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운 좋게도 장제훈은 말이 많은 녀석이다.
적당히 리액션만 해 주면 혼자 다 떠드는 스타일이기에,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으면 그만.
이 녀석은 지금 내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 8 층탑의 존재 이유는 비정상적으로 강한 일반 플레이어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는 거잖아?"
"……어, 그렇지."
당연히 몰랐던 사실이다.
다만 의구심 정도는 있었다.
현재 티탄의 8층 탑에 도전하는 4개의 파티는 이놈 말대로 비정상적으로 강하니까.
"솔직히 여기서 내가 빌빌댔던 것까지는 인정해! 7층까지 오는 동안 난 한층도 클리어하지 못했으니까."
"……."
"그래도 네가 7층을 다 먹었으니까 그럼 된 거 아니야? 어차피 둘 다 살성인데, 누가 먹든지 그게 뭐가 중요한데! 안 그래?"
"뭐, 나도 그렇다고 생각은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네 생각을 좀 더 들어 보고 싶군."
"내 생각엔 말이야, 이호영 너의 활약으로 우린 크게 성공을 했다고 생각해. 경합을 할 때마다 다들 너한테 지면서 스탯을 대폭 잃어버렸으니까. 그런데 탑은 이 정도는 만족을 못 하는 모양이야! 이번 8층에서 PK를 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어."
"내가 일반 플레이어한테 진 것도 아니고, 대살성한테 진 거잖아! 대살성! 심지어 마지막 경합에서는 너한테 협력을 하느라, 자발적으로 미션을 불이행했던 거고!"
"그래.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억울하다는 거야! 지금 티탄의 8층 탑을 진행하는 살성 중에 현재 내가 꼴찌라나 뭐라나!"
"……애석하군."
역시 이 8층 탑의 미션은 이곳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 탑 어디엔가는 비정상적으로 잘 성장한 플레이어들이 우리 말고도 더 있을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호영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말해 봐."
"마지막 8층을 공략하는 동안 하게 될 PK 말이야, 나에게도 하나는 넘겨줘."
"뭐?"
"너 혼자 전부 PK를 해 버리면, 나랑 정혜성은 살성의 권능을 대폭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둘 중 하나는 우리에게 양보해 달라는 것이다. 어차피 둘 다는 안 해 줄 테니."
"나를 보자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군."
"그래. 또 너 혼자 다 해 먹을까 봐! 지금 불안해 미칠 것 같으니까!"
이 탑에 살성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또 현재 얼마나 많은 곳에 티탄의 8층 탑이 세워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제훈의 실적이 현재 꼴찌라는 것은 주목해 볼 만하다.
지금 다른 곳에서는 살성이 활약을 하고 있다는 것.
‘이대로 가면 곧 있을 40층 피의 날이 장난 아니겠군.’
어쨌든 지금 이대로 두면 장제훈은 8층에서 PK를 시도하게 된다.
최현조 쪽에 덤볐다가는 도리어 역공을 맞아 변을 당할 테고, 유지훈 쪽이라면 확실히 승산은 있어 보인다.
"이호영! 네가 최현조를 맡아 줬으면 한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놈도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는 베스트는…… 장제훈과 장혜성이 살성의 권능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 난 그럴 뜻이 없어."
"이 치사한 자식! 나에게 빚이 있다고 말해 놓고서 그 정도도 못 해 준다고?"
"진정해라 장제훈. 이미 말했듯이 나는 너와 함께하길 원한다. 그래서 널 특별히 선택한 것이고."
그러면서 나는 장제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녀석은 한숨을 한번 내쉬며, 나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장제훈! 내가 어떤 제안을 하든 네가 따를 의향이 있는지부터 묻고 싶다."
"공정한 제안이라면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지!"
"내 제안은 아주 공정해."
"그러니까 그게 뭔데!"
녀석은 애 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 마. PK."
"뭐?"
"그냥 PK 하지 말고 8층이나 무사히 클리어하란 얘기야."
"이런 개자식! 결국 네가 최현조, 유지훈 둘 다 먹겠다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말했잖아. 내 제안은 공정할 거라고."
"설마, 그럼……."
"그래. 나 역시 PK를 하지 않겠다."
"미친 거 아니야? 아무리 네가 대살성이라 해도 탑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가는!"
"대살성은 특별하다."
"솔직히 거기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너랑 다르게 나는……."
"그리고 대살성의 선택을 받은 너도 특별할 것이다. 그건 내가 보증하도록 하지."
"뭐?"
"얘기는 여기까지다. 8층에서 PK는 없다."
이 녀석은 이미 스탯 하락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한번 믿었다.
그러니 여기서 태세 전환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
녀석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대답은 들어 볼 것도 없을 거 같다.
* * *
티탄의 8층 탑. 마지막 층의 콘셉트는 매우 심플했다.
동시에 날아오는 네 개의 창.
4개의 파티는 나란히 서서, 제왕이 던지는 창을 방어해 가며 한 발 한 발 이동해 나아가야만 했다.
그것이 이번 8층의 유일한 규칙.
현재 전면에 나선 4명은 나, 민지연, 최현조, 장제훈이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은 후위에 바짝 붙어 언제라도 전방의 동료를 위해 회복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사실 물어보는 것이 무의미하긴 합니다만."
신주아는 멋쩍은 말투로 등 뒤에서 내 안부를 묻는다.
"정 걱정되면 뒤에서 응원가라도 좀 불러 주든가."
"그랬다가는 정신만 혼란해지시지 말입니다. 이제부터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사실 8층을 시작하고 나서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파티는 전방과 후위를 수시로 교대하기에 바빴다.
그만큼 티탄의 제왕이 던지는 창의 위력은 상당했던 것.
경합 미션 때 멀찌감치 떨어져서 받아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도대체 이 망할 8층은 언제 끝나는 거야!"
"언제 날아올지 모를 창에 신경 쓰다가 미쳐 버릴 거 같아!"
다들 노이로제에 걸린 반응이었다.
이미 8층에서 서너 군데씩은 창에 박혀 봤기에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을 터.
벼락 맞은 느낌이라고들 하던데, 실제로 벼락을 맞아 보지도 않았으면서 한결같이 이 같은 표현을 하는 게 신기했다.
사실 나는 전혀 모르겠다.
아직 제왕의 창에 맞아 보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다들 다행히 치명상은 없었다.
제왕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창이 날아오는 곳은 어깨, 팔꿈치, 무릎, 발등처럼 치명적인 부위는 절묘하게 피해 갔기에.
"이번에는 왜 이렇게 안 날아와!"
"차라리 한 대 맞고 빨리 바꾸고 싶다!"
이들에게 자상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투창을 기다리는 것.
"시발! 때릴 거면 그냥 빨리 좀 때리라고!"
그때였다.
피융-
피융-
피융-
장제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네 자루의 창이 정확하게 우리 네 명을 향해 날아온다.
"허어업!"
"아악!"
"우우욱!"
3인 3색의 비명이 8층의 비좁은 통로에 울려 퍼진다.
보스 룸에 가까워질수록 투창의 위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날아오는 창을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 결과는 항상 둘 중 하나였다.
맞든가, 아니면 비껴 맞든가.
"시발! 아까 맞은 어깨에 또 맞았어!"
장제훈이 절규한다.
절대체력의 민지연은 피통빨로 버티는 중이었으며, 농부 최현조는 작물 템빨로, 장제훈은 그냥 욕을 하며 겨우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물론 나는 아주 평온했다.
나의 마나가 늘어난 만큼 방패의 내구도는 지수함수 형태로 급격하게 늘어나 있다.
비록 제왕의 투창이 엄청난 건 사실이지만, 아직 몇 번은 더 버텨 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보스 룸에 먼저 도착하게 되겠지만.
"아니, 왜 이호영만 멀쩡한 거냐고!"
다들 의문을 품는다.
나조차도 제왕의 투창을 완벽하게 쳐 내진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의문은 다른 곳에 있었다.
투창에서 느껴지는 제왕의 기운은 기존의 미션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
이런 제왕을 죽이는 것이 과연 8층의 메인 미션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여기서 교대! 난 더 이상 못 버텨!"
"조금 더 버텨 봐! 바꾼 지 얼마나 됐다고!"
물론 다른 파티는 그런 의문을 품을 여력조차 없다.
제왕의 창을 한 번 한 번 견뎌 내는 것이 미쳐 버리는 고통이긴 한가 보다.
티탄의 8층 탑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다들 주인공 포스를 풍기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나저나 8층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어차피 PK는 무리였을 것이다.
장제훈은 제왕의 창을 연달아 맞더니 거의 넋 나간 표정으로 후위에 빠져 있을 정도니까.
제아무리 치유 아이템으로 상처 회복을 한다 해도 정신적으로 입은 대미지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 * *
"보스 룸이다!"
"드디어 최종 관문이야!"
상당히 긴 여정이었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나머지 세 파티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길게 느껴졌을 터.
그래도 여기까지는 전원 생존이었다.
전방에 선 플레이어들은 자동적으로 몸이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다.
언제 저 보스 룸의 문이 열리고 창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기에.
"설마 티탄의 제왕에게 도전을 해야 하는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격을 하는 상대와 싸워야 한다고?"
마지막 순간이 되고 나서야 이들은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저 문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제왕의 존재감이 문틈 사이로 풀풀 새어 나온다.
지금 누구도 저 문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나 혼자 들어간다."
"이호영, 너 혼자 가겠다고?"
"따라온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럴 마음은 다들 없지 않나?"
정곡을 찔렸는지 다들 내 말에 움찔하는 모습.
하지만 겁낼 이유는 없다.
티탄의 8층 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경합이 메인이었으며, 막상 탑 자체는 대단한 위험을 선사한 적이 없으니까.
이번 8층이 고난이라면 고난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원 생존. 이 보스 룸 안에서 벌어질 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나는 홀로 보스 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덜컹-
내가 보스 룸의 문고리를 돌렸을 때에도,
저벅.
거대한 석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을 때에도,
쾅!
열고 들어온 보스 룸의 문이 폐쇄되며 나를 가두었을 때에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잠시 후 탑의 메시지만 전송되었을 뿐이었다.
[티탄의 8층 탑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마지막 층의 미션은 제왕의 창을 피해 이곳 보스 룸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던 셈.
이곳에서 티탄의 제왕은 고고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난 일곱 개의 층을 거치며 대면했던 티탄들과는 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티탄의 제왕이 한 인간을 향해 강한 호기심을 갖습니다.]
[그가 이 보스 룸에 들어온 당신에게 대결을 제안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번외편 격의 제안.
없으면 섭섭할 뻔했다.
항상 보스 룸에서는 티탄을 물리치며 마나 보상을 받았는데, 이번 건수는 상당히 크다.
제왕이 나를 보며 이렇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대결이 성사되었습니다.]
나는 성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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