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일주일의 시간이 더 흘렀다.
여전히 세상에는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코스피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어느 유력 정치인은 뇌물 스캔들로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한국의 축구 선수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최초로 결승 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는 즉석 복권을 긁어 5억 원에 당첨됐다.
"캐애앵!"
"뭐? 다음번엔 로또를 사라고?"
"캥! 캥!"
"캥수야. 한 번이면 됐지, 인생을 너무 그렇게 날로 먹을 수는 없잖아."
"캐애앵?"
"뭐? 한강뷰가 보이는 아파트를 살 때까지만 치트키 좀 쓰자고?"
"캥!"
캥수 녀석, 하루 종일 TV만 보더니 벌써 속물이 다 됐다.
복권에 적힌 당첨금을 바라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과연 이 종이 쪼가리가 나에게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지혜의 나무로도 전혀 판단이 되지 않는다.
"흐음."
이렇게 시간이 지나 일 년, 이 년이 지나다 보면 이 세상에 완전히 적응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여긴, 내가 원래 속해 있었던 곳이며 또한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니까.
정말 이런 식이라면 마지막 층을 클리어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유혹이 스멀스멀 밀려오곤 한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선 곤란한 일이지.’
일단 이곳이 실제의 세상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당장 내일 세상이 무너져 내리며 종말이 찾아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
이 마지막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야만 한다.
물론 수련도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
사부의 등선 전 모습을 통해 나의 무영추혼검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였기에.
‘그리고 이제 슬슬 찾아 나서 볼까?’
이곳에서 만나 봐야 할 사람이 있다.
나보다 먼저 탑의 최종층에 도착해 있는 손서연.
나는 옴팔로스가 부여한 미션에서 그녀의 도플갱어를 죽였으며, 하데스의 반지를 통해 망자의 기억 일부를 읽어 본 적이 있다.
기억의 파편에 거짓이 없다면 그녀는 분명 최종층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망망대해에서 어쩌면 손서연은 유일한 실마리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플레이어 이호영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또한 나를 제외한 유일한 플레이어. 그리고 탑의 입장에 서 있는 살성이니까.
"캥수야, 손서연을 어떻게 찾으면 좋을까?"
내가 손서연을 먼저 찾아갈 방법은 없다.
나는 그녀가 사는 곳도, 소속되어 있는 곳도 전혀 모르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대화 좀 많이 해 놓을 걸 그랬다.
현재 상황에선 그녀가 나를 찾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의 계획은 내가 탑의 최종층에 왔다는 걸 손서연에게 알리는 것.
"캐앵!"
"뭐? 미튜브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캥!"
나 역시 염두에 둔 방법이다.
단번에 유명해질 수 있으며 플레이어 이호영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녀가 산골 오지에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면 머지않아 나의 존재를 인지해 낼지 모른다.
"좋아! 일단 계정부터 만들어야겠군."
내가 팔자에도 없는 미튜브를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 * *
채널명은 자이언트 캥TV.
메인 콘텐츠는 캥수로 할 생각이다.
사람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괴생물은 단번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으며, 만약 손서연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단번에 알아볼 테니까.
계획은 야심찼으며, 완벽해 보였다.
세상일이 생각만큼 쉽진 않다는 걸 바로 알게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조회 수 13회 - 1일 전]
"캥수야, 이 바닥도 녹록지는 않구나."
"캐앵!"
며칠이 더 지나도 우리의 채널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조회 수 14회 - 4일 전]
캥수와 나의 스파링 영상은 대중들의 혹독한 외면을 받았다.
수준을 많이 낮춰서 합을 맞췄다곤 해도, 우리의 격투 모습은 UFC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퀄리티.
하지만 댓글 하나만 외로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 캥거루 분장 하나는 쓸데없이 고퀄이네요. ㅋ
심지어 캥수는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조회 수.
미튜브는 알고리즘님의 간택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던데, 제목도 그렇고, 화제성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캥수야, 이번 콘텐츠는 먹방 어때?"
"캥?"
"우리 채널은 인지도가 없으니 어그로라도 끌어 봐야지."
미튜브 세상 속에는 수많은 먹방이 존재하며, 사람들은 푸드 파이터들의 경이적인 식사량에 열광한다.
그리고 캥수의 먹성은 저 세상 수준이니 격투 콘텐츠보다는 화제성 면에서 뛰어날 것이란 생각이다.
"자신 있지?"
"캥!"
"꽁돈도 생겼겠다, 특별히 소고기로 쏜다."
"캐애앵!"
그래서 촬영 중에 캥수가 먹어 치운 소고기의 양은 무려 열두 근.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조회 수 2.7천 회 - 1일 전]
- 마블링 미쳤다! 저 정도면 1++등급 한우잖아!
- 근데 저거 캥거루야 사람이야?
- 당연히 사람이 분장한 거지! 캥거루는 초식 동물임.
- 아무리 봐도 사람 아닌 거 같은데.
.
.
.
캥수의 정체를 놓고 하루가 넘도록 사람들은 열띤 논쟁을 진행 중이었다.
화제성 면에서 아주 바람직하다.
조회 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섰으니, 스노볼 효과도 금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회 수 1.2만 회 - 2일 전]
또다시 하루 만에 조회 수는 몇 배가 뛰었으며, 그다음 날에는 거기서 또 10배가량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캥수의 먹성에 열광했으며, 캥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갈수록 뜨거워져만 갔다.
- 그래서 결론은 캥거루라는 거야, 사람이라는 거야?
- 사람임. 하는 짓만 딱 봐도 사람이잖아! 카메라 각도로 교묘하게 캥거루인 척 위장하는 거임.
- ㄴㄴ 진짜 캥거루임. 카메라 각도고 자시고 사람이 이렇게 분장한다는 게 말이 안 됨.
- 혹시 CG는 아닐까?
[조회 수 87만 회 - 6일 전]
조회수가 눈처럼 불어나며, 캥수와 나의 스파링 영상에 대한 반응도 뜨거워졌다.
댓글에는 격투 전문가들이 총출동하며 우리의 싸움 실력은 고딩 일진급은 충분히 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등장한 나의 정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크게 한 방 터뜨릴 시간이 된 것이다.
"캥수야. 이제는 하늘 좀 날아 볼까?"
"캐애앵!"
이미 구독자는 폭증한 상태이니, 이 소식은 세상 곳곳에 펴져 나가게 될 것이다.
어쩌면 동영상 업로드 3개 만에 뉴스에 나오게 될 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나는 인간과 캥거루라.
검은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갑자기 우리 집 앞에 나타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을 뿐이다.
* * *
마지막 사부의 모습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결국 등선을 이뤄 낸 그의 경지는 그야말로 검술의 신.
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음을 일러 준 것이다.
"거의 다 왔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캥수야?"
"캐앵!"
사실 사부와 혈마 정도를 제외하면, 무림을 비롯한 모든 차원에서 나를 상대할 수 있는 고수는 많지 않을 거라 자신한다.
천마신교의 좌우호법과 장로들, 그리고 무림맹주 주정천. 그들 모두 천하를 호령할 만한 검객들이지만 이젠 내가 그들보다는 한 수 이상은 앞서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건 결코 오만이 아니다.
마나수의 열매를 완전 흡수한 이후, 나의 내공은 예전보다 훨씬 더 심후해졌으며 지혜의 나무는 하루하루 나의 성취를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강하다.
그리고 나는 내일 더 강해질 것이다.
"캥수야, 스파링 한번 할까?"
"캐애앵!"
"뭐? 나 말고 세용이랑 하고 싶다고?"
"캥!"
"하긴, 너희 둘은 서로에게 환상의 스파링 파트너였으니까."
나 역시 탑에서의 인연들이 그리워진다.
부디 이곳의 시간과 동료들이 있는 곳의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만약 서로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40층 피의 날을 이미 맞이했을 테니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오늘도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본 전 세계의 인구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다.
만약 아래쪽에서 피의 날이 진행되고 있다면, 거기서 죽은 아주 많은 이들은 이곳 최종층의 주민이 되었을 것이고 원래부터 최종층 세계에 존재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을 터.
하지만 그런 변화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내가 최종층을 클리어한다면, 결국 그들은 피의 날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게 사람들에게 더 좋은 거 맞지, 캥수야?"
"캥!"
캥수에게라도 확인을 받고 싶었다.
탑에서 죽은 뒤, 모든 기억을 잊은 채 최종층에서 살아가는 것. 혹시 이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결과가 아닐까? 라는 의심.
그런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내게는 혼란의 시간이 시작되곤 한다.
그때였다.
나의 SNS에 쌓여 있는 수많은 DM들.
그중에 눈에 띄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었다.
- 이호영. 너는 결국 여기에 오고 만 것인가?
손서연이었다.
* * *
시청 앞 광장.
이곳은 종말이 오기 전 거대한 탑이 세워진 장소였다.
물론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많은 서울 시민들의 나들이 공간일 뿐이다.
이곳에서 나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많은 인파 속에서도 손서연의 기운은 단번에 캐치할 수 있다.
나를 제외한다면, 그녀는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플레이어니까.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그녀는 여전했다.
여전히 무표정했으며, 여전히 눈빛은 차가웠다.
"오랜만이야. 손서연."
그녀는 아무런 반응 없이 뚜벅뚜벅 걸어오며 나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 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모든 것을 다 떠나 진심으로 반가웠다.
그녀는 나와 함께 종말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전우였기에.
"그런데 넌 반갑지 않은가 봐?"
"……."
"네가 최종층에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널 찾기 위해 쌩쇼를 했던 것이고."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말이다."
손서연은 드디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지?"
"그것이 모두에게 더 좋았을 테니까."
그녀는 의미심장한 음성으로 답했다.
"손서연,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 내가 왜 탑의 최종층에 왔는지. 그리고 너를 찾으려 했는지."
잠시 침묵이 감돈다.
"너는 여전히 이 탑을 클리어하고 싶은 것인가?"
나 역시 최종층에 오고 나서 수 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질문.
비록 혼란은 있었지만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어."
"역시 이호영다운 결정이군."
"이곳 최종층의 세상은 진실이 아니니까."
"그 문제를 놓고 너와 토론을 벌인다면, 한도 끝도 없겠지."
"궁금한 게 있다 손서연. 너는 왜 탑의 최종층에 와 있는 것이지?"
내가 읽었던 기억의 파편에 따르면, 손서연은 이곳에 자의로 온 느낌은 아니다.
분명 탑의 의지와 의도가 작용했을 터.
이 탑을 클리어하기 위한 실마리를 묻기 이전에, 이 궁금증을 먼저 해결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 두 가지는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 28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