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너 역시 엄청난 금수저였군."
프란 가문의 3공자 로렌 프란. 사실 금수저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대단한 가문의 자식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지놀 지방의 비옥한 토지 대부분이 프란 가문의 소유였으며, 가문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대상단 또한 나날이 번성 중.
알고 보니 이 녀석은 39층 세계관 전체에서도 몇 손가락 내에 꼽히는 재벌 가문 출신이었던 것이다.
"혹시 나를 인질로 잡아 돈을 뜯어낼 생각이라면 넣어 두는 것이 좋을 거다. 우리 가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이놈이 사람을 뭘로 보고."
"다짜고짜 나의 소중한 기간트를 부숴 버린 파렴치범인 건 알고 있지."
이 부분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퀘스트였다고 설명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까 네가 말한 기간트 킬러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고 싶은데."
"기간트 킬러? 너잖아. 병신같이 내 마나하트가 소멸할 때까지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던 게 이상하긴 했지만."
그 점은 아쉽긴 하다.
기왕 공기 중으로 날려 보낼 바엔 베라드에게 먹이는 편이 나았을 테니까.
"그 얘긴 됐고, 조직적으로 빌런 짓 하는 놈들 없어? 아무리 제국법으로 기간트 킬을 금지했다고 해도, 인간이란 게 그렇게 선하지만은 않잖아?"
"흠……."
로렌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역시 나에 대한 의심쩍은 마음을 다 버리진 못했기 때문일 터.
녀석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일루미. 라고 부르더군. 감히 나의 지놀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다고 하는데, 사실 아직은 실체가 밝혀지진 않았다."
"일루미라……."
퀘스트창에 떡 하니 제시되어 있는 섬멸 타깃.
나는 로렌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때? 나와 함께 그놈들을 처단하는 게."
"미친놈."
"너에겐 다시 없을 기회가 될 거야. 어차피 넌 이제부터 기간트를 다시 키워야 하는데, 일루미 그놈들은 좋은 먹잇감이잖아?"
"……."
로렌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 정도면 팔부능선은 넘은 셈.
"그리고 너, 가문에서 입장이 난처하지 않겠어? 다시 기간트를 걸음마부터 시켜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말이야."
"망할 자식!"
"너에게는 여분의 마나하트가 있다고 했지? 바로 가자."
"어딜 말이냐!"
"어디겠냐? 기간트 생성하러 가야지."
로렌 프란. 비록 나로 인해 잘 키워 오던 기간트를 잃었지만, 운이 좋은 놈이다.
사흘 내에는 기존의 것 그 이상을 갖게 될 테니까.
* * *
"골라 봐. 네 마음에 드는 놈으로."
광장에는 여러 기갑병 동상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중에 유난히 내 마음에 드는 놈이 하나 있다.
포스가 살짝 떨어지긴 하지만 베라드와 마찬가지로 건담 스타일의 기갑병.
로렌의 마음에도 들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흠……."
녀석은 캡슐에서 마나하트를 꺼내 놓았다.
내가 기가스 릴디를 죽이면서 획득한 것보다는 훨씬 작은 크기.
하지만 이조차도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한다.
마나하트를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로렌 녀석이 비정상인 것.
"좀 서둘러 줬으면 좋겠군. 내가 그리 느긋한 성격은 아니라."
퀘스트의 제한 시간은 단 3일이다.
조직 하나의 소재를 파악하고 섬멸하는 데까지는 촉박한 시간.
"마나하트의 크기 때문에 고민이 길어지는 것이다. 이걸로는 괜찮은 껍데기를 획득할 확률이 너무 낮으니까."
"그럼, 이거 어때?"
아까 전에 내가 눈여겨봐 둔 놈을 제안했다.
이름은 제냔.
녀석은 제냔을 쓰윽 훑어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 마나하트로는 무리다! 하나 남은 이것마저 터져 버리면……."
"그래도 마음에는 드는 모양이군. 돈 많다면서 고민할 거 뭐 있어? 언젠간 매물은 또 나올 텐데."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터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퀘스트를 위해서 니케의 반지가 확률을 크게 보정해 줄 테니까.
나는 옆에서 계속 푸시를 넣었다.
"젠장. 한다! 해!"
역시 금수저가 이런 면은 좋다.
실패의 위험에 부담을 갖는 수준이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것.
로렌은 손에 들고 있던 조그마한 마나하트를 제냔의 가슴에 가져다 댄다.
파바바밧!
로렌, 이 녀석의 인생에서 최고의 행운을 꼽자면 첫째가 프란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다음이 나를 만난 일이 될 것이다.
파바바밧!
마나하트는 터지지 않은 채 제냔과의 밀당을 이어 가는 모습.
치이이익!
결국 둘은 서로를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이, 이게 된다고?"
"뭘 그리 놀라. 앞으로 놀랄 일들이 얼마나 더 많은데."
로렌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저 어린아이처럼 좋아할 뿐이었다.
* * *
내가 찾고 있는 일루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소문으로만 거론되고 있을 뿐 본거지가 어디인지, 어떤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심지어 정말로 실체가 존재하는 조직인지에 대해서도 뚜렷한 정보가 없었다.
"의심 가는 기간트 기사는 전혀 없어? 이를테면 갑작스럽게 특정 기사의 기간트가 급격히 강해졌다거나."
"몇몇 후보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단정 지을 수 없다. 다들 열심히 사냥에 다니는 기사들이니까."
로렌은 대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새로 얻은 제냔 쪽만 바라보고 있다.
그쪽에 완전히 정신이 가 있는 모습.
신주아는 내게 나지막이 말하였다.
"탑은 우리에게 단 3일의 시간만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 사실 나도 그게 의아해. 탑이 아무리 막무가내라 해도 너무 빠듯한 시간이니까."
"일루미 쪽에서 사흘 내에 움직임이 있을 공산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그 움직임을 바로 잡아낼 수만 있다면……."
"아니. 그 전에 우리가 미끼를 놓고, 그 움직임이 우리 쪽으로 오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겠지."
"무슨 묘수라도 있으십니까?"
"묘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
그 순간 로렌은 우릴 보며 궁시렁 거린다.
"도대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야?"
"로렌,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일루미를 잡기 위한 미끼를 좀 던져 볼까 하는데."
"성격 한번 더럽게 급하군. 뭔데?"
"너, 사람 모을 수 있지? 급하게 소문을 좀 내줘야겠어."
마침, 소문을 낼 소스를 하나 가지고 있다.
내가 기간트 기사 등록 시 마나 출력 및 동작 속도 두 부문에서 모두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것을 이용할 생각이다.
내 요청에 따라 공식적인 공표는 없었어도 이 이야기는 빠르게 퍼져 나갔을 테니,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대놓고 소문낼 생각이다.
여기에 두 가지 구체적인 정보를 추가로 뿌릴 것이다.
하나는, 내가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역대급으로 비싼 마나하트 때문이라는 것.
그다음으로는, 내가 아직 기간트 조종이 미숙하여 지놀 지방의 평원에서 홀로 개인 수련을 하고 있다는 것.
"소문의 그 주인공을 사칭하겠다는 거잖아. 그러다가 당사자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려고."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그 당사자니까."
"……뭐?"
"내 기록에 대한 소문만 있고 정작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없나 봐?"
하긴, 내가 기사 등록을 한 건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게 너였다고?"
"소문이나 잘 내 봐. 기사의 기량은 아주 형편없는데, 기간트빨로 기록을 세웠다는 걸 강조하면서."
나와 신주아의 예상대로 일루미 녀석들이 3일 내에 큰 움직임을 보일 운명이라면, 내 소문에 즉각 반응을 할 공산이 크다.
어차피 엎어지면 코 닿을 지놀 지방에 함께 있으니, 역대급의 마나하트를 가진 기간트를 그냥 지나치긴 힘들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 녀석들이 미끼를 물까? 괜히 엄한 놈들만 꼬일 거 같은데!"
"아주 높은 확률로 반응이 올 거니까 날 믿어. 네가 제냔을 선택했을 때처럼."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 눈빛이다.
* * *
지놀 평원.
우리는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스파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내 상대는 제냔에 탑승 중인 로렌.
휘이이잉!
녀석의 주먹이 뻗어 온다.
나는 가볍게 피한 후 녀석의 한쪽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배후로 들어가 녀석의 반대쪽 어깨를 제압한 후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꽈당!
우리의 첫 대면과 정확히 같은 장면이 반복된 것.
내가 녀석의 등 위로 올라타 꺾은 팔에 힘을 주자마자, 녀석은 제냔에서 황급히 뛰쳐나온다.
"이 미친놈아!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제냔을 풀어 준 뒤 나도 바로 베라드에서 내렸다.
"학습 효과가 없군."
"뭐?"
"나는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대응을 해 줬을 뿐인데, 너도 똑같이 당해 버리면 뭘 어쩌자는 거지?"
"그, 그건! 너무 당황했으니까."
"내가 아닌 일루미 녀석들이었다면 그대로 제냔의 팔을 비틀어 버렸을 거야. 당황의 대가가 또 기간트 하나를 날려 버리는 것이지."
"날 우습게 보지 마라! 일대일에서는 쉽게 당하지 않으니까."
라고 말하는 녀석의 표정엔 민망함이 살짝 묻어난다.
"그런데 이호영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이런 실력을 가지고 그동안 잠잠했다고?"
"기간트빨이야."
"아니! 처음엔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순전히 기간트빨이라는 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맥없이 당해서 그렇지, 나도 어디 나가서는 절대 빠지는 기사가 아니란 말이다!"
로렌 녀석, 많이 억울해 보인다.
"증명해 봐. 일루미 놈들이 미끼를 물고 이쪽으로 오게 된다면 말이야."
일루미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렌도 기간트를 성장시킬 수 있도록 일부는 넘겨줄 생각이다.
물론 가장 탐스러운 마나하트는 베라드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겠지만.
"그런데 어떻게 넌 그놈들이 올 거라 확신하고 있지? 심지어 요즘엔 일루미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조차 없는데."
소문을 낸 지는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퀘스트의 제한 시간까지는 이틀.
오늘 혹은 늦어도 내일까지는 반응이 와야만 한다.
우리가 직접 일루미의 움직임을 쫓기에는 시간의 압박이 너무 크니까.
그때였다.
저 멀리 평원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네 대의 마차.
우연히 이곳을 통과하는 행인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절대감각이 그건 아니라 말하고 있다.
마나의 기운이 느껴진다.
거기에 은은하게 풍겨져 오는 적의와 살기.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로렌. 이제 손님 맞을 준비를 하자."
일루미 녀석들. 빠릿빠릿하게 반응해 주는 것 하나는 아주 마음에 든다.
내일까지 시간을 더 끌었더라면 아주 초조해질 뻔했으니 말이다.
"저게 일루미라고?"
우리와 마차와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그리고 예상대로 우리의 앞에서 멈춰서는 4대의 마차. 그 곳에서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호오! 기간트 기사이신가 봅니다?"
평원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두 대의 기간트. 베라드와 제냔.
녀석은 그 모습을 보고 만족하는 표정을 짓는다.
"통행에 방해가 됐나 보군요. 다시 역소환해 드리죠."
"아닙니다. 사실은 저희들도……."
"기간트 기사라는 거죠?"
마차 네 대에 두 명씩, 총 여덟 명.
아직 녀석들의 기간트를 보진 못했지만, 로렌이 제 몫만 해 준다면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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