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마침내 카우렌의 도플갱어가 소멸된다.
대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완벽한 학살.
노게아 대륙의 제일검이라는 칭호가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대륙 제일검 아이딘! 수고했다."
장제훈은 아이딘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이런 거물을 소환해 내다니, 살성이 탑에서 받는 특혜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보고 있는 장제훈의 스탯이 거짓이거나.
"이호영. 이제 네 차례군. 정말 기대돼. 1, 2층을 독식한 너는 과연 누구를 소환해 낼지 말이야."
장제훈의 말투에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누가 나오더라도 아이딘이 정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내가 소환할 도플갱어는 무림 출신이다."
"무림? 재밌겠군. 그곳에도 검의 고수들이 많을 테니까."
그 말에 아이딘의 미간이 들썩거린다.
"이번엔 내가 제대로 된 검객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인가?"
"그건 모르지. 저 이호영이란 녀석이 누구를 소환해 낼지는 아직 모르니."
그 순간 허공이 찢어지며, 파열음이 울린다.
지이이잉-
드디어 내가 소환한 도플갱어가 등장하려는 모양.
빛이 한번 번쩍이며 그 자리에서는 어느 한 왜소한 노인이 등장한다.
무림맹주 주정천.
그가 이번 경합에서 내 장기말 역할을 맡은 절대고수였다.
다행히 탑은 이전 우리의 싸움을 맞수 대결로 판정해 준 것이다.
주정천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나를 찾아낸다.
"이호영, 그대가 나를 소환하였다고 들었다."
"네. 그러니 잘 싸워 주셔야 합니다. 저한테 받으신 것도 있으시니 말입니다."
"물론 그럴 생각이라네. 그나저나 내 상대는 누구인가?"
내가 아이딘을 가리키자 주정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상대의 역량을 단번에 간파해 낸 것.
이 모습을 보며 장제훈은 내게 물었다.
"분위기가 왠지 정파 쪽 같은데,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나 역시 무림 미션에선 정파 소속이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무림맹주를 볼 기회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무림 미션 당시 우리 플레이어들은 쪼렙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대결을 시작합니다.]
탑의 메시지가 전해지자, 두 거물은 서로에게 검을 겨누며 상대의 기세를 가늠해 보는 모습이다.
한편, 장제훈은 내게 한 발 더 다가오며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군. 무림에서 도플갱어를 소환해 내다니."
"왜지?"
"소환 조건이 최소 맞수인 경우에만 인정이잖아. 그리고 그 당시 우리는 너무 약했고 말이야."
결국, 내가 무림에서 소환해 낼 수 있는 인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
"뭐, 그건……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그래 그건 인정! 그런데 저 노인은 어느 문파 출신이지?"
문파라…….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선 주정천에게 출신 문파는 없다.
고아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림맹의 일꾼으로 길러졌을 뿐이니까.
그런 그가 맹주의 지위에 오른 건 전무후무한 파격이라고 한다.
명문 정파의 뒷배 없이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인 셈.
"저 사람은 출신이 불분명한 사람이다."
"적어도 명문 정파는 아니라는 거로군."
"그런 셈이지."
"무명의 검객이라……."
무림맹주에게 무명이라니.
제멋대로의 해석에 기가 찰 노릇이다.
채애앵!
그 순간 주정천과 아이딘의 검이 부딪히며 첫 합을 나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차원을 대표하는 고수들이니, 이것만으로도 상대의 전력 상당 부분을 파악했을 터.
채앵!
채애앵!
두 사람의 검은 점점 더 빨라진다.
마나가 요동치며, 공간을 압도한다.
그야말로 강 대 강의 승부다.
본체가 아닌 도플갱어인만큼, 두 사람 모두 부담 없이 대결에 임하고 있는 것.
관전 중인 사람들의 눈들도 동그랗게 변한다.
"이호영! 이건 뭔가 얘기가 다르지 않나?"
"그런 거 없으니 잔말 말고 구경이나 해."
주정천의 표정을 보아하니, 나와 싸울 때보다 한결 여유롭다.
이렇게 서로가 과감한 승부를 벌인다면, 결과는 곧 드러날 것이다.
물론 내 예상이 빗나갈 리는 없다.
스으으윽!
잠시 후 주정천의 검날이 아이딘의 한쪽 어깻죽지를 베어 낸다.
핏물이 튀며, 아이딘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 과정에서 작은 빈틈이 생긴다.
순간적으로 그의 보법이 불안정해진 것.
그걸 놓칠 주정천이 아니다.
솨아아악!
커다란 호선이 공중에서 그려지며, 아이딘의 반대쪽 어깨에도 상흔이 생겨난다.
간신히 치명상은 피했으나 승부의 균형이 기울어지는 결정적인 한 수였다.
여유롭던 장제훈의 표정엔 어느새 긴장감이 역력하다.
"……정파에서 저런 고수를 소환했다고?"
"왜? 이상해?"
"도대체 저 노인은 누구지?"
"주정천."
내 대답에 장제훈은 기억 속을 더듬기 시작한다.
하지만 단번에 떠올려 내진 못한다.
이름은 들어 봤을 테지만, 접점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무림맹의 지존. 무림맹주 주정천."
"어? 아아!"
그제야 장제훈은 무언가를 알게 된 듯 탄식을 뱉어 낸다.
그리고 그 순간.
스으으으윽!
아이딘의 가슴팍에는 횡으로 길게 붉은 선이 그어진다.
잠시 후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조, 좋은 승부였……."
[대결이 종료되었습니다.]
두 도플갱어가 동시에 소멸되며, 주변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제는 정산의 시간.
대결에서 패한 네 명을 향해 메시지가 울린다.
[스탯 포인트가 랜덤으로 -10 하락합니다.]
상당히 큰 페널티다.
네 명에게서 소멸된 총 40의 스탯 포인트.
그중 일부가 나와 신주아에게로 전해졌다.
[스탯 포인트가 랜덤으로 +10 상승합니다.]
이제 스탯에 연연할 수준은 지났지만, 높아져서 나쁠 것은 없다.
물론 스탯이 하락한 이들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유지훈 쪽도, 장제훈 쪽도 나름의 충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미리 경고했잖아. 경합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대답이 없다.
그저 초점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해한다.
그동안 탑에서 탄탄대로만을 달려왔을 이들에게 지금과 같은 상황은 적응이 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번 내 의사를 밝혔다.
"7층까지는 내가 쭉 클리어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둬. 괜히 소중한 스탯 깎아 먹지 말고."
"……."
어쨌든 이제는 3층으로 향할 시간.
티탄이 주는 마나 보상이 꽤 짭짤하다.
층수가 올라갈수록 보상은 더욱 커질 테니 기대가 된다.
* * *
티탄의 8층 탑에 있는 동안은 무슨 짓을 하든지 호감도에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
또한 호감도의 영향도 느낄 수 없으니,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티탄의 8층 탑은 39층의 워밍업 정도라는 것.
공략에 나선 3층도 무난한 여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캥수를 앞세웠다.
티탄의 병사들은 전력 자체가 딱 캥수를 키우기 좋은 수준.
"캐애애앵!"
또다시 캥수 녀석이 뭔가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스킬의 완성도는 점점 더 높아져 가고 있다.
덕분에 나와 신주아는 느긋하게 산책을 하는 중이다.
"아직 경합에 나서지 않은 파티 말이야. 어때 보여?"
"이제 슬슬 움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4층 도전권을 놓고, 경합에 참여할 거 같단 얘기야?"
"그게 당장 4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잠잠할 스타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최현조와 송수빈.
아직까진 큰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있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파티였다.
두 사람 모두 직업은 농부.
레벨도, 아이템도, 스킬도 모두 평범한 수준이지만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평범한 능력을 가지고 우리와 티탄의 8층 탑에 참여할 리는 없을 테니까.
"어쩌면 그들은 힘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아이템이 있을 테고 말입니다."
"음흉하군."
"당신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서 신주아는 내 머리 위의 레벨을 가리킨다.
하긴 제일 수상한 것으로 따지자면 나를 능가하는 플레이어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보스룸의 앞.
"이번에는 신주아 네가 해 볼래?"
"저 혼자 말입니까?"
"어. 꽁으로 스탯이 많이 올랐으니 할 수 있을 거야. 새롭게 마나도 많이 얻었고."
쉽지는 않겠지만 신주아라면 능히 할 수 있다.
보스룸의 문 뒤에서 느껴지는 티탄의 기운은 2층 때보다 약간 높은 수준.
만약의 상황엔 내가 손을 쓰면 된다.
"그럼 해 보겠습니다."
나는 2층에 이어 3층 역시 무임승차 좀 해 볼 생각이다.
* * *
세 개의 층을 연달아 클리어하며 받은 누적 보상이 결코 적지 않았다.
스탯보다는 나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인 마나를 늘릴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다.
그리고 이 마나 보상은 층수가 올라감에 따라 더욱 커질 거라는 점.
당연히 4층도 우리가 공략해 나갈 생각이다.
"혹시 우리와 경합에 나설 파티 있어?"
유지훈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무래도 우린 한 타임 쉬어야겠어. 이번에도 지게 되면 너무 위험해질 테니까."
이쪽은 개인당 손실된 스탯만 20이다.
언젠간 만회하기 위해 다시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쭉 쉬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손절은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장제훈은 눈치를 보는 중.
녀석은 최현조-송수빈 파티의 참여 여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듯했다.
"너희들은 참여 안 해? 아직까지도 얌전히 구경만 하고 있잖아."
장제훈은 이들이 참여해 주길 바라고 있다.
한 타임 관전을 하며 나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길 원할 테니까.
물론 이 역시 희망 회로일 뿐이다.
1층 경합에서는 나의 절대 감각 때문에, 2층에선 도플갱어가 강해서 승리한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우리는 이번에도 건너뛸 생각이다."
최현조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답을 한다.
"왜지? 이호영, 신주아가 보상을 독식하는 걸 두고만 볼 생각인 거야?"
"저들이 보상을 얻는다고 내가 잃는 것은 아니니까."
"답답한 소리를 하는군! 보상의 기회를 건너뛰는 것 자체가 잃는 거라고!"
"어쨌든 이번에도 우린 불참이다."
"이런 겁쟁이 같은 놈!"
최현조가 차분한 어조로 대응할수록 장제훈의 짜증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결국 녀석은 결단을 내렸다.
"우린 이번에도 참여한다!"
"뭐? 내 동의도 없이?"
파트너인 정혜성이 반발을 하고 나섰지만, 최현조의 뜻은 완고했다.
"더 미루다가는 만회할 기회가 영영 사라져! 이놈들은 계속해서 보상을 받으며 강해지고 있으니 지금이 가장 쉬울 때야."
일리는 있는 말이나, 한 가지 전제가 잘못되었다.
불가능의 영역에선 더 쉽고 덜 쉬운 것이 없는 법. 똑같은 불가능일 뿐이다.
[두 파티의 경합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장제훈은 망조로 향해 뛰어드는 전형적인 불나방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대결 종목의 선정을 위한 랜덤 주사위가 돌아갑니다.]
민지연은 테미스의 반지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표정이다.
본인이 경합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으나 나의 패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터.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경합에서도 우린 가볍게 장제훈의 파티를 꺾으며 탑의 4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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