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새로운 정보가 공개되었다.
8층 탑의 도전권을 놓고 경합을 할 때 패배하는 파티에는 페널티가 부과된다는 것 이런 사실에도 유지훈과 민지연의 표정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까지 다른 플레이어를 상대로는 져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바로 나처럼 말이다.
"잘 부탁한다. 이호영 그리고 신주아."
유지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만을 한다거나 우리를 깔보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런 건 마음에 여유가 없는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
녀석은 아주 신사적이었으며, 그것이 가식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 우리도 잘 부탁해."
나 역시 담담하게 유지훈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는 탑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경합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에.
경합에 참여하지 않는 네 명의 플레이어도 지금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이들 역시 2층 도전에 참여할지 고민을 했을 터.
결과적으로는 신중한 포지션을 잡은 것이다.
아직 8층까지는 많은 층들이 남아 있으며, 경합 상황의 변수에 대해선 아직 밝혀진 게 없으니까.
[대결 종목 선정을 위한 랜덤 주사위가 돌아갑니다.]
탑의 메시지가 전송되자 민지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살짝 피어났다.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테미스의 반지.
강력한 행운 보정을 해 주는 아이템이다.
탑에서 운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그동안 참 많은 꿀을 빨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본인에게 유리한 종목이 걸릴 거라 확신하고 있겠지만, 예외는 늘 존재하는 법. 그게 바로 오늘이다.
[대결 종목이 결정되었습니다.]
[제왕의 창을 견뎌 내십시오.]
"제왕의 창?"
아직 이 부분은 베일에 가려져 있으나, 규칙 자체는 간단했다.
각 파티의 대표 한 명이 제왕의 창에 맞서 더 오래 견뎌 내는 쪽이 승리하는 것.
우리 파티에서는 내가, 상대편 파티에서는 민지연이 출전을 선언했다.
‘하긴 민지연은 절대 체력의 칭호를 가진 플레이어니까.’
그녀의 피통은 게임의 최종 보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단순히 일반 플레이어의 몇 배 수준이 아니다.
민지연은 본인에게 유리한 종목이 결정되었음을 확신하며 입술을 살짝 실룩거린다.
그녀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순서는 어떻게 할까?"
나는 먼저 하든 나중에 하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뒤 순서를 강력하게 바라고 있을 터.
초면에 양보를 할 정도로 내가 호구는 아니다.
"가위바위보는 어때?"
"좋아."
민지연은 내 제안에 미소를 짓는다.
그녀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다.
테미스의 반지를 획득한 이후 져 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이겼군."
민지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였다.
가위바위보 한 번 진 거로 뭐 이런 반응을.
"……그래서 이호영 네 선택은?"
"레이디 퍼스트!"
나는 쐐기를 박아 주었다.
"알겠어. 어차피 순서는 상관없었으니까."
"그래, 그럴 테지."
실제로 민지연은 크게 대수로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본인의 승리를 의심하고 있지 않을 것이고.
[플레이어 민지연은 붉게 표시된 영역으로 이동하십시오.]
어느새 새하얀 바닥에는 붉은색의 영역이 생겨나 있었다.
저 영역 내에서 제왕의 창을 견뎌 내야 한다는 의미일 터.
민지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원형의 붉은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도전, 이라고 외쳐야 하는 건가?"
여유로운 척이 아닌 진짜 여유.
그녀는 본인의 주무기인 쌍검을 고쳐 세웠다.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미션은 종료됩니다.]
[탑의 8층을 주시하십시오.]
전송된 메시지에 우리 모두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탑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슈우우웅-
창 하나가 붉은색 영역을 향해 날아든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한 자루의 창은 레이저처럼 눈 깜짝할 새에 민지연을 위협해 왔다.
채애앵!!
그녀는 반사적으로 쌍검을 들어 올리며 창을 막아 내는 모습.
그렇게 떨어진 창은 바닥을 진동시킨다.
‘상당한 무게다!’
나는 다시 탑의 8층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이런 무게의 창을 가공할 속도로 정확하게 던진다는 것.
이 탑의 최종 보스가 가진 힘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단서였다.
민지연은 완벽한 방어를 한 것으로는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피통에 생긴 미세한 변화가 보인다. 그리고 그 순간.
슈우우웅-
또 한 자루의 창이 날아들었다.
놀랍게도 더욱 빨라진 속도감이 느껴진다.
쭉 뻗어 날아오는 검은 직선은 어느 순간 민지연의 머리를 향한다.
콰아아앙!
불꽃이 튀며 그녀의 팔이 떨려 온다.
제아무리 검으로 막아 낸다 한들, 창의 폭력적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
피통의 변화는 더욱 커졌다.
슈우우웅-
창이 쏘아져 오는 인터벌은 더 짧아졌으며,
슈우우웅-
슈우우우웅-
동시에 두 개의 창이 날아오기도 한다.
여전히 민지연은 쌍검으로 방어를 해내고는 있지만, 점점 힘에 부치며 일격을 허용할 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도전권을 얻으려다 골로 갈 수도 있는 미친 미션이 아닐 수 없다.
"읍!"
결국, 창날이 한쪽 팔을 스치며 민지연은 처음으로 신음성을 뱉어 냈다.
저런 무식한 창을 맞고도 읍! 한 번 하고 만 것이 놀랍기는 하나, 상태창의 변화는 정직했다.
피통의 감소가 꽤 유의미하게 일어난 것.
물론, 아직 한참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체력의 칭호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기에.
실제로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선전하는 모습이었다.
"놀라워! 피부 가죽이 도대체 뭐로 돼 있길래 저렇게 버틸 수 있는 거지?"
장제훈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탑의 8층에서 날아온 창만 이미 백 자루를 족히 넘는다.
그중에서 허용한 유효타도 적지 않으나, 여전히 그녀에게선 위태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파트너인 유지훈의 표정에도 아직 여유가 넘치는 모습.
그는 나를 보며 평온한 한마디를 내뱉는다.
"우리에게 유리한 게임이었던 거 같군."
녀석은 자만하진 않으나 승리를 확신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렇다고 굳이 대응하진 않았다.
민지연의 놀라운 체력에 경의를 보낼 뿐.
결국 그녀는 한참 후에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붉은 영역에서 벗어났다.
옷가지는 곳곳이 찢겨져 만신창이. 드러난 맨살은 상처투성이지만 여전히 여력이 남아 있다는 게 대단했다.
만약 그녀가 내 뒤 순서였다면 한참을 더 하얗게 불태웠을 것이다.
[10분 38초]
이것이 그녀가 제왕의 창을 견뎌 낸 시간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음 차례인 이호영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겠어!"
"그런데 민지연은 도대체 뭐지? 템빨이든 스킬빨이든 뭔가가 있다는 건데!"
"10분 38초라……. 활동 반경이 저 빨간 원으로 제한되어 있으면 나도 힘들어 보이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짧은 감상평을 내놓는다.
승부를 예상하는 균형추는 이미 민지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민지연은 여전히 거친 호흡으로 내게 말한다.
"창날이 훨씬 묵직할 거야. 네가 본 것보다 더."
"고마워. 좋은 정보."
"그리고 창이 머금은 마나는 갈수록 늘어날 테고."
나를 배려하는 이 여유로움.
본인이 지는 시나리오는 애초에 상상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녀올게."
나는 신주아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붉은 원 안으로 들어섰다.
반경 약 1미터.
3.14 제곱미터 정도 되는 이 좁은 땅 안에서 제왕의 창을 피해 내야만 한다.
[탑의 8층을 주시하십시오.]
민지연 때와 똑같은 메시지.
절대 감각이 곤두서며, 저 멀리 탑의 꼭대기로부터 마나의 응집이 미세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제왕이란 놈이 나를 향해 창을 조준하고 있는 것일 터.
휘이이잉!
놈의 창은 무자비한 살기를 머금고 내게로 날아왔다.
타이밍을 예상한 미세한 차이는 상당히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낸다.
콰아아악!
살짝 한 발을 물러서자 내 발 앞에서 창 한 자루가 진동을 일으키며 땅에 깊숙이 박힌다.
휘이이잉!
그리고 연이어 날아오는 또 하나의 창.
첫 공격을 피한 게, 타이밍만 잘 예측했다고 된 것은 아니다.
템빨이 있었다고는 하나 무림맹주와도 거의 대등하게 겨룬 내가 저 멀리서 던지는 창을 못 피한다는 건 어불성설.
콰아아악!
또 한 자루의 창이 붉은 원을 과녁 삼아 깊숙이 박혀 버린다.
휘이이잉!
휘이이잉!
기분 탓인가. 날아드는 창의 맹렬함이 훨씬 더해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날아드는 궤적은 그야말로 예술.
티탄의 제왕이란 놈은 명사수가 틀림없었다.
* * *
10분 40초.
민지연의 기록을 2초 초과한 뒤 나는 바로 미션을 종료하였다.
이 미션은 쇼가 아니니 내가 팬 서비스를 할 이유도 없었던 것.
땀을 좀 흘리긴 했지만, 피는 흘리지 않았다.
"탑은 참 넓어?"
장제훈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우리의 경합을 지켜봤던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도대체 무슨 특성으로 피한 거지? 뭐, 가르쳐 줄 리는 없겠지만."
"절대 감각."
"절대 감각? 그런 게 있었어?"
그런 게 있다.
심지어 여기에 ‘절대’의 칭호를 가진 플레이어는 나를 포함해 셋이나 된다.
민지연이 방금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 준 것도 절대 체력 때문이었고 말이다.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멀리서도 상대의 기운을 예측하기가 쉬워지지. 그게 이번 미션을 이긴 비결이었다."
나의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신주아도 살짝 놀라는 눈치다.
짐작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절대 감각이라! 어쨌든 놀라운 능력 잘 봤어."
"그런 특성이 있다니, 이번 미션에서는 내가 경합했어도 이길 수가 없었겠군."
"이제야 확실해졌어. 여기 모인 네 개의 파티가 그냥 파티가 아니었단 게."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들에 내가 살짝 놀랄 정도.
이들도 자신만의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있으니, 내가 가진 절대 감각에 주눅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질 줄은 몰랐어. 하필 네가 절대 감각이었다니."
민지연과 유지훈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들에게 부여된 페널티가 공개되었다.
[스탯 포인트가 랜덤으로 -10 하락합니다.]
생각보다 페널티가 뼈아픈 수준이다.
이걸 다시 수련으로 끌어 올리려면 한세월이 걸릴 테니까.
"이건 좀."
"가혹하잖아!"
그리고 우리에겐 예상하지 못했던 보상이 전해진다.
[스탯 포인트가 랜덤으로 +5 상승합니다.]
이 소식에 유지훈과 민지연의 동공이 처음으로 격하게 흔들린다.
단순히 페널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었을 터.
다른 네 명의 플레이어들 역시 적잖게 놀란 반응이다.
"역시 탑은 경합을 유도하려는 건가?"
"마나 보상에 스탯 보상까지. 이호영의 파티가 앞서나가는군."
그리고 2층 공략에 나서는 것은 이번에도 나와 신주아.
마나를 수금하러 갈 시간이다.
그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8층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티탄의 제왕 말인데. 상당히 강해. 창을 던지는 순간 녀석에게서 느껴진 기운이 심상치 않았거든."
"꼭대기인 8층은 우리 여덟 명 모두가 동시에 공략하는 곳이잖아. 다들 한가닥씩 하다 온 거 같으니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장제훈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내가 말한 의미는 그게 아니다.
"그래도 미리미리 조심해 두자는 거야. 괜히 하락한 스탯으로 8층에 갔다가는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경합 상황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냥 내가 7층까지 쉬지 않고 클리어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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