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남은 시간: 6시간 3분]
나와 신주아가 마침내 다다른 곳은 39층의 사람들이 일컫는 ‘세상의 끝’.
바로 티폰의 섬이었다.
"금단의 구역이라고 하기엔 지극히 평범한 곳이로군."
이곳에선 그 어떤 성스러운 기운도, 특별함도 느낄 수 없었다.
아주 오랜 기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니, 희귀한 생물물이 번성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바람과 향긋한 풀냄새가 그나마 인상적이다.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탄생한 장소라기엔 너무 단조롭군요."
"맞아. 이 드넓은 들판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라고는 풀과 나무들이 전부이니까 말이야."
몬스터는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살지 않을 것 같은 섬.
그것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곳이었다.
"아마도 티폰은 저 산 정상 위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바로 날아가시겠습니까?"
"아니. 잠시 좀 걸을까?"
제한 시간은 이제 6시간 남짓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티폰과의 승부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와 잠시 걷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거로군요."
"역시 예리하네."
물어볼 것이 있었다.
신주아가 알고 있는 탑 이후의 세상에 대한 것을.
"38층을 클리어한 후, 우리 구역의 동료들은 탑에 대해 얻은 정보를 함께 공유했었지. 너는 탑 이후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었고."
"네. 저로서는 사실 유감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전해 준 정보는, 이 탑의 외부에는 우리가 알던 세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당시 이 이야기에 사람들은 충격과 절망에 빠졌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것은 탑 이전의 평범한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거기에 한 가지 말을 덧붙였잖아. 그럼에도 탑 이후의 세상에는 희망이 존재한다고 말이야."
신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말씀드리지 않았었죠. 듣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으니까요."
"이제는 그걸 물어보고 싶어. 그 희망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물론 신주아가 어떤 대답을 하든, 내 결심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는 티폰과 승부를 낸 뒤에는 무조건 탑의 최종층에 도전을 할 것이기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희망은 희망일 테니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직접 대면해 본 티폰은 사람들이 흔히 묘사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티폰은 거인도 아니었으며, 기가스처럼 하체가 뱀으로 되어 있는 괴물도 아니었다.
"정말 네가 티폰이라고?"
"왜? 내가 티폰인 거에 문제 있어?"
오히려 티폰은 어린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인외종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니까."
"나도 알고 있어. 머저리 같은 인간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하지만 굳이 신경 쓸 것도, 바로 잡을 필요도 없었지. 인간들이 나에 대한 공포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 덕에 나는 이곳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었으니까."
확실히 티폰의 외양은 전혀 공포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깜찍한 쪽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외모에 국한된 이야기.
티폰이 지금 발출하고 있는 기운은, 39층의 사람들이 오랜 세월 공포심을 품을 만한 것이었다.
쉽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미안한 얘기 좀 하려고 하는데."
"알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인간들의 목적은 다들 같으니까. 그나저나 대략 140년 만의 방문이군."
"겨우 그것밖에 안 됐어? 내가 듣기론 적어도 수백 년 동안은 아무도 티폰의 섬에 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대륙은 넓고 세상엔 미친놈들이 많으니,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나에게 도전하려는 놈들은 종종 있어 왔지. 오히려 난 140년 동안이나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야. 인간들 중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왜 날 찾지 않은 거지? 이 섬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 반대편 대륙에는……."
티폰은 생각보다 아주 말이 많은 녀석이었으며, 텐션 또한 매우 높았다.
어쩌면, 오랜만에 방문한 인간이란 존재가 반가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길고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참아 온 것인지.
140년이라는 것을 헤아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녀석은 인간을 아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이이이잉-
나는 바로 베라드를 소환했다.
티폰이란 녀석이 예상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체구의 인외종이긴 하나, 최고의 전력으로 상대할 생각이다.
"기간트라는 것이로군? 그걸 탄다고 결과가 달라질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해 봐."
티폰은 여유 만만한 모습이었다.
확실히 녀석에겐 이런 여유를 부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인간으로선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격의 존재.
퀘스트 자체가 애초에 클리어가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나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버프 지수: 5.07]
신주아와 함께 베라드에 탑승하니 버프가 폭발한다.
많은 기가스들의 마나 하트를 흡수한 베라드는, 39층 역사상 최고의 기간트.
물론 나 자신의 마나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하다.
마나수의 열매를 온전히 흡수한 이 경지는 실로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여기에 사부로부터 얻은 깨달음이 더해진다.
내가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싸움.
"자, 오너라. 인간이여! 재미있는 승부가 될 것 같구나."
티폰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짓한다.
휘이이익!
무영추혼검을 펼쳐낸 성검이 한 줄기 빛을 발한다.
그 어느 때 보다 강렬하고도 힘찬 직선이 허공을 갈랐다.
공간을 찢어 놓을 듯 펼쳐진 검기가 닿은 곳은 티폰의 모가지.
"궁금하지 않아?"
"뭘 말입니까?"
"39층의 사람들은 언제쯤 티폰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알게 될지."
"제 생각에, 그런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왜지?"
"이곳 사람들에게 티폰은 신화이자 전설이니 말입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먼 훗날, 누군가가 티폰의 섬에 방문한다 하여도, 티폰의 부재를 죽음과 직결시키진 않을 테니까.
티폰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은 당분간,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였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딱히 클리어 보상을 바라고 도전한 것은 아니나, 아무것도 없을 리는 없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칭호: 티폰을 참살한 자]
[보상으로 39층에서 사용한 기간트를 계속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베라드가 이호영과 신주아의 공동 소유가 되었습니다. 비사용 중에는 둘 중 누구든 소환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크다.
39층을 종료했을 때의 최대 관건은 기간트를 가져갈 수 있는지의 여부.
다행히 차질 없이 기간트를 탑의 최종층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잠시 후, 로비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신주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때.
문득 그녀와 약혼을 했다는 사실 또한 머리를 스친다.
"신주아, 고백할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뭐야, 지금 약혼자의 입에서 고백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너무 무덤덤한 거 아니야?"
"흔히 말하는 고백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하여간 그놈의 직감."
"사실, 그래서 더 떨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하려는 고백이 너무 크게 다가올 거 같아 그게 무섭습니다."
"신주아가 그런 감정도 느낀다고?"
"저도 사람이니 말입니다."
어느새 신주아의 표정은 초조해져 있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이런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어쩌면 신주아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위해 떠난다는 것을.
"나는 로비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탑의 최종층."
"역시 그런 것이로군요."
"이 지긋지긋한 게임을 끝내야 할 때니까. 물론 끝나 버리는 건 나 자신이 될 수도 있겠지만."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
"약혼자에게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내가 탑의 최종층에서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든, 그 이후의 세계는 아직 미지수니까 말이야."
신주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를 말리지도, 응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39층을 종료합니다.]
이제야 후회가 밀려온다.
조금 더 일찍 작별의 시간을 가져 볼 것을.
"저의 직감을 믿으십니까?"
"그래. 믿어."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 역시 그런 미래가 되길 소망한다.
하지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도 역시 하지 못했다.
[차원의 틈새가 열렸습니다.]
신주아의 모습은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 * *
"신파극은 잘 봤어."
제나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며 서 있었다.
"신파극이었나?"
"목석 남녀 둘이서 그 정도면 충분히 신파극이었지."
제나의 핀잔은 작별의 여운을 싹 달아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남녀 간의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오그라들거든!]
[ㅋㅋㅋㅋ]
[ㅋㅋㅋㅋ]
"그만 좀 해. 어쨌든 다 봤으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게 될지를 말이야. 묻고 싶은 것이 있어."
"급하기도 하셔라. 오자마자 너무 심각한 거 아니야? 숨이나 좀 돌리라고."
제나는 얼음차 한 잔을 소환해 내 나에게 건넨다.
"이제 탑의 최종층으로 향하는 포털을 열 생각이야."
제나는 나를 보며 한참 동안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그런데 왜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 너는 누구보다 탑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플레이어잖아. 천천히 탑을 등반해도 되는 것을 굳이……."
"그러면 너무 늦어질 테니까."
"늦어진다?"
"이 빌어먹을 탑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리고 이제 다가올 40층에서는 또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겠지. 나 혼자 살아남은 세상은 필요 없어. 이미 지금도 상당히 늦은 셈이지."
"역시 인간이란 참 흥미로운 존재야. 아니면 이호영 네가 좀 특별한 것인가?"
"말장난은 그만하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줘. 탑의 최종층. 그곳은 어떤 곳이지?"
"클리어가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곳.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네가 클리어하기 싫어질 만한 곳이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야. 그거 말고 다른 거 없어?"
"없어. 참고로 네가 그곳에 가는 순간 더 이상의 공략집은 없을 거야."
"이상한 일이군."
"뭐가?"
"그동안 내가 탑에 쉽게 등반하도록 돕긴 했어도, 정작 탑의 마지막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건 곤란하단 의미인가?"
"그, 그건!"
내 말에 제나의 눈빛이 흔들린다.
이건 마치 정곡을 찔렸을 때 짓는 표정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왜 그동안 나를 도왔는지를.
그리고 왜 하필 나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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