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보는 탑 공략집-287화 (287/292)

287화

"아무튼 더 이상 네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어."

제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내가 탑의 최종층에 도전하는 게 불만인 거야? 아니면 너의 주인이 불만이래?"

"흐음!"

나의 다그침에 제나는 입을 꾸욱 다문다.

그리고는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만을 계속 지을 뿐이었다.

"말해 봐."

"이것도 역시 말해 줄 수 없어서 그러는 거야. 다른 것도 아닌 탑의 최종층에 대한 이야기니 내 재량 밖이라고!"

"재량이 아니다? 참 편리한 설정이군."

"뭐,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탑의 최종층에 도전할 생각이야."

"쳇!"

나는 성검 가이아를 꺼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게 이 가이아를 선물한 것도 제나의 주인이다.

내가 성검을 소유하는 순간부터 포털에 대한 권능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은 정해진 수순.

그럼, 과연 제나와 제나의 주인은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제나는 이 부분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너무 단호박 같아서 말릴 수도 없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플레이어의 선택은 강요할 순 없는 문제니까."

"기대할게. 최종층에서의 공략집 말이야."

"안 준다고 했잖아!"

[이 멍청아.]

[바보 같은 놈.]

[말미잘 같은 놈.]

이 반응의 의미는 도대체 뭔지.

어쩌면 제나는 나의 도전이 너무 이르다고 판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옴팔로스의 말에 따르면, 이 탑의 최종층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은 플레이에겐 절망이 될 거라 하였으니까.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두 번째 피의 날이 오기 전에 이 빌어먹을 탑을 끝내야 한다는 것.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이이잉!

성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의지를 담아 허공에 원을 그린다.

- 포털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질 거야. 그러니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

성검 가이아마저 나의 마지막 도전을 말린다.

도대체 탑의 최종층에는 무엇이 존재하기에.

파바바밧!

포털은 바로 만들어졌다.

오랫동안 염원한 순간이 이제 한 발자국만 남았을 뿐이다.

"잘 있어. 제나."

하지만 제나는 등을 돌리며 내게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다.

"응원도 안 해 주는 거야? 마지막이라고. 마지막!"

"쳇, 그냥 꺼져 버려."

결국 이번 차원의 틈새에선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다.

제나의 작별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나는 포털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 * *

옴팔로스와 제나가 탑의 최종층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한 부분이 있다.

바로, 최종층은 마지막 도전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곳이라는 것, 특히 옴팔로스의 경우 탑의 최종층을 낙원이라고까지 하였다.

그 말의 의미를 이젠 이해할 수 있다.

낙원이란 게 별다른 게 아니니까.

‘여, 여긴!’

탑의 최종층은 놀랍게도 종말이 오기 전의 현실이었다.

"이호영 회원님!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헬스 클럽의 피티 강사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실내에서는 시끄럽게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종말 전에 유행하던 어느 아이돌 그룹의 타이틀곡이다.

"준비되시면, 바로 스트레칭부터 시작할까요?"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피티 강사의 상태창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레벨도, 직업도 없다.

이제는 너무 낯설게만 느껴지는 종말이 오기 전의 모습.

물론 나에게는 여전히 상태창에 존재했으며, 직업도 존재했고 탑에서 얻은 스탯도 그대로다.

여차하면 여기에 캥수까지 소환해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저기, 오늘이 몇 월 며칠이죠?"

스트레칭을 하며 강사에게 물었다.

"오늘이…… 벌써 4월 15일이네요."

4월 15일.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종말의 디데이니까.

이 빌어먹을 탑에 끌려온 날이기도 하다.

"와아! 회원님, 유연성이 거의 연체동물 수준인데요? 몸이 원래 이렇게 유연하셨던가요?"

스탯이 그대로이니 당연히 신체 능력에도 변함이 없다.

다음으로 넘어간 기구들의 중량도 내겐 가소로울 뿐이다.

나는 벤치 프레스를 가볍게 밀어 올렸다.

"회원님! 호흡이요, 호흡!"

호흡이고 자시고, 이 정도 무게로는 근육이 펌핑 되는 느낌조차 없다.

사실 이곳 현실에 와 있는 것 자체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벤치 프레스를 몇 번 더 들어 올리고 나면 꿈에서 깨어날 것만 같은 느낌.

덜컹!

기구를 잠시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확실히 탑의 최종층은 뭔가 기이한 곳이다.

그 어떤 퀘스트도, 테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원래부터 존재했던, 종말이 오기 전의 평범한 일상.

"저기, 회원님? 벌써 지치신 겁니까?"

"아니요. 무게 좀 올려 주세요."

일단은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를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퀘스트가 생성될 지도 모르니까.

"회원님, 아직 이 무게도 무리예요 무리! 이렇게 몇 번 들어 올리시더니 벌써 늘어지셨잖아요."

"괜찮아요. 그냥 무게나 올려 주세요."

"회원님! 강사 말 무시하고 운동 마음대로 하다가 다친 사람 못 보셨나 보네요?"

강사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피티 강사 상당히 깐깐한 데다가 전형적인 에프엠이다.

덕분에 종말이 오기 전까지 잘 배웠지만.

"알겠어요."

나는 군말 없이 다시 벤치 프레스를 밀어 올렸다.

"좋습니다! 호흡! 호흡! 어?"

"어? 회원님?"

"지, 지금 한 손가락으로 하는 거예요?"

강사는 이 말을 끝으로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사실 한 손가락이 아니라, 손 안 대고 염동력으로도 할 수도 있는데.

그나저나 이런 걸로는 퀘스트를 생성시킬 수 없나 보다.

일단 헬스 클럽 밖으로 나가 봐야겠다.

* * *

상쾌한 바깥 공기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역시 변함없는 현실 세계의 모습.

단 한 가지만 달라졌다.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거대한 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드르르륵!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다.

대출 권유 광고 메시지.

이참에 메시지 보관함을 검색해 봤지만, 몬스터 관련 재난 경보 문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까.’

확인해 볼 것이 있다.

조용한 곳으로 가 성검으로 포털 생성을 시도해 보았다.

불안감이 엄습한 가운데, 두 번 세 번 시도를 해 보아도 포털은 역시 열리지 않는다.

‘완벽하게 갇힌 거로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없으니, 이런 상황에선 공략집의 부재가 더욱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 신주아라도 있었으면 무언가 도움이 되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든다.

지금 신주아를 찾아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것.

그녀의 학교와 학과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대뜸 찾아가는 것이 그쪽에선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혹시 또 모른다.

퀘스트가 생성되며 그녀가 나를 알아보게 될지.

그런 마음으로 관악구에 있는 그 학교로 향했다.

"그런 사람 없는데요?"

"없다고요? 심리학과 XX학번에 신주아라는 학생 정말로 없습니까?"

"없어요. 재환아, 너는 혹시 알아?"

몇 명을 더 붙잡고 물어봐도 신주아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둘 중 하나다.

신주아가 학력을 위조했거나, 아니면 지금 이 세계관에 신주아가 존재하지 않거나.

만약, 가능성이 큰 후자 쪽이라면 이유가 중요하다.

피티 강사는 이곳에 존재하지만 신주아는 존재하지 않는 그 이유 말이다.

* * *

최종층에 온 이후 사흘이 더 지났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퀘스트는 생성되지 않았으며, 탑으로부터 아주 사소한 메시지조차 하나 없었다.

다만 잠정적인 결론을 몇 가지 내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이곳 최종층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모두 탑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인구 통계가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세상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세계의 인구가 다르며, 대한민국의 인구가 다르며, 서울의 인구가 달랐다.

그 차이를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하나 있다.

탑의 생존자는 최종층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신주아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명쾌하게 설명이 된다.

같은 이유로 김세용이나, 채이설, 서준호 등도 이곳에는 없을 것이다.

아직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지금 이곳은 종말이 오기 전의 세상이며 종말의 전조 증상 또한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옴팔로스가 탑의 최종층을 낙원이라 표현한 이유. 이곳이 바로 플레이어들이 누구나 소망하던, 우리가 자라고 지내 오던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마지막 층을 클리어하지 않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이 층에서는 제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탑에 도전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신주아의 말에 따르면, 이 탑을 벗어나게 되더라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까.

네 번째, 탑의 최종층을 지키는 파수꾼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인터넷 자료를 검색해 보아도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어 보인다.

초인이 된 나를 곤경에 빠뜨릴 만한 건 이 세상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그것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것.

일단은 그 특이점을 기다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아니면 이 세계에 다시 적응하면서 평생 살아가든가.’

* * *

그렇게 초심이 흔들리며 일주일의 시간이 더 흘러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탑의 생활은 어느새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언제 다가올지 모를 최종 결전을 대비하기 위해 수련을 게을리하진 않았지만, 오랜 시간 그리던 평범한 일상도 만끽했다.

탑에 들어오기 전 종말에 대비하기 위해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었기에 딱히 해야만 하는 일도 없고, 오늘은 캥수와 함께 집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이제 슬슬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도 심각하게 들기 시작한다.

"캐애앵!"

캥수 녀석은 지금 TV 드라마 삼매경에 빠져 있다.

"너, 그런데 이해는 하고 보는 거니?"

"캥!"

저걸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어쨌든 모든 것이 평화롭다.

캥수는 내가 해 준 샐러드 요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으며, 나는 명상으로 수련을 한 뒤 낮잠을 잤다.

* * *

그렇게 보름의 시간이 더 흘러갔다.

- 뭔가 불길해.

성검이 오랜만에 말을 걸어온다.

- 이상하지 않아? 탑이 이럴 리가 없는데 모든 게 너무 평화로워. 여기에 완전히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들 때쯤 탑이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사실 나도 그 부분은 궁금하다.

탑은 왜 지금까지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는 것인지.

성검이 말한 유혹은 이미 느끼고 있는데도 말이다.

- 혹시 탑이 오류를 일으킨 게 아닐까? 탑의 최종층은 죽지 않은 플레이어가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곳은 미리 얻은 정보대로 낙원처럼 느껴지는 곳이며, 실제로도 클리어하고 싶지 않은 곳.

지금까지는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일 뿐이다.

- 288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