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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283화 (283/292)

283화

기가스 헤일의 거대한 지팡이가 맹렬하게 공기를 가르며 다가온다.

뱀처럼 휘어져 들어오는 지팡이는 매섭게 마나를 쏘아 내며 나의 성검과 부딪혔다.

파아앗!

파아아앗!

믿을 수 없지만 내 몸이 살짝살짝 밀리기까지 한다.

내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이 무영추혼검의 정수이기에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디버프 지수: 3.95]

군주의 농간질만 아니었어도 진즉 기울었을 승부는 여전히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저 디버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베라드의 조종을 신주아에게 맡기는 것.

여러 차례 검증을 해 보았기에 효과는 확실하다.

단, 소멸되는 디버프 이상으로 나와 신주아의 전투 격차는 더 크긴 하지만 말이다.

"지쳤구나! 인간이여!"

기가스 헤일은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다.

이 팔레네 섬에 헤일을 능가하는 기가스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금이 고비다.

헤일의 마나하트를 흡수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상대부터는 디버프가 있다 해도 앞으로는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팔라스의 방패]

- 자가 복원 모드

- 진행률: 73%

진행 속도로 보아, 방패는 며칠 후에나 사용이 가능하다.

"인간이여! 그럼 이 공격도 한번 받아 보아라!"

순간, 헤일의 지팡이가 진동하며 붉은빛을 발출한다.

콰카카캉!

쏟아지는 붉은 마나의 폭발.

나 역시 성검을 휘두르며 검기를 쏘아 냈다.

두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며 마나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베라드 안에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파바바바바바!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팽팽한 기의 흐름.

여기서 더 무리하며 힘을 쏟지는 않았다.

헤일의 여력을 가늠해 볼 필요가 있었기에.

"제법이구나! 인간!"

여유 있는 척과는 달리 헤일의 호흡은 불안정하다.

녀석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베라드는 기가스 릴디의 마나하트를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거기에 일루미를 쓸어 버리면서 얻은 마나의 양도 상당하니 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압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파아아아악!

결국 마나의 대충돌은 서로를 거칠게 밀어내며 마무리되었다.

"디버프로 인해 절묘하게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거 같습니다."

"이것 또한 군주의 치밀한 농간이겠지."

물론 이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역시 내 쪽이다.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으니까.

또한 승부가 나지 않고 극단적으로 늘어진다면 결국 며칠 후엔 팔라스의 방패를 사용할 수 있는 나의 승리일 터.

질 거란 생각은 전혀 없다.

문제는 티폰에게 도전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기가스를 만나고자 한 기존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공략집의 행보가 무척 마음에 든다.

메시기가 전송되는 타이밍이 매우 적절한 것.

하지만…….

메시지를 접해 드는 순간 뇌 정지가 찾아왔다.

이대로 실행하기엔 난감한 내용이었기에.

[39층을 관할하는 군주는 하나가 아닙니다.]

차원의 틈새에서 제나가 직접 이야기해 준 내용이다.

바람의 군왕을 제외한 다른 한 군주는 우리에게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었기에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또 다른 군주의 이명은 ‘가정(家庭)의 수호자’입니다.]

참으로 뻔뻔한 이명이 아닐 수 없다.

이 빌어먹을 탑은 세상의 수많은 가정을 파괴해 왔으니까.

[참고로 39층의 두 군주는 부부입니다.]

공략집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사족을 단 것인지, 이때만 해도 예측하지 못했다.

[‘가정의 수호자’는 ‘바람의 군왕’이 걸어 놓은 디버프를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단, ‘가정의 수호자’는 특정 조건하에서만 플레이어에게 관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특정 조건이란 것이 매우 황당했다.

이 군주는 결혼과 정절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것.

[당신이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가정의 수호자는 당신을 제약하고 있는 모든 디버프를 무력화시킬 것입니다.]

가정을 꾸리라고?

그 순간 신주아와 시선이 절로 교차한다.

기가스 헤일과 전투를 하고 있는 이 긴박한 순간에도 마음속에는 이해할 수 없는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파아아앗!

파아아아앗!

또다시 헤일의 지팡이와 베라드의 광선검은 공간을 일그러뜨릴 기세로 맞부딪힌다.

거기에 두 마리의 뱀은 포악한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맹독을 퍼붓는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을 잠식해 가는 것은 이 치열한 교전의 상황이 아니다.

‘가정을 꾸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림이다.

이 빌어먹을 탑에서는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였으니까.

"신주아."

왠지 모르게 그녀의 이름이 낯설기만 하다.

"전투 중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십니다."

"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하는데 한번 들어 봐."

"네. 듣고 있습니다."

"이 탑을 끝내는 날이 오게 되면 말이야……."

기가스 헤일과의 교전 중이 아니었다면, 결코 말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나랑 결혼하자."

"점프하십시오!"

휘이이익!

베라드가 뛰어오른 자리에 헤일의 지팡이는 허공을 가른다.

파아아악!

그리고 이어진 베라드의 완벽한 발차기에 헤일은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호흡이 좋았다.

그리고 잠시 이어진 침묵.

"고백하신 겁니까?"

"그냥 평범한 고백이 아니야."

"확실히 평범하진 않아 보입니다."

"지금 나는 약혼을 제안하는 것이야."

지금 바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상황상 불가능한 일.

가정의 수호자도 이 부분은 감안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한 것은 향후 가정을 이루겠다는 구속력 있는 약속. 바로 약혼이다.

"무언가 계산이 들어가 있는 제안이십니까?"

"어느 정도는."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신주아의 전용 특성상 그걸 모를 거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역시 쿨하다.

"만약, 아무런 계산이 없었다면?"

"그랬으면 거절했을 겁니다."

"그렇군."

"약혼녀 입장에서 반지 하나 정도는 받아야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럼 점프하십시오!"

파아아악!

베라드의 발길질에 헤일의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온몸에는 활력이 충만하다.

나와 베라드를 제약하고 있던 모든 디버프가 사라진 것.

[가정의 수호자가 두 사람의 진심을 확인하였습니다.]

[호감도로 인한 디버프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감히 인간 따위가!!"

헤일이 거친 호흡 소리를 내며 마지막 발악을 하려 한다.

지이이잉!

나는 성검에 마나를 한껏 불어 넣었다.

베라드의 광선검은 성검과 동기화 되며 무영추혼검의 절기를 펼쳐 내기 시작했다.

콰아악!

표독스러운 쌍 뱀의 몸뚱이가 절단되자 헤일은 비명을 내지른다.

이제는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도 릴디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제 두 친구는 베라드 안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 * *

헤일의 마나하트까지 흡수하고 나니, 베라드의 마나 출력은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거기에 나를 제약하고 있던 디버프마저 사라져 버리니 그동안 달고 다니던 모래주머니를 벗어 던진 느낌.

이 팔레네 섬에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기가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해졌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 거 같군."

여전히 우린 기가스를 사냥해야만 한다.

39층 세계관의 끝판왕인 티폰은 고작 현재의 베라드로는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일 테니까.

하지만 기가스는 우리의 의지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들.

그들의 영역으로 초대를 받아야 하기에, 이제부터가 중요해졌다.

기가스를 너무 쉽게 압도해 버리면, 기가스는 겁을 먹고 더 이상 우리를 초대하지 않을 테니까.

"로렌은 아직인가 봅니다."

"새끼 기가스라고 해도 마냥 쉽지만은 않지. 그래도 녀석이라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분명 로렌도 큰 성장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일단 우리는 베라드를 키우는 데에만 집중하면 될 것이다.

다행히 팔레네 섬의 기가스들은 여전히 나에 대한 강렬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다.

[기가스 루드네가 당신을 만나고자 합니다.]

[기가스 랴샬이 당신을 만나고자 합니다.]

.

.

.

[기가스 로인이 당신을 만나고자 합니다.]

기가스들의 동족애는 실로 대단하다.

"자, 그럼 이제 다음 차례는 루드네."

이름만 가지고는 기가스의 수준을 짐작할 수 없기에 차례대로 공략해 나갈 생각이다.

내가 루드네의 이름을 부르자 또다시 우리는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전이되어 버린다.

"크아아아앙!"

거대한 울부짖음.

이번에는 남성성이 폭발하는 기가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풍성한 가슴 털에 터져 나갈 듯한 근육들.

심지어 기가스의 다리를 구성하는 뱀의 몸통에도 우람한 근육이 느껴질 정도다.

"방금 상대한 헤일은 물론이고 릴디보다도 약해 보입니다."

"아쉽긴 하네. 한층 강해진 베라드의 진정한 성능을 시험해 볼 수 없으니."

"그럼, 이번엔 제가 베라드를 조종해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은 방법이다.

어차피 내가 전력을 다해 싸우기에는 너무 약한 상대.

이후에도 기가스들의 초대를 계속 받기 위해선 적당히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있으니, 신주아가 메인 파일럿이 된다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그럼 난 잠시 베라드에서 내려 볼까 해."

"지금 약혼녀를 두고 떠나시는 겁니까?"

"무슨 그런 무서운 얘기를. 기간트의 바깥에선 테이아의 날개와 홍염의 불도깨비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니 널 엄호하는 데에도 유리할 거야. 혼자서도 할 수 있지?"

"농담이었습니다. 물론입니다."

내가 베라드에서 내리자마자 신주아는 곧바로 양날도끼를 소환해 낸다.

밖에서 바라보는 베라드는 야만전사가 된 듯한 느낌.

나는 테이아의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한 손에는 언제든 기가스를 요격할 수 있는 홍염의 불도깨비를 대기시켰다.

콰아아앙!

신주아의 선공으로 드디어 시작된 교전.

오랜만에 그녀의 시원한 도끼질을 보게 된다.

* * *

베라드는 마나를 쭉쭉 빨아들이며, 점점 사기캐가 되어 간다.

릴디. 헤일에 이어 루드네까지. 무려 세 기가스의 마나하트가 베라드 안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라드의 성장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두 도과하였을 땐, 분명 티폰과도 해 볼 만한 수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수고했어. 신주아."

"사실 마지막 순간엔 위험했습니다. 당신의 엄호를 믿고 과감하게 돌진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단 한 발도 쏘지 않았어. 이 정도로 잘해 낼 줄은 몰랐는데."

"당신의 약혼녀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여기."

"이게 뭡니까?"

"약혼반지 정도는 받아야겠다며?"

내가 신주아에게 내민 것은 주노의 반지.

방금 상점창에서 구입한 따끈따끈한 아이템이다.

순금도 아니며 다이아가 박혀있지도 않지만, 위기의 순간에 랜덤으로 권능을 1회 발휘해 주는 깨나 값비싼 물건이다.

"끼워 주시면 더 좋을 거 같은데 말입니다."

"내가?"

그때였다.

[가정의 수호자가 두 사람에게 일정량의 버프를 선물합니다.]

[버프 지수: 2.45]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소득.

반지 하나 끼워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 28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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