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장제훈. 녀석은 애써 태연한 척 노력을 하는 거 같은데, 흔들리는 눈빛만은 속일 수 없다.
나는 말없이 녀석을 보며 히죽 웃어 주었다.
내가 서두를 이유는 없다.
어차피 애가 타는 건 상대방이니, 나는 녀석의 반응을 보며 차분히 대응해 나가면 될 뿐이다.
"그건 도대체 무슨 능력이지? 어떻게 내가 살성인걸……."
"살성인 것을 알았냐고?"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인벤토리에서 물건 하나를 반쯤 꺼내어 보여 주었다.
"총? 서, 설마!"
"왜냐하면 나도 살성이니까."
그리고는 다시 홍염의 불도깨비를 인벤토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장제훈은 잠시 멍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총을 쏘는 살성이 있다고 말로는 들어 봤는데 정말로 존재할 줄이야!"
그러다가 녀석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문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살성끼리 서로를 알아본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으니까. 나 역시 네가 살성임을 알지 못했고."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그래서 준비한 레퍼토리가 있다.
예전에도 잘 써먹은 적이 있는.
"나는 그냥 평범한 살성이 아니야."
"…… 평범한 살성이 아니다? 그럼 뭐가 또 있는데!"
"대살성."
"허!"
대살성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살성들을 상대로는 이상하게 잘 먹힌다는 것.
"대살성, 그것 역시 소문으로만 들어 봤을 뿐인데."
어쩌면 그 소문의 진원지가 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잔여 골드가 125,900이군. 살성치곤 골드 축적이 평범한데?"
"뭐야!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다고?"
"지금 네가 들고 있는 멸무극의 등급은 보물급. 안타깝군. 이제 슬슬 전설급 하나 정도는 장만해야 할 시기 아닌가?"
"말도 안 돼!"
"더 할까?"
"아니. 이제야 의문이 좀 풀리는 것 같아. 지금까지 네가 보여 준 비정상적인 능력들의 이유를 알게 됐어. 탑의 특혜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완전히 먹혀든 모양.
살성 상대로는 역시 대살성 카드가 만능이다.
"그런데 이제야 살성임을 밝히고 나와 접선하는 이유는 뭐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포기해. 이번 경합에서 너에게 부여된 미션."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다.
이 녀석이 정말로 PK와 관련된 미션을 부여받았는지.
"왜지?"
"너의 미션과 나의 미션이 상충되니까."
"와! 이런 이기적인 새끼! 네가 설령 대살성이라 해도 내가 그 말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
"이유는 따지지 마. 다 대의를 위해서니까. 그리고 40층의 그날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내 입에서 40층이 언급되자 녀석은 멈칫한다.
"피의 날?"
"그래. 피의 날."
역시 살성들에게는 40층과 관련된 정보가 전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예정되어 있는 40층의 가혹함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40층 피의 날에서 생존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단 4퍼센트.
제아무리 살성이라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수치다.
"장제훈. 내가 손을 내민 건, 너에게 큰 기회가 될 거야. 내가 누군가를 선택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니까."
"네가 나를 선택했다고?"
"그래. 단, 이번 경합에서 네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물론 선택은 너의 몫이다."
"하지만 아직 너는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말해 주지 않았어. 네가 날 선택해서 뭘 어쩌려는 거지?"
"기다려.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까. 참고로 이건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네 파트너도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내 파트너 또한 살성인데도?"
"안 돼."
그리고는 나는 장제훈의 선택을 촉구했다.
녀석의 눈빛이 흔들린다.
대답은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다.
* * *
"이야기는 잘 끝내고 오셨습니까?"
"어. 나름 성과가 있었지."
"성과가 있었다는 건…… 설마."
"어. 네 말대로 장제훈이었어. PK 미션을 받은 파티 말이야."
"그걸 저쪽에서 순순히 밝혔다는 말씀이십니까?"
"어. 술술 말하더라고."
"……."
"다짐도 받아 냈어. PK 하지 않겠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가능하더군."
제아무리 신주아라 해도 이 상황을 온전히 납득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
그녀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다.
"내가 장제훈과 접선하는 동안 다른 두 파티의 분위기는 어땠어? 이상한 낌새 같은 건?"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PK 미션을 받은 파티가 더 존재하는지의 여부.
"없었습니다. 다들 당신과 장제훈 쪽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서로를 경계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분명 PK를 하기에 나쁘지 않았던 타이밍. 그럼에도 움직임이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적어도 최현조와 유지훈은 서로 싸울 의지가 없었다는 것.
"탑은 이번 경합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지 않았어. 비공개 미션을 달성하는 파티가 둘 이상 발생하는 경우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지. 파티 간의 미션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도 말이야."
"생각해 보니 그 부분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우리가 중앙 지점을 점거해 놓았으니, 잘 버티고 있으면 돼. 시간은 우리 편일 테니까."
제한 시간은 총 3시간.
지금 현재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실마리를 얻을 만한 반응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최현조의 파티로부터 왔다.
"장제훈을 만나게 비켜 달라고?"
"그래. 어차피 우리가 돌아서 가더라도 너는 따라붙을 테니까."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장제훈과 접선하려는 이유는?"
"너희 둘이 먼저 접선한 사실이 거슬려서 말이야. 그래서 물어볼 생각이다. 둘 사이에 무슨 은밀한 대화가 오고 갔는지."
"그건 나한테 물어봐도 될 일인데?"
"아니. 난 장제훈의 대답을 듣고 싶어. 그러니 비켜라."
"싫다면?"
"그럼 무력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갑자기 최현조와 송수빈의 마나가 마치 짠 것처럼 증폭되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마나수 열매를 섭취한 것.
이 커플, 초사이어인식 연출에 재미를 들린 모양이다.
"네가 받은 미션이 이호영을 도발하라, 뭐 이런 건 아니지?"
"농담은 사절이다."
휘이이익!
그리고는 두 사람의 공격이 시작된다.
최현조는 나를, 송수빈은 신주아를.
이들의 미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싸우는 건 찝찝한 일이긴 하나, 여기서 제압에 성공하면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된다.
최현조의 주무기는 창.
엄청난 마나를 기반으로 한 공격이 매섭다.
회전하며 쏘아져 오는 녀석의 창날은 나의 가슴을 꿰뚫어 버릴 기세다.
파아아앗!
성검이 창날 앞을 가로막으며, 마나겨루기에 돌입했다.
보통 검이었다면 이 힘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을 터.
최현조는 더욱 거세게 마나를 불어 넣으며 나를 압박해 왔다.
나도 어디 가서 마나통이 딸리는 일은 거의 없을 텐데, 작물템을 덕지덕지 바른 이 녀석의 마나통은 가히 사기적이다.
창술 스킬도 예상보다 완성도가 훨씬 더 높다.
물론 수련보다는 탑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무림맹주와도 비무를 뜨던 내가 한낱 농부와 힘겨루기를 한다는 사실에 기가 찰 노릇이다.
파바바밧!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녀석이 또 한 번 마나수를 먹으며 한층 더 레벨업 했다는 것.
내가 템빨전에서 밀리는 날이 오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꽤 버티는데?"
플레이어를 상대로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오랜만의 일.
하지만 마나겨루기에서 밀린다는 걸 확인했을 뿐, 전투의 본질에서 내가 밀릴 일은 없다.
타악!
팽팽하게 맞닿은 창과 검이 순간적으로 벌어지며 거리가 만들어진다.
서로 무기를 맞댄 채 거대한 마나를 밀어 넣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뒷걸음을 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
하지만 나의 마나 컨트롤은 그런 걸 걱정할 수준을 진즉 넘어섰다.
지금까지는 무식하게 마나 대결로 놀아 줬으니, 이제는 고급지게 끝내 줄 시간.
더욱 거세게 찔러 들어오는 최현조의 창날을 피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쥐새끼 같은 놈!"
녀석의 공격이 펼쳐질 때마다 공기 중에서는 마나가 진동한다.
이런 비효율은 참으로 거슬린다.
기름을 들이부으며 미친 듯이 달리는 스포츠카와도 같은데, 드라이버의 운전 기술이 살짝 아쉽다.
내가 녀석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내자, 최현조의 짜증은 갈수록 심해진다.
"언제까지 이렇게 피해 다닐 수 있……."
어느새 나의 성검은 녀석의 목젖을 노리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만 더 찌르면 터져 나갈 거리.
물론 그럴 일은 없다.
나는 PK를 막아야 하는 경찰 역할이니까.
"넌 아직 멀었어. 최현조."
"젠장!"
신주아와 송수빈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
쉬운 싸움은 아니다.
송수빈이 최현조보다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 역시 템빨을 덕지덕지 발랐기에 스탯만 놓고 본다면 신주아보다 우월하다.
"캥수 보낼까?"
그녀의 마음먹기에 따라 금방 끝날 수도 있는 싸움.
"혼자 하겠습니다."
결국 쉽지 않은 길을 간다고 한다.
신주아도 자존심은 보통이 아니니까.
그리고 다시 내 시선은 최현조에게로.
녀석은 분한 눈빛이었다.
"다시 텃밭이 생기기 전의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인가?"
검 끝이 녀석의 목을 살짝 찌른다.
"개자식!"
"궁금한 게 있으니까 잘 대답해 봐. 너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선 장제훈을 만나러 가야 했던 거야?"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 자유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어차피 네가 장제훈을 만나러 가게 될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망할 자식!"
역시,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대답은 되었다.
최현조의 미션은 장제훈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
더 쉽게 접선할 수도 있었던 유지훈을 건너뛰었으며 심지어 나를 제압하면서까지 장제훈을 만나러 가려 했던 걸 감안한다면,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이를테면 PK의 대상이 장제훈으로 제한이 되어 있든가, 아니면 장제훈과 연합을 맺어야 한다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둘이 만나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저 두 여자의 싸움이 끝나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 다음번에는 이런 자비는 없다는 거 기억하고."
그렇게 최현조의 목을 겨누던 성검을 내려놓았다.
"젠장!"
"아, 그리고 하나 더. 갑자기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것까지는 축하할 일인데, 주제를 알고 주체할 줄도 알아야지. 네 생각보다 탑은 넓다?"
내 말에 최현조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푹 내쉰다.
마치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한다.
채애애애앵!
그 순간, 신주아가 휘두른 도끼가 송수빈의 검을 부러뜨린다.
몸도 몸이지만, 검에도 투자 좀 할 것이지.
이제 남은 것은 유지훈과 민지연.
여긴 우리 사천왕 중 최약체라 부담이 없다.
PK 미션을 받았다 한들 그럴 능력이 되지도 않으니까.
그래도 대화를 한번 해 보긴 해야겠다.
탑이 어떤 엉뚱한 수작질을 해 놓았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봐 최현조. 가는 길에 유지훈 좀 이쪽으로 오라고 해 봐. 그럼 송수빈도 보내 줄 테니까."
"뭐라고?"
최현조의 표정은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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