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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262화 (262/292)

262화

지하 뇌옥에서 혼자만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내게 부여된 시간은 총 6일.

지혜의 나무가 나를 돕고 있으니 마냥 부족한 시간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엿새 뒤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란 점.

탑에 들어온 이래 가장 큰 도약의 시간이 될 것이다.

* * *

수련이 시작된 지 이각이 지났을 무렵, 수감실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내가 무림맹주에게 요청한 그 역할을 하기 위함일 터.

나는 아랑곳 않고 수련을 계속해 나갔다.

현재 나의 수련 방식은 명상 5할에 실습이 5할이다.

엿새 뒤 내가 선보여야 할 것은 혈마의 수라마혈검이지만, 아직은 무영추혼검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시점.

안가(安家)에서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부분부터 조금씩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가속이 붙는 시점은 분명 찾아올 것이다.

탈진하는 마나를 계속 공급해야 했기에 아이템 소모가 생각보다 많지만, 그만큼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

시계는 없지만, 수련을 시작한 지 대략 24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남은 시간: 5일 8시간]

수련의 첫날이 꼬박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 수감실로 들어온 남자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전부 기록해 놓았습니까?”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도 남자는 태연하게 화답했다.

“네. 당신이 수련 중에 하는 모든 것. 심지어 혼잣말까지도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나에 대한 남자의 태도는 깍듯했다.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이 남자의 수준도 보통은 아니다.

어쩌면 맹주의 후계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럴 공산이 크다.

이 남자는 나의 수련 과정뿐만 아니라 엿새 뒤에 있을 맹주와의 비밀 비무에 대한 것까지 모두 기록할 예정. 이것은 결코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하셨습니다. 특히 제가 하는 혼잣말을 기록하는 게 중요합니다. 내일부터는 좀 더 의식적으로 많이 하도록 하죠.”

“네.”

맹주에게는 단순히 수라마혈검의 비급뿐 아니라, 나의 심득에 대한 기록까지 남겨 줄 생각이었다.

사실 일종의 관종 짓이다.

이 무림의 역사에 내 이름은 남지 않겠지만, 전설로 남을 만한 일화 하나 정도는 남겨 두고 싶었다.

육백 년 전 혈마가 하지 못한 것을 내가 대신 해 주는 셈.

“실례되는 질문 하나만 하죠.”

“네.”

“당신은 하루 동안 나의 수련 과정을 지켜보셨습니다. 지금의 나와 맹주님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맹주님의 경지가 하늘이라면, 당신은 작은 언덕쯤 될 거 같습니다.”

남자는 주저 없이 바로 답을 주었다.

작은 언덕이라…….

나를 이만큼이라도 평가해 주다니, 역시 보는 눈도 보통은 아니다.

“그렇군요.”

아직 나의 경지가 맹주와 비교한다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

남자와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나는 이튿날의 수련을 바로 시작했다.

오늘부터는 수라마혈검에만 모든 시간을 쏟기로 하였다.

무영추혼검에서 얻은 마지막 깨달음을 혈마의 검술에 녹여 내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서로 다른 검술이긴 하나 만류귀종이란 말이 있듯이 그 끝은 통하는 법이며, 나는 예전에도 이 수련법을 통해 양 검술의 막힌 부분들을 뚫어 내곤 했었다.

오늘도 그 성과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남은 시간: 4일 8시간]

하루가 꼬박 지났을 무렵, 내 수라마혈검의 경지는 무영추혼검과 엇비슷한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여전히 말없이 나의 모든 하루를 기록하고 있었다.

“오늘도 같은 질문을 해 보죠. 지금의 나와 무림맹주님의 경지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저도 어제와 같은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맹주님이 하늘이시라면, 당신은 작은 언덕과 같습니다.”

“그렇군요.”

어제와 정확히 같은 답변.

역시 이 남자의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수련 셋째 날.

내 수라마혈검의 성취에는 드디어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아직 채우지 못했던 빈 공간에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더해지며, 내가 휘두르는 성검 가이아에는 혈마의 향이 더욱 짙게 묻어나기 시작한다.

수련을 거듭할수록 나를 가르친 두 명의 스승에겐 경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유한한 삶 속에서 이토록 완벽한 검술을 만들어 낸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남은 시간: 3일 8시간]

사흘째의 수련이 끝났을 무렵, 나는 처음으로 저 멀리 우주 끝에 있는 수라마혈검의 궁극을 본 것만 같았다.

물론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남자에게 물었다.

“지금의 나와 무림맹주님의 경지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맹주님은 여전히 하늘이시고, 당신의 언덕은 놀랍게도 조금 더 솟아오른 느낌입니다.”

이 남자의 판단이 맞을 것이다.

무림맹주는 사부와 비교해서 떨어지는 경지일 뿐, 아직은 나에게 태산처럼 큰 인물.

하지만 내게는 사흘의 시간이 더 남아 있다.

수련 넷째 날.

이미 예상했던 커다란 벽을 만나고 말았다.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발전 속도를 받쳐 주지 못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다름 아닌 마나의 부족.

수라마혈검의 후반부 절기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다.

아쉬운 점은 마나는 내공심법을 통해서도 단번에 비약적으로 높일 수 없다는 것.

가장 빠른 해결책은 영약이나 아이템을 흡수하는 것인데,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나의 마나수는 아직까지 깜깜무소식이다.

‘도대체 얼마나 큰 열매를 맺으려고.’

분명 기다림의 과실은 크겠지만, 현재로선 늦어지고 있는 수확이 아쉬울 뿐이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나 운용의 효율을 높은 일.

군더더기를 줄이고 조금 더 정제된, 완벽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 2일 8시간]

나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어제와 다르게 심각하다.

오늘도 그에게 물었다.

“나흘이 지났습니다. 이제 나와 맹주님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맹주님은 하늘, 그럼 저는 뭡니까?”

“당신은……. 이제 작은 산인 것 같습니다.”

남자의 대답처럼, 나 역시 느끼고 있었다.

하루 만에 달라진 나의 경지를.

물론 맹주와 나 사이에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차이는 분명히 줄어들었다는 점.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나고 나면 그 차이는 더욱 줄어들어 있을 것이다.

수련 다섯째 날.

오늘은 모든 시간을 명상으로 보냈다.

지난 나흘간의 수련을 반추해 보니 놓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혜의 버프란 실로 놀랍기만 하다.

수십, 수백 년은 검을 휘둘러야 보일까 말까 한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준 것.

다시 한번 큰 벽을 뚫고 나온 느낌이다.

확인을 해 봐야겠다.

쉬이익!

오늘 처음으로 휘두른 성검 가이아가 허공에 직선 하나를 그려 낸다.

휘황찬란한 검기의 발출도, 그 어떤 화려함도 없는 단 하나의 직선.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일검이었다.

[남은 시간: 1일 8시간]

묵묵히 나를 관찰하고 있던 남자 역시 눈빛이 흔들린다.

그 또한 느낀 것이다.

어제와 다시 한번 달라졌음을.

“이제는 어떻습니까? 하늘과 저를 비교한다면.”

이번에도 남자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우뚝 솟은 태산과도 같습니다.”

역시 놀랍다.

한순간의 검격만을 보고도,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다니.

무림맹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이제는 그만 올라가 보셔도 좋습니다. 마지막 하루는 모든 시간을 명상으로 보낼 것 같으니 말입니다. 물론 혼잣말도 없을 겁니다.”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키라는 명이 있었으니 명상의 모습들도 잘 기록해 두겠습니다.”

그것까지는 내가 말릴 수 없는 일.

사실 나였어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무림의 은밀한 전설이 지금 막 태동하고 있음을 느꼈을 테니까.

“좋습니다.”

나는 다시 마지막 날의 수련에 돌입했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정말 오롯이 명상만을 할 생각이다.

이제 내겐 검을 몇 번 더 휘두르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깨달음의 작은 물줄기들을 통합하여 큰 강을 이루는 것. 그것이 오늘 내가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정말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남은 시간: 8시간]

드디어 무림맹주와 약속한 시각이 찾아온 것이다.

* * *

엿새가 아닌,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으면 없었을지도 모를 비무.

그랬다면 아주 편하게 3회차의 퀘스트를 클리어했을 것이다.

클리어의 조건은 단 하나, 생존뿐이니까.

하지만 검을 익힌 검투사로서 이런 절대고수와 검을 섞어 보고 싶은 욕구는 생존에 대한 본능만큼이나 강했다.

그리고 엿새의 시간은 부족하지 않았다.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군. 느껴지는 내력은 그대로인데 뭔가 확실히 달라졌어.”

주정천은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 바로 나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믿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착각하지 마라. 고금제일의 검술이란 얘기까지 믿는 것은 아니니.”

“이제 믿게 되실 것입니다.”

“그건 곧 확인될 일. 바로 시작해 보도록 하지.”

비밀 비무였기에, 참관자는 채이설 그리고 지난 엿새 동안 나의 모든 행적을 기록한 한 남자뿐이다.

나는 성검을 들어 올렸다.

하루 만에 잡는 검의 감촉이 낯설기만 하다.

나는 단전의 마나를 끌어 올려, 온몸 곳곳에 은은하게 순환시켰다.

감각이 예민해지며 맹주가 뿜어내는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맹주를 하늘이라 표현한 남자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 받아 보아라.”

맹주의 일검이 곧바로 쏘아져 다가온다.

하나의 작은 점이었던 검 끝은 질풍처럼 날아와 태산이 되었다.

엿새 전, 맹주전에서 이미 세 번의 공격을 받아 보았지만 지금 이 공격은 기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이전에 느낀 것이 살기를 가득 품은 뱀이었다면, 이번에는 온몸을 덮쳐 오는 거대한 태풍과도 같다.

피한다 한들 소용없을 것이다.

이다음 수는 더욱 빠르게 나의 목을 노리며 들어올 테니까.

또한 수라마혈검의 본질은 부드러움이 아닌 강함에 있는 것.

부러질지언정 휘어져서는 안 된다.

콰아아앙!

검 끝과 검 끝이 부딪히며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자연스레 세 걸음이 밀려난다.

역시 마나의 열세는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나보다 더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 것은 고목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주정천이었다.

“놀라운 일이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고금제일의 검술이라고.”

사부가 이 상황을 보고 있다면 기함할 말이지만, 지금은 익스큐즈 될 수 있는 상황이라 믿는다.

“그리고 계속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좋다. 들어와라!”

주정천의 기세가 다시 한번 달라졌다.

일검의 교환만으로도 느낀 바가 있었을 테니까.

적어도 나의 약속이 마냥 거짓이 아니었음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스페셜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신의 검에 주정천의 피를 묻히십시오.]

[보상: ???]

엿새간의 수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기는 했으나, 내겐 여전히 거대한 무림맹주 주정천.

하지만 이번 퀘스트가 마냥 무리인 것 같지는 않다.

나에겐 아직 사용하지 않은 패가 있으니 말이다.

- 26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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