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오랜만이구나. 아둔한 제자 녀석아."
"사부님."
차원의 벽 반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사부였다.
사실 사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차원 너머로부터 성검 가이아에게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건, 결코 평범한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결국 등선에 성공하신 겁니까?"
사부를 대면하는 순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부의 격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그렇다. 그리고 지금은 등선을 하기 직전 내게 부여된 특별한 시간이니라."
"그럼 정말로 등선을 하시게 되면……."
이제 격의 차이로 인해 사부는 세상과 단절이 된다는 것.
탑의 12군주와 대등한 지위에 올라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나 역시 그동안 제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군주와 직접 소통을 할 수 없었다.
나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격의 차이’라는 것 때문에.
"영광인 줄 알거라. 나의 세상 마지막 순간을 너와 보내기로 한 것을 말이다."
"……사부님."
보고 싶었다.
또한 보여 주고 싶었다.
내가 익힌 무영추혼검의 경지가 이제는 부끄럽지 않은 경지에 올라섰음을.
"감격했느냐?"
"뭐, 조금은 그렇습니다."
"고작 그런 반응이라니, 하여간 말주변이 재미없는 건 여전하구나."
"그 사부에 그 제자 아니겠습니까?"
"허허. 말버릇이 없는 것도 여전하고. 하지만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겠다. 나의 등선을 앞당겨 준 데에는 네 녀석이 기여한 바도 있으니까."
"제가 말입니까?"
"혈마. 네 녀석이 연결 다리가 되어 만나게 해 준 그 늙은이 말이다. 내 평생, 나와 함께 검을 논할 수 있는 상대가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거늘!"
그제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부가 오랜 기간 벽에 막혀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사부 자신 때문이었다.
고금 제일의 재능 덕에 평생 남을 압도하는 위치에만 있어 보았으니까.
"혈마, 그 친구는 참 대단한 늙은이였지."
자신의 마지막 한 꺼풀을 벗겨 내기 위해선 최소한 본인과 동등한 상대를 만났어야만 했다.
결국 혈마가 그 역할을 해 주었던 것.
"혈마와의 대결 속에서, 마지막 깨달음을 얻으신 거로군요."
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와 혈마.
내가 만나 본 이 두 거인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재능 하나만 놓고 보자면, 역시 사부 쪽이 우세일 것이다.
혈마 역시 내가 펼친 미완성의 무영추혼검만을 보고서도 사부의 천재성을 인정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혈마에겐 사부에겐 없는 기나긴 세월이 있었다.
혈마가 탑에서 보낸 수백 년은 그 재능의 간극을 충분히 메울 수 있었던 시간.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와 혈마의 승부 말이냐? 네놈은 아주 뻔한 걸 물어보는구나."
사부는 나를 보며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로 사부님께서 혈마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신 겁니까?"
"무림 역사상 다시는 없을 좋은 승부였지."
누가 이겼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대결.
비록 내가 사부라 부르는 것은 사부뿐이지만, 따지고 보면 혈마 역시 나의 유이한 스승이었기에 누구를 편들 마음은 없다.
"그럼 혈마는……."
"그 늙은이 말이냐? 혈마도 등선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더군. 아암! 무영추혼검의 모든 정수를 몸으로 느껴 보고서도 등선을 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
결국 혈마도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
동반으로 등선해 버린 두 사람의 검술을 내가 한 몸에 익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탑에서 누린 행운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사부님. 중요한 건 아니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뭐냐?"
"사부님이 혈마를 이기셨다는 것 말입니다, 혈마도 동의하는 내용입니까?"
"뭐냐, 너 지금 설마 이 사부를 의심하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혈마도 함께 등선을 했다는 건, 두 사람의 대결이 맞수라는 느낌을 주어서 말입니다."
"맞수인 것은 맞으나, 분명 반의반의 반 끗 정도는 내가 앞섰느니라. 그건 혈마 그 늙은이도 인정하고 있을 게다."
이렇게 되면 혈마 쪽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렇군요."
"네 이 녀석! 지금 그 표정은 아주 거슬리는구나."
"아닙니다. 천마의 후예로서 불경한 마음은 절대 갖지 않습니다."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좋다. 그럼 믿도록 하지."
사부의 이런 모습을 보면, 등선을 한다고 해서 인격까지 성숙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군주들이 지금까지 보여 준 행태만 봐도 그렇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누군가를 편애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미션을 부여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지금 네 몸 상태는 뭐가 어찌 된 일이냐? 아주 불안정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역시, 사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알아차린다.
"마나수의 열매라는 것을 복용하였습니다. 워낙 큰 마나의 기운이 몸속에 자리하게 되어 단번에 흡수하지 못한 채 조금씩 제 것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아둔한 녀석! 이 거대한 기운을 조금씩 흡수하여 어느 세월에 다 네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냐."
사실 이는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 중에 하나였다.
내 뜻대로 제어하기에는 너무 큰 기운이었기에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만 조심스럽게 컨트롤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사부의 말대로 이는 너무 긴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사부는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짓는다.
역시 이 거인에게 나는 여전히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다.
"원래대로라면 네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파아앗!
사부의 손바닥이 나의 단전에 닿으며 강한 파동을 일으킨다.
그 어떤 고통도 없다.
내 몸속을 부유하던 거대한 기운이 들끓는 단전 속에서 단번에 용해되는 느낌.
"아주 어린아이에게처럼 떠먹여 주는 꼴이구나."
파아아앗!
사부의 손동작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듯 사부의 의지에 따라 단전에서 용해된 이 거대한 기운은 나의 몸 구석구석을 일주천 하기 시작한다.
"이런 꼴사나운 짓을 하는 것도, 다 아둔한 제자를 둔 내 잘못 아니겠느냐!"
파아아앗!
아둔이라.
얼마 전에는 무림맹주와도 거의 대등한 승부를 펼쳤던 나다.
비록 그 당시 엄청난 템빨을 덕지덕지 바르긴 했지만, 만약 지금 다시 싸운다면 모든 템들을 다 떼어 놓고 승부를 벌이더라도 지지 않을 수 있는 수준.
그럼에도 아둔이다.
예전의 수식언이었던 쓰레기에선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이제 곧 등선을 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파아아앗!
사부의 손짓에 따라 거대한 기운이 내 몸속에서 이주천, 삼주천을 거듭하며, 나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이제 되었다."
"사부님!"
순식간에 벌어진 믿기지 않는 변화다.
헤아릴 수 없이 충만해진 마나의 기운.
하지만 사부는 곧바로 나를 다그쳤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등선을 앞둔 사부의 경지는 실로 놀랍다.
이전에도 말이 안 나올 만큼 대단했지만 이제는 말 그대로 초월좌의 경지.
"시간이 없다. 이제는 내 앞에서 무영추혼검을 펼쳐 보아라."
사부의 재촉.
등선 전의 특별한 시간이 거의 다 도과해 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네. 사부님."
오랫동안 기다린 순간이었다.
비록 사부의 입에서 좋은 말은 나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의 변화와 성취를 직접 보여 주고 싶었다.
나를 천마의 후예로 선택한 그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휘익!
나는 성검을 붓 삼아 허공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 가기 시작했다.
직선과 곡선이 하나하나 뼈대를 그리고 점점 살을 붙여 간다.
휘이익!
휘이이익!
충만해진 마나는 한 획 한 획마다 더 많은 힘을 담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익숙한 힘이 아니기에 아직은 놀랍기만 할 뿐이다.
휘이익!
본디 무영추혼검의 본질은 단순함에 있었기에, 나는 화려한 기교 없이 가장 기본적인 것을 사부에게 보여 주었다.
적어도 겉멋만 들었다는 핀잔은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트집을 잡고자 한다면, 사부 눈엔 나의 모든 동작들이 트집거리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휘이이익!
휘이이익!
"그만, 거기까지."
사부는 나의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중단을 요구하였다.
아쉽지만 나는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럴 땐 쓰레기라는 평가를 받기 십상.
하지만 사부는 그 어떤 말 대신 본인의 검을 직접 들어 올렸다.
"잘 지켜보도록 하여라."
그리고는 곧바로 본인의 검술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가 보여 준 것은 방금 전 내가 허공에 펼친 것과 똑같은 그림.
사부의 명에 따라 잘 지켜보았다.
단 하나의 동작도 놓쳐서는 곤란하다.
사부가 직접 보여 주는 검술은 내게 있어서 최고의 교보재.
이전보다 나의 경지가 높아진 만큼 눈에 담을 수 있는 데이터는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다.
거기에 상시 가동되고 있는 지혜의 나무는 내게 실시간으로 깨달음을 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느끼는 감정은 배움에서 오는 희열이 아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초라함.
같은 그림으로 이렇게 다른 느낌을 만들어 내다니, 차라리 쓰레기라는 말을 듣는 게 덜 아팠을 것이다.
물론 사부의 의도는 잘 알고 있다.
"차이를 알겠느냐?"
"네. 사부님."
사부의 가르침을 통해, 나의 개선점은 명확해졌다.
그가 보여 준 무영추혼검의 이데아는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방법을 완벽하게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나쁘지 않았다."
"네?"
"방금 네놈이 보여 준 짝퉁 무영추혼검 말이다."
순간, 사부의 말에 아무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이 말은 사실상 칭찬이니 마찬가지였으니까.
사부로부터 듣는 첫 칭찬이기도 하였다.
초라함과 수치심으로 점철된 순간에 최고의 찬사를 듣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쉽지만, 이제 내게 부여된 시간이 다 된 것 같구나."
사부가 나를 재촉했던 이유.
"이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사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겁니까?"
"혹시 또 모르겠구나. 네가 등선을 하게 된다면 다시 만나게 될지. 하지만 너의 쓰레기 같은 자질을 생각하면 그건 불가능하지 않겠느냐?"
"자질이 없기도 하지만, 사실 저는 등선에 관심이 없습니다."
"신포도는 아니고?"
"탑의 마지막 스테이지를 깨고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만이 제 유일한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탑의 최종층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어려운 길을 가려는구나."
"천마의 후예이니 말입니다."
사부는 내 말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 처음으로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여 줄 뿐이었다.
사부의 몸이 조금씩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정말 등선의 순간이 다가온 것.
더 이상 만날 수는 없겠지만, 사부는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빌어먹을 탑의 최종 스테이지에서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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