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지금 내가 붙잡혀 온 이곳은 무림맹의 지하 뇌옥.
혈도를 제압당해 사지는 마비되어 있으며, 구강 주변의 근육만 간신히 움직여 목소리만 낼 수 있는 상태이다.
‘무림맹주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
사부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맹주 노인네의 혈도를 점하는 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체내에 마나가 지나가는 모든 통로들 앞에 거대한 바위가 가로막은 것 같은 느낌.
이쯤 되면, 그 누구라도 제압당한 혈도를 풀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절대 감각이 있는 나는 빼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괜히 답답하다고 혈도를 풀었다가는 일이 꼬일 수 있으니 지금은 잠자코 있어야만 한다.
기회가 온다면 찰나에 혈도를 풀 수 있도록 머릿속으로 예행 연습만 충분히 해 놓으면 될 것이다.
느낌상으로는 0.01초 컷이다.
현재 옆방에선 채이설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고 있다.
심문을 주관하는 것은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서량인데, 다행스럽게도 호위무사 둘만 데리고 지하 뇌옥으로 들어와 있다.
우리의 혈도를 제압한 게 무림맹주이니, 이게 풀릴 거라고는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공도 약한 문인 출신 군사가 겁도 없이.
나는 절대 청각을 일으켜, 옆방에서 제갈서량이 채이설을 심문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총군사답게 대화를 이끌어 가며 질문을 하는 방식이 꽤나 지능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채이설이 유도신문에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내가 지속적으로 텔레파시를 보내어 그녀의 대답을 컨트롤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내 아바타인 양, 내가 전송하는 말들을 충실히 따라 주었다.
- 이 질문은 그냥 모른다고 하세요. 이설 씨는 그저 저를 따라온 하수인일 뿐입니다. 어색하지 않게 모든 책임과 대답을 저한테 미루도록 하세요.
“모, 모릅니다!”
“모른다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는 것처럼 얘기했잖아!”
“그냥 저는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저에게 아무리 추궁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생각보다 채이설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냥 순진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순진한 연기를 이렇게 잘하다니.
잠시 후, 제갈서량은 처음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채이설이 유도신문에 넘어오지 않자, 꾹꾹 누르고 있던 화가 폭발한 것.
“옆방에서 심문을 한 뒤 다시 오겠다! 만약 두 사람의 말이 서로 맞지 않으면, 그땐 네년의 팔 한 짝을 자르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협박하셔도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콰앙!
옆방에서는 철문이 거세게 닫혔고, 내가 갇힌 방의 문이 삐그덕 거리며 열린다.
제갈서량이 호위무사 둘을 대동하며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제갈서량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덩치의 무위가 관건.
일단, 느껴지는 기감으로 판단해 보자면 둘 다 일류 고수들이다.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까?’
소동이 일어나는 건 곤란하다.
이곳이 제아무리 깊은 지하 뇌옥의 내부라 해도, 무림맹의 초고수들은 작은 소동도 감지해 낼 수 있는 자들이기에.
단말마의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도록 아주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다.
“지금부터 넌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해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잔꾀를 부릴 생각이 있다면 넣어 두도록! 방금 옆방에서 충분한 정보를 확보했으니 말이다.”
충분한 정보라니.
순간 실소가 새어 나오려는 걸 참아야만 했다.
“18호가 정말로 무언가 이야기했다는 말씀이십니까?”
“18호? 그건 이 옆방에 있는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냐?”
“거기까진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하긴 이런 호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순간 제갈서량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생각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럼 넌 몇 호지?”
“17호입니다!”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믿든 믿지 않든 일단 질러 놓고 보기로 했다.
어차피 길게 대화할 이유도 없고, 기회를 틈타 바로 제압 모드로 들어갈 생각이다.
“좋아. 그럼 가벼운 질문 하나만 하고 시작하지.”
그리고 그 기회는 시작부터 찾아오는 것 같다.
제갈서량이 날 겁박하려는 의도로 호위무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어 내 목을 겨눈 것.
“미리 경고하는데 잘 생각하고 대답하도록 하여라.”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저도 한 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건방진 놈! 말해 보거라. 만약 실없는 이야기라면 손가락 하나를 잘라 줄 테니.”
“절대 실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냐!”
“혹시 제 손안에 무언가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순간, 제갈서량의 시선이 축 늘어진 나의 손을 향한다.
“사지가 제압당한 네놈의 손에 보이긴 뭐가 보인다는 것이냐!”
역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이미 홍염의 불도깨비가 소환되어 내 손에 쥐어져 있거늘.
제갈서량을 비롯한 호위무사들 모두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
‘예전과 다르지 않군.’
이전의 무림 미션 때도 같은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손서연이 총을 쏘아도 무림의 사람들은 그 실체를 전혀 보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형식의 탄지공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지금의 내 경우도 그렇다.
“그럼 제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이번에는 세 사람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한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나는 절대 감각을 활성화시켜 제압된 혈도를 단번에 풀어 버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0.01초 컷.
피융!
피융!
피융!
홍염의 불도깨비는 조용히 마탄을 세 번 뿜어냈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머리통에는 동전만 한 구멍이 생겨 버렸다.
‘운이 좋군.’
만약 이들이 지금처럼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찰나의 소란은 일어났을 터.
하지만 초근접 거리에서 쏘아 낸 마탄은 일말의 자비 없이 세 사람을 절명으로 이끌었다.
나는 곧바로 옆방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철문은 잠겨 있지 않은 상태.
“호영 씨! 어떻게 여기에!”
“설명할 시간은 없고, 그럼 이제 탈출해 볼까요?”
“알겠어요! 그런데 지상에는 무림맹의 무사들이 쫙 깔려 있을 텐데!”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어요. 그 전에 이설 씨에게 실례 좀 하겠습니다.”
“실례요?”
타아악!
설명 없이 바로 채이설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인피면구의 성가신 설정 때문이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인피면구의 사용을 들켜 버리면 그 기능이 상실되기에, 하는 수 없이 채이설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인피면구를 사용합니다.]
변장 대상은 제갈서량.
물론 이것만으로 탈출을 장담할 수는 없다.
내게 무림맹이라는 장소는 너무나 생소한 곳이니까.
[테이아의 날개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허공답보의 수준으로만 사용 가능합니다.]
혹시나 하고 시험해 봤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날개의 기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는 상태.
무림에는 총이라는 문물이 존재하지 않기에 탄지공이라는 무공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테이아의 날개 또한 허공답보로 대체된다는 걸 확인했다.
탈출용으로 날개를 믿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지하 뇌옥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선.’
무림맹의 지하 뇌옥은 규모도 클뿐더러, 그 형태가 미로처럼 통로가 얽혀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이 안에서 길을 잃기 십상.
다행히 뇌옥의 깊숙한 곳까지 끌려오는 동안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 놓았다.
33층의 텃밭에 지혜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니, 이 정도의 두뇌 작용은 이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서둘러 왔던 길의 반대쪽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철문들의 틈 사이로 죄수들이 은은하게 풍기는 기운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들 중 누군가는 무림맹 사상 초유의 죄수 탈출 상황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지하의 통제된 환경은 무림인들의 기감을 발달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니까.
쿠웅!
아니나 다를까 저 앞에서 철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구해 달라는 신호겠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없다.
내가 무림에 머무는 시간은 단 72시간.
이곳의 일에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선이든 악이든 자기들끼리 알아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대는 신교의 형제인가?”
철문 뒤에서 중후한 음성이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저 물음은 확신에 가까운 미묘한 기류를 풍기고 있었기에.
“무얼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그대가 일으키고 있는 마력의 운용, 그것에서 천마신교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가? 혹시 내 말이 틀렸는가?”
틀리지 않다.
내가 익히고 있는 무공의 근간은 천마신교로부터 나온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신교의 형제라 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분명 있다.
비록 천마의 후예이긴 하나, 내가 차기 천마로서 신교를 이끌 일은 영원히 없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지금 철문 뒤에서 말씀하고 계신 분은.”
“나? 무림맹의 전대 장로일세. 이름은 석영이라 하는데 혹시 들어 보았는가?”
“알지 못합니다.”
신분이 의외일 뿐이다.
신교의 형제를 운운하기에, 천마신교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긴 천마신교 출신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군. 십만대산에서 폐쇄적으로 살았을 테니 말이야. 그럼 혹시 음제(音帝)라는 별호에 대해서는 들어 보았는가?”
“죄송하지만, 관심 없습니다. 서둘러 나가 봐야 해서 말입니다.”
“허허. 신교의 형제가 음제를 모르다니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군. 맥이 좀 빠지지만 이쯤에서 밝혀야겠어. 음제(音帝)는 신교에서 본인이 약관의 나이에 얻었던 별호라네. 분명 신교 내에서는 전설로 남았을 텐데 정말로 모르는 겐가?”
발길을 떼려다가 다시 또 멈추게 된다.
방금 이자가 밝힌 자신의 정체, 천마신교에서 무림맹으로 파견된 세작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었다.
스파이로 무림맹에 들어와 장로의 신분까지 오르다니. 분명 수십 년의 세월을 무림맹에서 보냈을 텐데 이쯤 되면 사상이 개조되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군요.”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으니 내가 뇌옥에 갇힌 얘기는 각설하고, 일단 날 좀 여기서 꺼내 주게나. 설마 신교의 형제가 날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제가 신교의 형제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만.”
“참 흥미로운 친구로구만. 끊임없이 황당한 말을 하고 있어. 어쨌든 상황이 다급한 것 같으니 솔깃한 이야기를 하나 해 주겠네.”
“뭡니까?”
“날 꺼내 주면 탈출이 훨씬 더 수월해질 거야. 이 무림맹의 구조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한 말이긴 하다.
무림맹에서 보낸 수십 년의 세월, 거기에 장로의 지위. 세작 노릇까지 했다면 진짜 무림맹의 사람들보다 무림맹에 대해 더 빠삭할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꺼내 드리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사람 하나만 업고 뛰십시오.”
채이설이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양손이 좀 더 자유로울 필요는 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말이다.
“노인에게 그런 제안을 하다니, 무림의 예의범절이 땅에 떨어졌군. 천마신교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야.”
“신교에 그런 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크크크. 자네 말이 맞네.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 어서 꺼내 주게나.”
[남은 시간: 70시간 8분]
무림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은 아직도 길다.
일단, 무림맹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 과제.
이 노인을 꺼낸 일이 신의 한 수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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