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도플갱어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의 의미는 상당히 컸다.
손서연은 이제 곧 탑의 최종층으로 향한다는 것.
‘……내 생각이 틀렸었군.’
사실, 현시점에서 탑의 최종층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혈마의 말에 따르면 탑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는 상태라고 하였으니까.
고로, 탑의 가장 높은 층이 탑의 최종 스테이지는 아닐 거란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은 이런 것이었다.
플레이어들이 가장 높은 층을 클리어하고 나면, 더 높은 층이 또 생겨나는 과정의 무한 반복.
생존 중인 모든 플레이어가 죽을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도플갱어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가정하에 현시점에서 탑의 최종층은 분명 존재하며, 이를 바탕으로 탑의 형태에 대한 가능성은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는 탑이 모든 증식을 끝마친 채 현시점에서 완성된 채로 존재한다는 것.
이 경우, 탑이 몇 층까지 뻗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플레이어들은 탑의 유한함에 희망을 걸고 등반을 도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지 않은 채 오르고 또 오르면 언젠가는 최종층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탑의 형태에 대한 두 번째 가능성은 이보다 더 비관적이다.
바로 탑의 최종층은 존재하되, 그 아래쪽으로는 증식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
이 경우는 내가 가정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충분히 가능하다.
혈마의 말에 따르면, 현재 탑의 증식 속도는 플레이어의 등반 속도보다 빠르다고 하였으니까.
어찌 되었든 탑의 최종 스테이지가 현시점에서 존재한다는 건 내게는 고무적인 일이었다.
성검을 이용하여 탑의 최종층을 향하는 포털도 기대해 볼 수 있게 되었기에.
그리고 도플갱어가 남긴 말을 잘 뜯어서 생각해 본다면, 고무적인 사실이 하나 더 있다.
탑의 최종층으로 향하는 것이 손서연이라는 점.
이것은, 내가 그동안 탑의 최종 스테이지에 대해 막연히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혹시 탑의 최종 스테이지에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그 존재들과 말도 안 되는 격의 차이를 실감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을까? 결국 이것이 바로 탑이 설계해 놓은 시나리오는 아닐까?
그리고 이런 식의 상상은 내게 막연한 두려움을 주곤 했다.
하지만 탑의 최종층에 손서연이 존재한다는 건 그와는 다른 이미지를 상상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도플갱어가 사망하였습니다.]
그 순간, 채이설의 검에 의해 고용우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그녀가 해낸 것.
사실 살짝 걱정도 했지만, 역시 채이설은 보기보다 단단한 구석이 있다.
“이호영 씨! 저도 성공했어요!”
“수고했어요. 이설 씨.”
[퀘스트가 클리어되었습니다.]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호감도: -10]
여전히 마이너스지만, 예상보다는 더 높아진 호감도.
손서연이라는 스탯 괴물을 대전 상대로 지목한 이유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녀를 가볍게 제압한 모습이 더욱 주효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번 층의 클리어 보상은 탑에 대한 질문권이며, 좀 더 성실한 답변을 듣기 위해선 최대한 호감도를 올릴 필요가 있다.
“놀랍소!”
멀리서 대전을 지켜보고 있던 옴팔로스가 다가왔다.
“아쉽게 됐습니다. 옴팔로스 당신은 내 죽음을 많이 기대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사실 그랬었지. 하지만 당신에 대한 내 평가를 일부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군.”
“겨우 일부만 말입니까?”
“이호영 당신이 손서연을 이긴 건 결국 템빨 때문이었을 테니까. 뭐 그래도 대단하긴 했소. 엄청난 레벨의 차이를 극복한 건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지.”
옴팔로스의 능력은 역시 제한적이다.
내가 손서연을 이긴 걸 온전히 템빨 탓으로만 생각하다니.
어쨌든 호감도가 올라가며 나에 대한 적대감이 확연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자, 그럼 여기서 당신들은 선택을 해야만 하오. 다음 퀘스트에 도전하겠소?”
옴팔로스의 말에 채이설은 나를 보며 머뭇거리는 모습이다.
그녀로서는 부담스러운 상황이긴 하다.
이미 공지된 대로 2회차 퀘스트의 클리어 확률은 55%.
겨우 절반이 약간 넘는 가능성에, 질문권 하나를 더 얻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호영 씨.”
그녀는 나를 불러 놓고도 딱히 말을 잇지 못한다.
내 눈치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이설 씨. 내가 약속할게요.”
2인용 퀘스트이기에, 나 혼자 독단적으로 도전을 결정할 순 없다.
그녀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
물론 그녀는 나의 뜻을 따라 줄 것이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호영 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채이설이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그때 옴팔로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두 사람을 위해 한마디 해 주겠소. 아니, 정확하게는 아가씨를 위한 조언이지.”
이놈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만 들어 볼 필요는 있다.
호감도가 높은 채이설을 위한 조언이라 했으니 적어도 헛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2회차 퀘스트의 클리어 확률은 55%. 이것은 두 사람의 스탯이 모두 반영되어 계산된 수치라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호영 당신의 템빨이 상당한 모양인데, 그것만 믿고 2회차 퀘스트에 도전했다가는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이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2회차 퀘스트의 클리어 확률 55%는, 이제 당신이 1회차 때 보여 준 퍼포먼스마저 감안하여 계산될 것이라는 이야기요. 템빨까지 포함해서.”
“이제 와서 이런다고요? 조금 억지스럽습니다만.”
“탑이 원래 이런 곳이라는 걸 몰랐소?”
물론 알고 있다.
그래서 항상 빌어먹을 탑이라 부르는 것이고.
“조언은 감사합니다만, 제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설 씨만 괜찮다면 전 여전히 2회차 퀘스트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1회차 퀘스트 때 보여 준 퍼포먼스를 감안하여 55%의 확률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여전히 희망적이다.
내겐 아직 밑천이 한참 더 남아 있으니까.
“그렇다면 저도 호영 씨의 뜻에 따를게요.”
역시 채이설이라면 협조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옴팔로스는 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참 단순한 아가씨로군. 내가 특별히 생각해서 알아듣게 설명을 해 줬는…….”
“감사하지만 더 설명 안 해 주셔도 돼요! 저는 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과 파티를 진행하고 있으니까요.”
채이설은 다시 한번 도전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 주었다.
나에 대한 믿음이 고마울 뿐이다.
“쳇! 후회해도 소용없소!”
[2회차 퀘스트에 도전합니다.]
[퀘스트 선정을 위한 랜덤 주사위가 돌아갑니다.]
쉽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충분히 극복 가능한 수준일 터.
질문권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다.
[퀘스트가 결정되었습니다. 2회차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순간, 주위의 배경이 변하였다.
* * *
[72시간 동안 생존하십시오.]
암전이 끝나고 세상이 밝아지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옴팔로스의 경고가 마냥 헛소리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새로운 세상에 떨어진 나와 채이설을 향해 열두 명의 인물들이 검을 겨누고 있다.
이 열둘이 평범한 열둘이었다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당신이 현재 전송된 곳은 무림. 그중에서도 무림맹 본단의 수뇌부 회의장이며, 지금 당신을 위협하고 있는 열두 검객은 무림맹주를 비롯한 정파의 초절정 고수들입니다.]
느껴지는 기감도 살벌했지만, 공략집이 밝힌 이들의 정체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무림맹의 수뇌부라니.
무림맹에 대해서는 탑 초반의 무림 미션 때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정파의 거두. 당연히 이들 한 명 한 명의 기운은 나를 상회한다.
‘하필 떨어져도 이런 곳에!’
일단은 정체를 밝히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우리는 본래 무림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더욱이 이런 초고수들의 기감을 피해 수뇌부 회의장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미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른 생존 방법을 찾으십시오.]
공략집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림에서 이 열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건 사부 외에는 없으니까.
공략집은 그렇게 도움 안 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야만 한다.
미션의 조건은 72시간 생존.
최대한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저희의 정체에 대해선…… 밝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상한 존재인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무엇보다 사파 혹은 마교 출신으로 오해받아서는 곤란하다.
“밝힐 수 없다?”
“그렇습니다.”
중앙에 위치한 한 남자의 손짓에, 모든 이들이 일시에 검을 내린다.
이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무림맹주 주정천.
나와 채이설이 뿜고 있는 기세가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자객치고는 황당한 반응이로군. 정체를 감추기 위해 바로 자결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객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내 말에 주정천은 흥미로운 미소를 짓는다.
“뻔뻔한 자들이로군.”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단둘이 무림맹에 암살을 하러 쳐들어오겠습니까? 그것도 이 벌건 대낮에 말입니다.”
“그건 확실히 그래.”
다행히, 주정천은 여유를 보이고 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옆집 아저씨의 눈빛. 물론 진면목은 전혀 다르겠지만 말이다.
“맹주님! 그런 반응을 보이시기에는 너무 수상한 자들입니다.”
“그래. 그것도 그렇지.”
“맹주님!”
“그렇게 다그칠 것 없다 월목아. 난 그저 궁금할 뿐이야. 이 두 녀석이 어떤 방식으로 아무런 기척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우리에게는 가장 난감하면서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는 설정이기도 하다.
평범한 자객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미스터리 한 면이 있으니까.
“자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대들에게 직접 묻겠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것이지?”
“죄송합니다. 맹주님. 이 또한 밝힐 수 없습니다.”
“허허! 이보게들. 밝히기 싫다고 그냥 막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네. 그대 둘이서 우리 모두를 제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일세.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대들에게는 그럴 정도의 힘은 느껴지지 않는데, 그렇게 우겨서야 되겠는가?”
“맹주님!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최대한 빠르게 이들로부터 모든 자백을 받아 내겠습니다.”
이들 무리 중 가장 젊어 보이는 남자가 나섰다.
풍기는 기운만을 놓고 보면 압도적으로 약하다.
피부 빛도 허여멀건 것이 전형적인 군사 타입.
“그래. 서량이, 자네에게 맡겨 보도록 하겠네. 알고 있겠지만, 입을 열기 전까지 죽여서는 곤란해. 팔이나 다리 한 짝씩 자르는 것까지는 허용해 주지.”
“명 받들겠습니다!”
무림맹주 주정천. 실실 웃는 표정으로 저런 살벌한 이야기를 잘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은 총 72시간.
물론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내 몸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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