아. 난 대살성도 아니며, 심지어 살성도 아니라고."

"……그랬었군."

"뭐가 또 그랬었군이야! 그렇게 안 믿더니 이젠 이렇게 쉽게 믿어 버린다고?"

"최종층에서조차 네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해명하지 않은 오해가 이렇게 풀린다.

"사실, 너희들의 곁을 떠난 뒤로 수 없이 고민해 온 문제였다. 이호영 너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잠정 결론은 내린 상태였군."

"그런 셈이지."

"그럼 나도 다시 물어보지. 너는 왜 여기 최종층에 와 있는 거지? 네 말대로 최종층에서 무슨 이야기든 숨길 이유 같은 건 없잖아?"

"사실 나는……."

손서연은 담담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신은 탑으로 받은 페널티 때문에 플레이어로서의 자격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뒤이어 나온다.

나는 모르는 척, 손서연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탑도 예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이 최종층에 도달하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이호영 네가 유력하리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를 미리 최종층에 대기시켜 놓은 것이겠지."

"……."

"나는 사실 네가 최종층에 영영 오지 못하기를 바랐었다."

"왜지?"

"네가 이 에 온 것을 알게 된 이상, 나는 반드시 너를 죽여야만 하니까."

"네가 나를?"

물론 이것은 탑의 의지일 터.

손서연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너 역시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그건 또 왜!"

"네가 나를 죽여야만, 이 탑의 마지막 퀘스트가 열리게 될 테니까."

손서연이 최종층에 있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손서연을 죽이십시오.]

[성공 시: 최종 퀘스트 오픈]

탑의 메시지는 지체없이 손서연의 말이 사실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역시 빌어먹을 탑이다.

"가혹하네."

"가혹할 것 없다. 나는 네 녀석이 증오하는 살인귀 중 하나일 뿐이니."

한때 손서연을 죽이고자 했던 순간이 있었다.

당시는 그녀를 악(惡)으로 규정했다.

탑에서 많은 살생을 저질렀으며, 피의 날엔 더 많은 플레이어를 참살할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기에.

하지만 더 이상 내게는 손서연을 심판할 자격 따윈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탑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만약,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 탑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채, 살아 있는 우리 모두는 영영 탑에 갇혀 지내겠지. 그런데 너는 그런 결말을 원하는 것인가?"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가치관의 혼란이 다시 한번 밀려온다.

"이호영, 너는 고민하지 않아도 돼."

"뭐?"

손서연은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더 생각할 틈은 없었다.

총성은 지체 없이 울렸으니까.

타아아앙!

가공할 위력의 마탄 한 발이 나를 향해 쏘아져 온다.

이미 그녀의 상태창을 보아 알고 있었지만, 탑의 최종층에 어울리는 경지.

지근거리에서 날아온 마탄은 당장이라도 나를 삼켜 버릴 기세였다.

스르르르.

물론, 나 역시 탑의 최종층에 어울리는 격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한차례 빛을 발한 성검은 그대로 마탄의 결정체를 헤집어 놓았다.

"놀랍군. 이호영. 하긴, 이 정도이니 탑의 마지막 스테이지 도전하는 것인가?"

타아아앙!

타아아앙!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이번에는 마탄이 연사로 날아온다.

한층 배가 된 위력에 등골이 서늘할 정도.

손서연이 탑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그 누구보다 많은 권능을 부여받은 살성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콰아아앙!

검기와 마탄이 부딪히며 주변의 공기를 진동시킨다.

지금 이곳은 광장의 한복판.

우리가 연출해 낸 장면에 이곳저곳에서는 비명 소리가 쏟아진다.

동시에 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좀 조용한 데서 만날 걸 그랬어. 안 그래?"

"의미 없다."

"왜지?"

"우리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세상이 변할 테니까."

타아아타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탄환이 쏘아진다.

그래도 이번엔 예고 없이 공격할 거란 걸 예상했다.

탄환 발사와 동시에 나는 그녀의 배후로 들어가 백을 잡았다.

그녀의 목 앞에는 성검이 겨누어져 있다.

"이건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건데, 손서연 너는 왜 날 죽여야만 하는 거지?"

"……."

허무하게 제압된 것이 충격이었는지, 손서연은 아무런 반항도 말도 없었다.

사실 나 역시 이 상황이 갑작스럽기는 하다.

오랜만의 재회에 이렇게 서로 총과 칼을 겨누어야만 한다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백허그의 대치 상태는 한동안 계속됐다.

"죽여라."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체념의 뜻만 내비칠 뿐이었다.

"널 죽여야 마지막 퀘스트에 도전할 수 있다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이야."

"역시 이호영답군. 고작 그런 이유로 머뭇거리다니. 겨우 그런 각오로 최종층에 도전한 것인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난 너를 동정하게 됐으니까."

"재수 없는 대답이군."

"그래. 인정해."

"네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이제는 내가 널 죽이는 수밖에."

"뭐?"

총을 잡은 그녀의 손은 이미 내게 제압되어 있다.

방아쇠를 당긴다 한들 마탄이 나를 향할 리는 만무한 일.

하지만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

이미 그녀의 총구에는 거대한 마력이 깃든다.

"멈춰!"

그녀는 무엇이 이토록 급한 것인지.

왜 좀 더 대화라도 해 보지 않는 것인지.

하지만 나의 외침은 이미 늦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마나의 폭발은 지금껏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사방팔방으로 마나의 기운이 터져 나가며 주변 일대가 번쩍인다.

손서연 자신 역시 이 마나의 폭발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체내의 진기를 모두 태워 내며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멈추라는 말조차 할 수 없다.

그녀의 눈동자는 흐려지고 있었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남겨 주길 바랐다.

왜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그게 아니면 마지막 유언이라도.

하지만 빌어먹을 탑의 메시지만이 귓가를 울려 올 뿐이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메시지들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손서연의 죽음보다 더욱더.

* * *

탑의 최종층에 존재하는 세상. 여긴 우리가 살던 지구였다.

더 좋은 점이 있다면, 이곳은 종말이 찾아오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

4월 15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종말은 시작되지 않았으며, 종말의 전조 증상 또한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정체 모를 탑도 존재하지 않으며, 괴물의 출현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또한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평생을 이 세상의 한 일원으로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손서연이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콰카카카카캉!

콰카카카카캉!

손서연이 죽은 시청 앞 광장에는, 거대한 탑이 생겨났다.

이 탑을 바라보니 왠지 모를 허탈함이 밀려온다.

아마 서울뿐만 아니라 세상 곳곳에는 이와 비슷한 탑들이 등장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곧 고블린을 비롯한 괴물들이 속속 출현할 테고.

[당신이 최종 퀘스트에 실패하게 되면, 이 세상은 종말을 맞이합니다.]

[최종 퀘스트는…….]

드디어 오픈된 이 탑의 결말.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다음에 이어진 메시지였다.

[지혜롭고 순결한 자가 당신에게 은밀하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자는 나를 특별한 플레이어로 만들어 준 제나의 주인.

그리고 이 메시지는 제나를 통하지 않은 최초의 소통이었다.

[저는 당신이 최종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이 탑의 결말을 보길 바랍니다.]

의외였다.

탑의 열두 군주는 세상의 종말을 이끈 주체이니까.

하지만 그동안 제나의 주인에게선 뭔가 다른 스탠스가 느껴졌던 바, 한편으로는 수긍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보험 하나를 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다음 회차의 종말에서 당신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찾으십시오. 그는 공략집과 현자의 상태창을 통해 이번 회차의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종말에 맞서게 될 것입니다. 아쉽지만 당신이 그 역할을 두 번이나 할 수는 없습니다. 최종 퀘스트에 실패하여 죽게 되면, 당신은 플레이어 시절의 모든 기억을 잃고 최종층의 주민이 되어 새롭게 종말을 맞이할 테니 말입니다.]

메시지의 황당한 내용에 뇌의 회로가 정지하는 것만 같다.

또다시 반복되는 종말이라니.

게다가 이 말의 의미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종말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음 메시지를 통해 확인되었다.

[며칠 후 당신은 아주 은밀하게 실버 고블린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인간에게 실버 고블린의 씨앗 하나를 건네는 것으로 다음 회차를 위한 보험 임무는 종료입니다.]

[물론, 최상의 시나리오는 당신이 이번 회차에서 이 세상의 모든 종말을 완전히 끝내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아, 참고로 이번 회차에서 당신에게 씨앗을 건넨 인간은 신주아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회차에서 신주아가 최종 퀘스트에 실패하며, 이번 회차의 종말이 이어졌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혼란은 가중된다.

정리해 보자면, 종말이 오기 전 내가 살던 세상은 탑 속 최종층이었다는 의미.

엄밀히 말하면 그때도 이미 한참 전에 종말은 시작되어 있단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이전에도, 또 그 이전에도 이 종말은 얼마나 더 많이 반복되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가 탑의 최종 퀘스트에 실패하면 종말은 다시 한번 더 반복되게 된다는 것.

‘무한 리셋이라…….’

그동안 탑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관념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 탑은 플레이어의 등반보다 탑 자체의 증식이 더 빠르기에 사실상 최종층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내가 최종층에 올 수 있었던 건 수많은 기연이 쌓여 가능했던 기적적인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 회차의 종말 때에도 누군가가 최종층에 도달한 기적은 일어났다는 것.

물론 실버 고블린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모든 생존과 성장을 보장해 주진 않는 일이기에, 내가 이곳에 온 데에는 어느 정도의 운과 기적이 작용한 것임을 온전히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제나의 주인이 보낸 메시지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잠시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시청 광장 앞에 세워진 탑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 29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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