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기간트 기사 등록 이후, 퀘스트의 공백은 무려 하루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시간을 마냥 빈둥빈둥 보내지만은 않았다.
향후 퀘스트의 내용은 분명 기간트와 관련되어 있을 터.
나와 신주아는 차례로 베라드를 조종하며 이 새로운 문물에 적응하고 있었다.
"요놈 참 탐나네. 39층을 끝내고 나서도 가져갈 수 있을까?"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기간트는 나의 전력을 대략 2배 가까이 올려 주는 물건이었기에.
"갑자기 억울해지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왜?"
"베라드는 하나뿐이고, 우리는 둘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직감으로는 당신이 혼자 홀라당 먹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부인할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베라드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직 정산해야 할 채무가 남아 있다는 걸 말입니다."
"안 떼먹을게. 지금도 따박따박 상환하고 있잖아."
"따박따박 말고 채무를 한 방에 정산할 좋은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설마 39층 이후 베라드의 소유권을 너에게 넘기라고?"
"그렇습니다. 단, 제가 위험 부담도 감수하겠습니다. 만약 39층 이후 기간트를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손해는 오롯이 제가 지는 것으로 말입니다."
솔깃한 제안이긴 하지만 결국 거절했다.
남들이 기간트를 타고 다닐 때, 나 혼자만 맨몸인 상황이 벌어진다면 벼락거지가 되는 셈이니까.
"나중에라도 생각 바뀌면 알려 주십시오. 39층이 종료되기 전이라면 언제든지 유효한 제안입니다."
"됐어."
그 순간이었다.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루 동안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는데, 이제는 다시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
[지놀 지방에 키클롭스가 출현하였습니다.]
[기간트를 통해 키클롭스를 격퇴하십시오.]
[실패 시: 마나 15% 감소]
"지놀 지방이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으로 기억합니다."
하긴, 퀘스트의 효율을 따진다면 굳이 우리의 이동 시간을 길게 만들 이유는 없다.
"어쨌든 서두르자.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알 수 없으니."
퀘스트에 실패했을 경우, 페널티가 어마어마하니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 * *
파바바바!
지휘관의 신호에 맞춰 불화살이 쏘아져 나간다.
수백의 불덩이가 향하는 타깃은 단 한 곳.
"크아아아아아!"
거대한 괴성의 진원지.
바로 외눈박이의 거대 괴물 키클롭스였다.
"쉬지 말고 발사하라!!!"
활시위 당기는 소리와 함께 하늘은 붉은 소나기로 물들며, 병사들의 함성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함성 속에서 전진하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며 끊임없이 활을 쏘아 댈 뿐.
한곳으로 모이는 불꽃들의 향연들도 이내 사그라졌다.
"크아아아아!"
그저 괴수를 더욱 성나게만 만들었을 뿐,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키클롭스가 성큼성큼 걸음을 걷기 시작하자, 병사들은 움찔하기 시작한다.
이때 지휘관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물러서며 발사하라!"
대치 중인 상황에서 물러서라니, 정말로 병사들은 키클롭스의 걸음에 맞춰 한 발 한 발 뒷걸음을 치기 시작한다.
애초에 키클롭스를 쓰러뜨릴 의도는 없었던 것.
그저 화살을 날리며 견제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 효과적인 견제처럼 보이진 않지만.
"키클롭스 말이야, 상당히 강해 보이네."
신주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팔레네 섬에서 상대한 기가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순간, 기가스 릴디의 기괴한 모습이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 비호감 괴수는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
"이런 병사들이라면 천 명이 모여도 힘들겠어."
"어차피 기간트 기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용도일 테니 말입니다."
우리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아직 키클롭스의 움직임이 크지 않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마치 본 게임은 시작도 하지 않은 것처럼.
파바바바바-
그 후로도 십여 분.
불화살의 세례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언제까지 이 상황은 계속될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몽둥이를 든 키클롭스는 서서히 반격을 위해 몸을 풀고 있었으니까.
지이이잉-
그리고 그 순간 공간이 찢어지며, 키클롭스가 둘이나 더 추가된다.
"발사!!"
지휘관의 다급한 외침.
하지만 병사들은 바로 반응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뭐, 뭐야!"
"갑자기 둘이나 더?"
병사들은 급격하게 동요했다.
하나도 버거운데 적의 전력이 순식간에 세 배가 되었다는 건 그야말로 절망.
잠시 후 또 의미 없는 불화살이 쏟아진다.
병사들의 발걸음은 이미 분주하게 뒤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
키클롭스가 셋이나 되는 건 많이 부담스럽지만, 이미 주어진 퀘스트이니 도로 무를 수는 없다.
"소환!"
나의 주문에 베라드는 공간을 찢고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 기간트!"
"드디어 기간트 기사가 합류했다!"
합류라니, 말은 바로 해야지.
키클롭스 토벌은 나의 단독 임무일 뿐이다.
* * *
저 세 마리의 외눈박이는 예상보다 강한 괴수들이었다.
티탄의 제왕도 그렇고, 기가스 릴디도 그렇고 39층 세계관의 살벌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괴수 주제에 삼각형 대형을 이루어 나를 압박하는 모습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파아앗!
파아아앗!
나는 키클롭스들의 몽둥이를 막아 내며, 녀석들이 만들어 낸 대형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아쉽네. 베라드에 탑승해서는 테이아의 날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으면, 너무 사기니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총 역시 사용이 불가하다는 점이다.
둘 중 한 가지만 되었어도 키클롭스와의 상성상 좋았을 것을.
그래도 베라드는 성검의 특징만큼은 절묘하게 광선검으로 구현해 놓았다.
휘잉!
키클롭스의 몽둥이 하나가 광선검에 그대로 잘려 나간다.
교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호감도의 디버프로 베라드의 능력이 일시적으로 하락합니다.]
[디버프 지수: 3.75]
드디어 39층의 군주 바람의 군왕이 농간질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신주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아니, 도대체 호감도가 얼마이시기에!"
"호감도가 내 잘못은 아니잖아."
하지만 내 잘못인 것만 같은 느낌.
베라드에 함께 탑승 중인 신주아만 아니었다면 디버프의 위력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높은 호감도가 어느 정도는 중화를 시켜 주었을 터.
나는 베라드를 조종하며 그대로 키클롭스 중 한 마리를 몰아붙였다.
캉!
광선검이 키클롭스의 단단한 몸통 가죽을 찌르며 마나의 파장이 튄다.
곧바로 등 뒤에서는 살기를 띤 채 달려드는 두 마리의 기운이 엄습해 온다.
스으으윽!
몸을 돌리며 수평으로 광선검을 길게 베자 녀석들의 신음성이 울려 퍼졌다.
잘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치명상은 아니다.
디버프만 아니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을.
휘이이잉!
그 순간, 정면에 있던 키클롭스의 거대한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역시 3 대 1은 정신이 없다.
몸을 구르며, 간신히 녀석의 공격을 피해 냈다.
호흡이 가빠 온다.
"제가 잠시 메인 조종을 하겠습니다!"
"신주아, 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키클롭스가 쉽지 않아."
"그래서 제가 ‘잠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녀기 메인이 되자마자, 놀라운 메시지가 전송된다.
[호감도의 버프가 작용합니다.]
[베라드에 둘러싸인 디버프가 해제되었습니다.]
[버프 지수: 0.14]
"이게 된다고? 그런데 다시 내가 메인이 되면……."
"그래도 실험해 볼 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휘이이잉!
아슬아슬하게 키클롭스의 공격을 피하며 메인은 또다시 내가 되었다.
[디버프 지수: 3.48]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였다.
처음보다 디버프 지수가 근소하게 낮아졌으니까.
‘일관성이 없군.’ 다시 한번 시도했을 때 더 좋은 결과가 있을 수도,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단 의미.
"일단 한 마리 해치우고 여유가 생기면, 좀 더 실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감이야."
아까 몽둥이 잘린 그놈. 그 한 놈부터 조져 볼 생각이다.
* * *
지놀 지방의 중심 마을.
소문은 아주 빠르게 도는 중이었다.
키클롭스가 세 마리나 등장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어느 한 기간트 기사가 나타나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
"심지어 그 기간트 기사는 정식으로 출동시킨 기사도 아니라던데?"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일곱 명의 기간트 기사는 그냥 돌아갔다고 하더라고."
주점에서는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다.
나와 신주아는 오랜만에 서로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받으시지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 밤은 아무런 퀘스트 걱정 없이 평화롭게 지나갈지도 모른다.
"나중에 또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있을까?"
"무슨 의미십니까?"
"아니 별건 아니고, 탑을 등반하다 보면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거잖아."
"……혹시 무언가 결심을 굳혀 가고 계신 겁니까?"
"역시 넌 못 속이겠군. 더는 이야기하지 말아야겠어. 술도 마셨겠다 다 털어놔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야."
성검으로 포털을 열게 된 순간부터 싹을 틔워 온 생각들이 이제 꽃을 피울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탑의 최종층. 그것을 현시점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으니까.
"제 생각에 당신은 아마도……."
"그만! 아무 얘기도 하지 마. 나 스스로도 아직 모르니까."
"사실 저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저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예언가의 은유를 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네, 알겠습니다. 퀘스트를 끝낸 날이기도 하니, 오늘은 마음 편히 술잔만 따르겠습니다."
또르르.
술잔이 채워진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잔을 비워 갔다.
탑의 여정을 반추하다 보니 감성이 충만해진다.
시끌벅적한 공간 속에 시간이 정지한 느낌.
빌어먹을 탑. 이라는 말만이 입가에 맴돌았다.
신주아도 더 이상은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 그녀만의 감상에 젖어드는 모양이다.
오늘 밤은 퀘스트 걱정 없이, 그냥 이렇게 술만 마시다 진탕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이 밤중에 갑자기.
역시 빌어먹을 탑이 틀림없었다.
콰아아아앙!
그 순간, 주점의 반대편 구석에서는 테이블이 뽀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곳에서 일어난 금발 남자의 오른쪽 주먹에는 여전히 마나의 잔상이 남아 있다.
[이 주점에는 오늘 키클롭스 건으로 출동한 기간트 기사 중 한 명이 있습니다.]
[그의 기간트를 파괴하십시오.]
[남은 시간: 2시간]
[실패 시: 마나 30% 감소]
이 빌어먹을 탑은 별걸 다 시킨다.
- 27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