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기간트가 아주 멋지군요."
마차에서 내린 여덟 명의 남자들.
녀석들은 은은한 살기를 내비치며 베라드를 품평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옆에 세워진 제냔은 찬밥 신세.
로렌은 말없이 빈정 상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저희들도 모두 기간트 기사들이랍니다.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말입니다."
무리의 중앙에 선 콧수염 녀석이 말하자, 나머지는 모두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존댓말을 하고는 있지만, 이들이 풍기는 기분 나쁜 기운은 건달패를 연상시킨다.
‘정식 기사일 리가 없지.’
등록된 정식 기사는 운신에 제약이 따르기 마련.
기간트 킬 같은 빌런 짓을 대놓고 하긴 어렵다.
이들의 행색도 그렇고, 로렌 역시 이들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거로 보아 지하 세계에서 노는 놈들일 공산이 크다.
"역시, 기사님들이셨군요. 여기 여덟 분은 다들 같은 소속이십니까?"
"네. 일루미 기사단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군요."
콧수염 녀석이 대놓고 신분을 밝히자, 다들 낄낄거리며 나의 반응을 살핀다.
기간트 킬러 조직 일루미.
아직 그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놀 지방에선 악명 정도는 알려져 있기에 내가 들어 봤을 거라 여기고 있는 것.
나를 겁주며 노골적으로 농락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일루미라…….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기사라서 말입니다."
일단은 태연하게 시치미를 떼어 봤다.
로렌 녀석도 눈치껏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털보 녀석은 의심스러운 눈치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 잘 모르시다니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저희가 유명해지려면 좀 더 분발하는 수밖에요."
물론 그 분발은 이제 곧 하려는 것일 터.
녀석들은 우리를 향해 거리를 좁히며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녀석들에게 길을 내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이제 가시던 길, 마저 가시지요."
나는 손짓으로 이들이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당연히 그냥 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구차한 핑계를 대려는지, 혹은 노골적인 살기를 보여 준다 해도 그 또한 재밌을 거 같단 생각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희가 어찌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그럼 여기서 무얼 더 하시려고."
"보아하니 두 분께선 이곳에서 수련 중이신 모양인데, 저희가 잠시 상대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핑계가 나쁘진 않다.
콧수염 녀석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본인의 기간트를 소환해 버렸다.
그 이후 차례대로 소환되는 7대의 기간트는 착착착착 우리의 주위를 둘러싼다.
마치 나에겐 선택의 권한 따위는 없다는 것처럼.
"저희들의 기간트는 어떠십니까? 당신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멋지지 않습니까?"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이런 노골적인 분위기에도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저희의 기간트는 둘뿐이니, 2 대 2도 괜찮으십니까?"
녀석들은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실실대기 시작했다.
"좋아요. 2 대 2의 대결. 아주 흥미롭습니다."
콧수염의 손짓에 8명의 일루미 녀석들은 모두 기간트에 탑승을 하며, 몸을 풀기 시작한다.
베라드가 포식할 생각을 하니 내 배가 다 불러 오는 것 같다.
* * *
저쪽에선 콧수염이 먼저 나섰다.
확실히 녀석이 리더는 리더다.
나머지 일곱 대의 기간트보다는 녀석의 것이 훨씬 더 큰 기운을 풍기고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 콧수염 녀석은 내가 맡고, 조무래기는 로렌에게 넘겼다.
휘이익!
휘이이익!
녀석의 주먹은 연신 허공만을 가른다.
베라드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콧수염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휘이이익!
이번에도 콧수염의 펀치는 베라드의 콧잔등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위험했습니다."
신주아의 짤막한 한마디.
물론 그녀의 말투에서 걱정스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베라드 코가 주저앉았겠지."
만약 밖에서 이 싸움을 지켜본다면 상당히 위태위태한 느낌을 줄 터.
하지만 내가 의도한 연출이다.
여기서 내가 콧수염을 단번에 줘 패 버린다면, 나머지 녀석들은 감히 기간트 킬을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자신들의 기간트들을 역소환해 버릴 테니까.
그것은 나의 포식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는 일이다.
휘이이익!
콧수염의 펀치는 또다시 베라드의 얼굴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다.
"보나 마나 기간트 안에서 욕하고 있겠군."
"이렇게 절묘하게 안 맞는 것도 대단한 기술이지 말입니다."
"슬슬 빡이 돌고 있을 테고, 이제 곧 본색을 드러내겠지. 로렌도 생각보다 잘해 주고 있으니까 말이야."
콰아앙!
그 순간 로렌의 제냔은 상대 기간트의 한쪽 손목을 낚아채며 다른 한 손으로는 반대쪽 어깨를 제압한 뒤,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 장면은 내가 로렌을 상대한 방식을 그대로 재현한 것.
"허풍은 아닌가 봅니다. 어디 나가서 빠지는 실력은 아니라고 한 거 말입니다."
"기간트의 스펙이 떨어지니 오히려 전투 센스가 발휘되는 타입이군."
어쨌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 상황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는 의미니까.
"뒤에 이어지는 동작도 그때 그대롭니다!"
로렌은 상대의 한쪽 팔을 완전히 제압한 채 등위로 올라탄다.
여기서 힘을 주어 돌려 버리면 그대로 한쪽 팔은 박살이 나 버릴 터.
하지만 로렌은 이 상태를 유지하며, 나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
휘이이익!
그 순간, 로렌 쪽에 시선을 돌리고 있는 베라드를 향해 콧수염의 주먹이 또다시 맹렬히 날아온다.
내가 고개를 까딱 돌리자, 기간트의 거대한 주먹이 베라드의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로렌 역시 상대를 완벽한 자세로 눌러 놓고 있었으니, 콧수염으로선 뚜껑이 열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모두 내 예상대로였다.
콧수염의 신호에 따라 나머지 여섯 척의 기간트는 우리를 향해 동시에 돌진을 하였고, 나 역시 로렌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빠아아악!
기간트의 팔이 그대로 꺾여 돌아가며 터져 버린다.
팔이 거칠게 절단된 곳에서는 마나의 증기가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걸 보니, 기간트의 수명은 그것으로 종료.
로렌의 제냔은 서둘러 상대의 마나하트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꼬리만 없다뿐이지 완전 인조인간 셀이나 다름없다.
퍼어어억!
그 순간, 베라드의 주먹은 콧수염이 타고 있는 기간트의 복부를 그대로 꿰뚫어 버린다.
이렇게 한 방 컷으로 갈 녀석까지는 아닌데, 흥분한 나머지 너무 성급하게 들어온 것.
내가 한눈을 파는 모습이 거슬리긴 거슬렸나 보다.
덕분에 나머지 녀석들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빠아아아악!
로렌 녀석은 관절기에 재미가 들린 것인지, 또다시 상대 기간트의 팔을 비틀어 버리며 끝내 버린다.
살벌한 녀석.
* * *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퀘스트 완료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물론 그것이 특별히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끔찍한 페널티를 피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39층의 퀘스트는 상당히 가혹한 면이 있다.
실패할 경우 직접 사망으로 몰지는 않으나, 능력치 자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사실, 탑에서는 이것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탑에서 능력을 잃는다는 건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이며, 희망을 상실하는 일이기에.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퀘스트는 곧바로 생성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스타일이 다르다.
[티폰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당신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거절할 경우 다른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티폰: 39층에만 존재하는 거대 괴수로, 향후 30층 이내에 이보다 강한 괴수는 등장하지 않음.
나에게만 제시된 퀘스트인지 아니면 공통의 퀘스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메시지 창 아래에 달려 있는 주석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70층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이보다 강한 괴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구를 표시해 놓은 저의가 궁금해졌다.
이는 사실상 도전하지 말라는 의미니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왜? 내가 만약 도전이라도 한다고 하면 따르려고?"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런 복안도 없이 도전하겠다고 하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신주아의 성격상 두말은 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내 선택에 맡기겠다는 의미.
"정말, 날 그 정도로 믿는다고?"
"저 자신을 믿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도전을 해야 할 메리트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보상도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이 도전을 거부했을 때의 페널티 역시 밝혀 두고 있지 않다.
주석으로 달려 있는 문구는 마치 도전의 포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십중팔구, 아니 백이면 구십구 이상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만 도사리고 있는 이곳에 갈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신주아의 눈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정할 수 있었다.
"도전한다."
[당신의 파티는 티폰에 도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내 선택에도 그녀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유를 안 물어보네."
"이유를 묻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신 겁니까?"
내게 이유를 묻지 않겠다는 의미.
신주아의 이런 눈빛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 마음을 들켜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녀가 다 알고 있을 리는 없다.
예언가의 직감은 불완전한 구석이 많으니까.
사실 신주아에게 나의 모든 계획을 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런 그녀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의 일부를 나누고도 싶었다.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 도전하겠다는 건, 최근 고민하고 있던 문제에 결심이 선 게 아닐까 하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탑의 최종층.’
성검으로 포털을 열어, 이제 곧 최종층에 도전해 보려 한다.
사실 그 시기를 놓고 고민해 왔다.
아직 나의 무영추혼검은 완벽하지 않으며, 마나수의 열매를 통해 얻은 마나의 기운 또한 완벽하게는 흡수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하지만 이제 곧 열리게 될 40층 피의 날은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로선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차 피의 날은 현재 생존 중인 인류의 96퍼센트가 또 사라져 버리는 날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
그래서 티폰에 대한 도전은 좋은 모의고사인 셈이다.
과연 내가 탑의 최종층에 도전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
거기에 한 가지 더 기대하는 바가 있다.
거대한 적들을 상대한 뒤에는 늘 도약이 있었다는 점이다.
부디 39층의 마지막 순간에 상대하게 될 티폰이 나의 도약을 이끌어 내 줄 상대이길 바랄 뿐이다.
"야! 그런데 너희 둘!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길래 표정이 그렇게 심각한 거야? 나도 좀 같이하자고!"
로렌 녀석이 투덜거린다.
탑의 수많은 차원에 존재하는 수많은 엑스트라 중 하나인 주제에.
그래도 이 녀석, 나름 아주 중요한 순간에 나와 함께하는 셈이다.
- 28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