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정말로 이설 누나인가요? 저를 선택한 사람이?”
“그래. 나야.”
고용우의 도플갱어는 채이설의 대답에 바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섭섭해요. 누나만큼은 나를 고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역시 본인이 살기 위해서 저를 희생시키기로 한 건가요?”
도플갱어는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지금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채이설의 멘탈을 흔들어 놓기 위함.
“수작 부리지 마!”
“수작이라니요? 저는 정말로 이설 누나와 목숨 건 싸움은 하고 싶지 않은걸요?”
말투나 표정의 디테일까지 고용우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한 모습에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네가 아무리 용우인 척해도 소용없어. 대전이 시작되면 난 주저 없이 네 목을 벨 거니까.”
“네. 사실 누나 말대로 저는 진짜 용우는 아니지요. 하지만 누나는 진짜 용우의 모습을 생각하며 저를 선택한 것 아닌가요?”
도플갱어 녀석이 제대로 준비를 하고 나왔다.
채이설은 분명 이런 멘트 하나하나에도 마음이 약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방금 전 내가 정신 교육을 시켜 놓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러니 다음부터 이런 식으로 소환되고 싶지 않으면, 고용우는 더 강해져야 할 거야. 물론 도플갱어인 네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채이설의 다부진 말투에 고용우의 도플갱어는 미간을 들썩이며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호오! 이건 내가 알던 채이설이 아닌데?”
“그럴 줄 알았어! 넌 역시 고용우가 아니야!”
“너무 당연한 얘기잖아! 역시 이호영이 미리 대비를 시켜 놓은 건가?”
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번 미소를 지어 주었다.
사실, 고용우의 도플갱어는 내 안중에 없다.
내가 오로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손서연의 도플갱어.
오리지널의 모습처럼, 그녀는 우수에 젖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실제 손서연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재회를 하게 되니 반갑기까지 하다.
“오랜만이야! 역시 살아 있을 줄 알았어.”
“…….”
느껴지는 기감이 보통은 아니다.
오리지널과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도플갱어는 내가 기억하는 손서연의 위압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상태창에 드러난 스탯만 봐도, 같은 살성인 남소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수준.
관건은 스탯으로 표현되지 않는 그녀의 진정한 실력이다.
“너는 반갑지 않은가 봐? 20층 피의 날 이후로 처음인데.”
“굳이 이럴 거 없다. 이호영. 내가 도플갱어라는 건 피차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거야 그렇지만, 넌 진짜 손서연과도 기억을 공유하는 사이잖아?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지냈던 거야?”
내가 도플갱어에게 다가가며 질문을 던지자, 옴팔로스는 곧바로 나를 제지하고 나선다.
“이호영 씨! 그런 종류의 질문은 금지되어 있소!”
“왜죠? 그냥 일상적인 대화일 뿐인데.”
“어쨌든 금지라면 금지인 것이오! 한 번만 더 이런 시도를 했다가는…….”
“알겠어요. 알겠어!”
아쉽다.
손서연은 현재 플레이어들과 격리된 채 탑으로부터 특별 관리를 받고 있는 살성.
도플갱어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탑에 대해 몰랐던 정보를 획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옴팔로스 녀석, NPC 주제에 사명감 하나는 쓸데없이 강하다.
“역시 대화가 길어지면 여러모로 좋지 않을 거 같으니, 바로 퀘스트를 시작하도록 하겠소!”
옴팔로스의 선언과 함께 두 도플갱어의 위치는 100미터 가량 후방으로 텔레포트 되었다.
하지만 거리와 상관없이 손서연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설 씨는 제 쪽은 신경 쓰지 말고 고용우만 상대하세요.”
“네. 가끔씩 상황 봐서 힐만 걸어 드릴게요.”
“아뇨. 힐도 걸 필요 없습니다.”
“네?”
“손서연은 오롯이 저 혼자만의 힘으로 처리할 겁니다. 그러니 이설 씨는 용우 쪽에만 집중하세요. 할 수 있죠?”
“물론이에요!”
“좋아요. 그럼 바로 시작합시다.”
나와 채이설은 서로의 타깃을 향해 교전 상태에 돌입했다.
손서연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러하듯 손서연 본인 역시 나만 상대하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엄청나게 성장했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태창에 드러난 손서연의 성장은 명백히 비정상적이다.
만약 40층 피의 날에 손서연을 플레이어들 사이에 풀어놓는다면, 탑의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는 황소개구리 수준.
그런 의미에서 손서연의 도플갱어를 소환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가장 어려운 상대를 고른 건 호감도를 높이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현재 나의 성취를 가늠해 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니까.
착!
나는 홍염의 불도깨비를 꺼내어 손서연을 향해 겨누었다.
그녀는 총을 꺼내 든 내 모습에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스텝을 밟으며 나를 조준한다.
어차피 우리 둘 모두 트리거를 당길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다면 선빵은 무조건 내가 차지할 생각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주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타아앙!
홍염의 불도깨비가 불을 뿜었다. 그러자.
타앙!
거의 동시에 그녀의 총에서도 굉음이 터져 나온다.
같은 총이지만, 아이템 등급으로는 내 쪽이 우위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홍염의 불도깨비는 이제 어엿한 신화급의 아이템.
‘신의 한 발’ 스킬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성능에서도 다른 총에 크게 밀릴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미세한 차이일지언정 타깃에 먼저 도달하는 것도 내가 쏘아 낸 탄환일 것이고, 사용자의 마나 수준이 같다면 더 큰 파괴력을 내는 것도 내 쪽이어야만 한다.
채애앵!
성검으로 탄환을 막아 낸 한쪽 팔이 찌릿하다.
‘손서연은?’
고고한 자세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전설 등급의 방탄복을 입은 걸 상태창을 통해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이런 식이라면, 내가 질 이유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
타아앙!
타아앙!
우리는 서로 한 발씩을 또 한 번을 교환했다.
달라진 점이라면, 내가 테이아의 날개를 펼쳐 그녀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것.
휘이이잉!
손서연은 여전히 내가 쏘아 낸 탄환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방탄복의 내구도가 제로가 될 때까지 그녀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이다.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물론 내 쪽도 마찬가지이다.
타아앙-
타아앙
방어구의 내구성에서도 내가 밀릴 일은 없다.
전설 등급이 풀하우스라면, 신화 등급은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시.
타아앙-
타아앙-
손서연 입장에선 설마 풀하우스를 들고도 질 거란 생각은 않겠지만, 많이 이상하긴 할 것이다.
서로 연사를 갈기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버렸으니까.
휘이이잉!
100미터 가량의 비행, 그 찰나의 순간에도 우린 이미 수십 발의 탄환을 교환했다.
그리고 비행의 끝자락에서 내가 선택한 마지막 일격은 총이 아닌 검.
성검은 공간을 찢으며 한 줄기 직선을 만들어 냈다.
순간 손서연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된다.
처음 본다.
항상 초연한 표정만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이런 파문이 일어나는 것은.
파앗!
손서연의 목에 붉은 선이 그어지며 핏물이 튄다.
놀라운 점은 그녀의 손가락은 죽어 가는 순간에도 여전히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는 것.
물론 팔라스의 방패는 여전히 가동 중이었다.
‘후우.’
한마디의 비명이나 신음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며 메시지가 전송된다.
[도플갱어가 사망하였습니다.]
동급 대결도 아닌 완벽한 승리.
나의 성장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채이설과 고용우는 이제 막 근접전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다.
시간은 좀 걸릴지 모르겠지만, 이 승부는 채이설이 무난히 가져간다.
그녀가 도플갱어의 이빨에 넘어가지 않고, 현재의 멘탈만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손서연이 죽었으니, 1회차의 퀘스트는 사실상 클리어된 셈.
눈뜬 채 죽은 그녀의 도플갱어를 보니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지금 이 상황은 사실 그녀가 우리 구역에 있는 동안 자주 상상했던 그림이었다.
만약 손서연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걸 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도플갱어가 아닌 진짜 손서연이 죽은 기분이 든다.
[하데스의 반지를 사용하여 죽은 자와의 대화를 시도합니다.]
유령 함대와의 전투에서 아이템을 얻은 이후 첫 개시.
물론, 정말로 작동될 거라 기대하진 않는다.
[사용 대상은 인간이 아닙니다. 혼령을 소환할 수 없습니다.]
도플갱어는 도플갱어일 뿐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역시나였다.
시도를 해 본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덕분에 메시지가 이런 방식으로 뜬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하지만, 사자(死者)의 주변에 기억의 파편이 존재합니다.]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도플갱어는 오리지널의 기억을 공유하는 존재이니, 실제 손서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옴팔로스의 방해만 없다면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손서연, 그동안 넌 어디에 있었던 것이지?”
나는 숨을 죽이고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 옴팔로스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 나에게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딘가에서 들려온 음성.
분명 내가 기억하는 손서연의 목소리였다.
- 하지만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겠지.
이 또한 손서연의 말투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 나는 탑이 부여한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홀로 여러 차원을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겐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플레이어들과 함께 있어 봐야 성가시기만 했을 테니까.
“많은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군. 이렇게 강해진 것을 보니.”
-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하긴.”
나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살성 중에서도 톱 티어인 손서연을 이렇게 가볍게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
- 네 덕분에, 진짜 손서연은 훨씬 가혹하게 구르게 될 테지. 이런 식으로 쉽게 깨져서는 안 되는 존재니까 말이야. 네가 아무리 대살성이라 해도.
“쉽게 져서는 안 된다? 왜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
-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인가?
“그래 정말로 몰라. 나는 살성도, 대살성도 아니니까.
진짜 손서연에게는 하지 못했던 말을 도플갱어를 통해 처음으로 털어놓게 된다.
물론 내가 살성이란 건, 손서연이 멋대로 오해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말이다.
- ……살성이 아니었다?
찐 당황이 묻어나는 말투를 보니 정말로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중요해? 어차피 넌 진짜 손서연도 아닌데.”
그리고선 다시 물었다.
무얼 위해서 손서연은 강해져야만 하는 것인지.
도플갱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게 답을 주었다.
진짜 손서연이었으면 침묵했을지도 모를, 그런 내용의 답을.
- 손서연은 곧 탑의 최종층으로 향하게 될 테니까.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플레이어로서 탑을 클리어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손서연이라해도 아직 그럴 능력은 되지 않고 말이다.
“최종층?”
하지만 그 이후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기억의 파편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충분히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은 셈이다.
도플갱어의 대답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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