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돌발적으로 생성된 스페셜 퀘스트에 호승심은 더욱 피어오른다.
‘나의 검에 주정천의 피를 묻혀라……?’
생사결의 비무는 아니지만, 애당초 이 싸움을 상처 하나 없이 끝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 역시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각오한 일. 마찬가지로 비무가 끝날 때까지 주정천이 말끔한 상태라면 그것 또한 곤란할 것이다.
지금 나는 수라마혈검이 고금제일의 무공임을 증명해야만 하니까.
내 상대가 정파 무림의 일인자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혈마의 검술로 승부를 겨루고 있다는 사실.
“뭐 하느냐? 어서 오지 않고!”
나의 공격을 기다리는 주정천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절대 고수의 경지에 오른 그에게 나 같은 상대는 평생에 걸쳐도 몇 번 없었을 터.
지금 나도 이렇게 흥분되는데, 주정천은 오죽할까 싶다.
“그럼 갑니다!”
나는 모든 사족을 덜어 내고, 주정천과의 거리를 신속히 좁혀 나갔다.
수라마혈검은 본디 직선적인 움직임에 특화되어 있으며 끊임없는 강공을 쏟아붓는 것이 트레이드마크.
솨사사삭!
우리 두 사람의 검은 가공할 속도로 허공에 수를 놓기 시작한다.
검과 검이 쉴 새 없이 부딪히며 불꽃이 튄다.
콰아앙!
주정천은 나의 강공 일변도에 맞불을 놓으며 더욱 강한 힘으로 나를 찍어 누르려 한다.
그의 힘을 제대로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
콰아앙!
콰아아앙!
검기가 요동칠 때마다 공간이 찢어지는 굉음이 터져 나온다.
한 합, 한 합이 지속될수록 압박을 가해 가는 쪽은 주정천.
어느새 내가 그의 검을 방어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역시…….’
무림맹주가 괜히 정파의 수장인 것이 아니다.
내게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간신히 막아 내는 순간, 찰나의 빈틈이 만들어진다.
순간 아차 싶은 느낌.
주정천이 이 빈틈을 놓쳤으면 하는 생각은 지나친 바람일 뿐이다.
퍼어어억!
그의 왼손이 나의 가슴을 치며 마나를 뿜어 냈다.
빈틈을 내줬으니 어쩔 수 없는 일.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무형의 수호자가 나의 몸을 완벽하게 보호해 내지만, 나의 몸이 튕겨 나가는 것까진 어찌하지 못하였다.
그대로 수십 장을 밀려나며 나는 경외에 찬 눈으로 주정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피 한 사발이라도 쏟아 내야 할 상황이지만, 그저 미소 한번 지을 뿐이었다.
주정천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어차피 템빨도 실력이다.
“기대하신 장면을 없을 겁니다. 그리 아프지 않았으니까요.”
“믿을 수 없는 일이군. 제대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정말 제대로 들어왔다.
똑같은 공격을 한 번 더 받았다가는 팔라스의 방패가 수복 모드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어쨌든 무림맹주의 전력은 어느 정도 파악했다.
“이렇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가슴이 설레는 싸움은 오랜만이야. 사마련에 자네 같은 신진 고수가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라네.”
“이제 좀 탐나십니까? 제 검술 말입니다.”
“흥미롭다는 건 인정하지. 고금제일이라는 말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곧, 동의하게 되실 겁니다.”
어차피 내가 한 수 아래의 전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니, 서둘러 밸런스를 맞춰 놓을 필요가 있다.
내가 믿는 것은 팔라스의 방패.
최소 한 번은 더 나를 완벽하게 수호해 줄 테니,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생각이다.
실패 확률은 제로. 스페셜 퀘스트 클리어는 덤이 될 것이다.
우우웅-
그리고 그 순간 성검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못한 덤이 하나 더 생겨났다.
* * *
단리운.
이 비무의 유일한 증인이 될 그는 두 거인의 대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모든 장면을 눈에 담아 두고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
하지만, 그는 이 임무가 자신의 깜냥을 넘어서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사부님의 일장을 맞고도 멀쩡하다고?’
심지어 사부인 주정천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
그렇다고 무명의 무사가 힘을 감추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방금 전의 경합에서도 무명의 무사는 힘에 부쳐하는 인상을 남기고 있었기에.
‘더욱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리운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또다시 전개되려 하는 두 사람의 경합.
무명의 무사가 내뿜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정체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태산 같은 사부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도 만무한 일.
콰아아앙!
그 순간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공간을 찢어 놓는다.
놀랍다.
사부님을 상대로 이렇게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사마련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심지어 사마련주도 아닌 이름도 모를 무사가 말이다.
서어어억!
하지만, 명백히 비무를 주도하고 있는 쪽은 사부인 주정천.
그의 검이 무사의 어깨를 베어 낸다.
결정적인 한 수였다.
이제 비무의 양상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 터.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스으으윽!
무사의 검이 곧바로 직선으로 뻗어 나가며, 사부의 어깨를 찌른다.
이를 본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반격.
더욱이 단순히 빠른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완벽하게 정제된, 간결한 검격이었으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지극히 비상식적인 상황이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혼란의 소용돌이가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 비무 중인 사부를 제외한다면.
* * *
[호감도: +45]
옴팔로스는 돌아온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에 대한 군주의 호감도가 높아진 만큼이나, 그 역시 나에게 호의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다.
“당신이 무림맹주와 엿새 후의 약조를 맺은 그 시점부터 사실상 게임 오버였소. 아주 놀라워. 위기를 그런 식으로 돌파해 내다니 말이오.”
“운이 좋았습니다. 맹주가 그렇게 쿨하게 나와 주다니.”
“그걸 어찌 운이라 할 수 있겠소. 자신의 성과를 그렇게 낮춰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오.”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제가 죽는 게 소원 아니었습니까?”
“그, 그건! 예전에 했던 얘기들은 그냥 묻어 두시오. 내가 당신을 잘못 본 거 같으니 말이오!”
모든 게 다 내 뜻대로 되었다.
3회차의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한 것도.
가장 적절한 수준으로 호감도가 만들어진 것도.
“맹주에게 엿새가 아닌 일주일을 제안했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위험을 감수한 것이오? 물론 난 당신의 그 호기로움을 높이 사는 입장이지만.”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비무니까요. 덕분에 스페셜 퀘스트를 하나 더 클리어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참 특이한 사람이야. 어쨌든 그럼 스페셜 보상부터 정산해 보겠소?”
[보상의 내용이 공개됩니다.]
[소원 하나를 말하십시오. 무엇이든 이루어 드립니다.]
“무엇이든 이루어 준다고요? 이거 정말입니까?”
“그렇소. 하지만 부연 설명이 좀 필요할 거 같군. 무슨 소원이든 이뤄 주는 건 맞으나, 지금 당신에게 할당된 [탑 에너지]의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오. 예를 들어 당신이 무한대의 마나를 원한다는 소원을 말한다면, 무한대를 채워 주진 못하나 할당된 탑 에너지의 허용 범위 내에서는 최대치의 마나를 채워 줄 것이라오.”
“결국 말장난이군요.”
“그래서 안 받을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죠.”
옴팔로스가 예로 든 마나도 좋은 선택지다.
방금 전 무림 맹주와의 비무에서, 내가 만약 그와 동일 수준의 마나를 보유했다면 승부의 결과는 정 반대가 되었을 테니까.
졌잘싸. 아쉬운 패배도 패배일 뿐이다.
‘하지만 그냥 마나를 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좀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내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마나수를 활용하는 것.
분명 열매가 열린다면 엄청난 과실이 될 거라는 건 예상 가능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니 이를 조절해 봐야겠다.
“33층 텃밭에 자라고 있는 제 마나수의 수확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고 싶습니다.”
“그것이 소원이오? 잠시 기다려 보시오.”
응답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잠시 후였다.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마나수의 성장 속도가 3.68배 빨라집니다.]
“이게 다입니까?”
“그렇소.”
탑이 빌어먹을 존재이긴 하나, 사기를 칠 일은 없으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럼 이제 38층의 보상을 정산할 시간이다.
3회차의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하였으니 내게 주어진 것은 탑에 대한 질문권 3회.
채이설은 흔쾌히 3회의 질문권을 모두 내게 일임하였다.
더욱이 그녀의 높은 호감도는 옴팔로스의 성실한 답변을 이끌어 낼 것이니, 이번 38층 최고의 파트너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퀘스트를 전부 클리어한 당신에게는 탑에 대한 모든 질문이 열려 있다오.”
그동안 고민은 충분히 해 두었다.
현재로서 나의 목표는 성검을 이용하여 최대한 빨리 탑의 최종층으로 향하는 것.
그렇다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탑의 최종층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좋소.”
드디어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이다.
그 수위가 어느 정도일지는 전적으로 호감도에 달린 일.
“탑의 최종층은 현재로선 72층이오. 어디까지나 현재로선. 이 말의 의미까진 알려 줄 수 없어 미안하지만 말이오.”
미안해할 건 없다. 무슨 의미인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바로 탑의 증식.
현재 우리가 있는 곳과는 무려 34층의 갭이 존재하며 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될 것이다.
“탑의 최종층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곳은 천국 같은 장소라는 것. 따라서 당신들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면 최종층에서 아주 큰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라오.”
“무슨 유혹 말입니까?”
“마지막 도전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 그곳은 너무나도 달콤한 낙원이기 때문이라오. 그리고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도전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하나 더 있소. 바로 탑의 최종층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파수꾼. 무엇인지 알려 줄 순 없지만, 보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라오. 아마 모든 플레이어들은 결국 마지막 도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 후후후.”
옴팔로스는 말을 맺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사실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옴팔로스가 언급한 ‘도전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대해.
어감만 놓고 본다면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이 부여되는 것으로 해석되긴 한다.
게다가 그가 표현한 72층은 낙원. 그렇다면, 도전을 포기하고 탑의 최종층에서 계속 머무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에 관해서 확인해 보고 싶지만, 일단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과연 내게 마지막 도전을 해 볼 만한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
옴팔로스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도전을 포기할 것을 예견하였다.
이는 아주 중요한 체크포인트다.
옴팔로스가 지금 과감하게 사견을 이야기할 정도라면, 탑의 최종층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망일 테니까.
그럼 이제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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