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보는 탑 공략집-248화 (248/292)

248화

땅-땅-땅-땅-

쇠붙이를 두드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꽤 많은 인원이 신전에 모여 있는 것 같지만 절대 감각을 일으켜 귀를 기울여도,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이 안의 사람들이 오롯이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의미.

이따금씩 정순하면서도 안정적인 마나의 분출이 느껴지는 걸 보면,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모여 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안의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하는 건가?”

- 말했잖아. 네가 해야 하는 퀘스트는 섬멸이라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 그래.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지만 난 이미 내 신념에 대해 밝혔어. 무고한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고.”

- 그 빌어먹을 신념 때문에 퀘스트를 두 번이나 날렸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너에게 딱 맞는 퀘스트를 준비한 것이고.

“그게 이해할 수 없는 점이야.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단지 어느 한 군주를 신봉하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인가? 죽어야 할 만큼?”

디나는 워낙 자신만만했기에, 더욱 의문이었다.

이 신전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의 수용소가 아닌 이상,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죽어 마땅한 악인이라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 흐음. 지금 이 상황을 이해시키려면 금단의 이야기를 누설해야 하는데, 그냥 날 믿어 주면 안 될까?

“여기까지 얘기를 꺼냈다는 건, 말해 주겠다는 의미잖아. 사양 않고 들어 볼게. 그 금단의 비밀이란 걸 말이야.

내 말에 디나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 하여간 대단해! 이렇게 나오니깐 말을 안 해 줄 수가 없잖아?

그녀는 기습적으로 내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후, 말을 이어 갔다.

또다시 눈 뜬 채 당하고 만 것이다.

- 지금 네가 도전하고 있는 37층은 플레아 대륙이지. 그런데 37층엔 한 가지 아주 특이한 사실이 있어.

“말해 봐.”

- 37층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플레아라는 것이야.

디나는 그렇게 대답해 놓고는 내 반응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는다.

“난 또 뭐라고. 그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잖아. 탑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나드는 곳이니까.”

심지어 나는 탑에서 회귀도 해 본 적이 있다.

- 하긴, 넌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해 보았겠군. 그런데 37층이 특별할 거 없다는 네 말은 완전히 틀렸어. 이곳 플레아 대륙에는 네가 상상도 못 할 특별한 점이 하나 있거든.

“상상도 할 수 없다? 혹시 플레아 대륙이 미래에 멸망이라도 하는 건가?”

- 참 허무맹랑한 상상이로군!

하지만 디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얻어걸린 모양이다.

- 그래도 한 번에 맞혀 버렸잖아!

“……그렇군.”

이미 멸망해 버린 세상의 과거에 와 있단 사실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다.

내가 살던 지구 또한 그렇게 되었을 테니까.

- 이 세계의 멸망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존재들이 있어. 그건 바로…….

“저 신전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거로군.”

- 그래. 멸망은 이미 정해진 미래지. 플레아 대륙을 과거로 회귀시킨 뒤 수백 차례 돌려 봤는 데도 결과는 항상 같았어. 디테일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 대륙의 결론은 항상 멸망. 그러니 멸망을 막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야. 저 신전 안에 있는 대장장이들을 섬멸하는 것.

“도대체 저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기에?”

느껴지는 기감만 놓고 보면 신전 안에 대단한 실력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만약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이 안에 있었다면, 디나게 내게 이러한 퀘스트를 부여했을 리도 없을 테고 말이다.

- 이 신전 안에서는 멸망의 무기가 탄생하게 될 거야.

디나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멸망의 무기? 고작 무기 하나로 세상이 망한다는 의미인가?”

- 그래. 놀랍게도 그 무기 하나 때문에 멸망은 예외 없이 일어나더군.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였지.

“도대체 어떤 무기이기에!”

- 무엇이라고 딱 정해져 있지는 않아. 수백 번이나 이 세상이 반복될 때마다 무기의 종류도 달랐고, 탄생 되는 시기도 달랐으니까.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단 하나의 사실. 그 무기는 언젠가 이 플레아 대륙을 멸망시킨다는 것이야.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인과율인 것이지.

“언젠가 꼭 한 번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라…….”

- 그래.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야.

“일단 신전 안에 한번 들어가 봐야겠군.”

흥미가 동하는 일이다.

투철한 불꽃의 절름발이, 그 군주를 신봉하는 자들이라면 정말로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낼 거란 믿음이 내게는 있다.

과거, 어느 한 대장장이는 단독으로 테이아의 날개를 만들어 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개인이 아닌 상당한 규모의 집단, 더욱이 군주를 모시는 신전이란 장소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엄청난 것이 만들어질 터.

멸망의 무기라는 표현에도 어쩌면 전혀 과장됨이 없을 것이다.

* * *

신전 내부의 모습은 밖에서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신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대장간.

쇳덩이를 두드리는 소리와 타오르는 화로의 열기가 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나는 신전의 이곳저곳을 거닐며 대장장이들의 모습을 관찰하였다.

“내가 관상학자는 아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아.”

- 하지만 이들이 만든 무기로 인해 세상은 멸망하였지. 믿지 않는 것 같으니 한번 보여 줄까?

따악!

디나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내 앞에는 환영의 세계가 대장간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펼쳐진다.

그곳에서 대장장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일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이곳의 지도자로 보이는 한 노인의 손에는 투박해 보이는 철궁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 멸살궁이로군.

“저것이 멸망의 무기인가?”

- 그래. 저 무기로 인해 플레아 대륙 전체는 전쟁의 피바람에 물들게 되었고, 결국 모두는 공멸하고 말았지.

환영은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돌리며 내게 그 끔찍한 참상을 보여 주었다.

디나의 말대로 명백한 세상의 멸망이었다.

잠시 후, 주변의 배경이 바뀌며 또 다른 모습이 환영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번에는 멸살궁이 아닌 지옥검.

하지만 디나의 말대로 똑같은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다.

멸망.

그 이후에도 온갖 멸망의 무기들이 탄생하였지만, 그 결말은 한결같았다.

- 자, 이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지? 그럼 부담 없이 죽여 봐!

“급해 보이네. 디나?”

- 네가 이런 식으로 지지부진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지금쯤이면 슬슬 37층의 고수들을 암살하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넌 여전히 시작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잖아?

디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태창에는 퀘스트 카운트다운이 표시되었다.

[퀘스트 제한 시간: 3시간]

- 자! 이번에는 정말로 성공해 보는 거야, 이호영. 플레아 대륙의 존망이 네 어깨에 달려 있는 순간이라고!

어처구니가 없다.

난 지구에서 온 일개 플레이어일 뿐인데, 한 세계의 멸망이 내 어깨에 달려 있다니.

[호감도: 84]

차원의 틈새에서 제나로부터 받은 경고를 무시할 수 없으니 무조건 이번 퀘스트도 건너뛰어야 하지만, 그 명분을 얻기가 쉽지 않다.

이곳의 대장장이들이 직접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인과율을 탄생시키는 것도 사실이니까.

“내가 여기에서 무슨 짓을 하든, 대장장이들을 모두 죽이지 않는 이상 멸망의 무기는 무조건 탄생한다는 거지?”

- 그래. 무조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무기의 탄생을 퀘스트 제한 시간인 3시간 내에 발생시키고, 37층의 세계관에서 그 무기를 없애 버리는 것.

멸망의 인과율을 끊어 버릴 수 있다면, 대장장이들이 죽어야 할 이유도 사라져 버린다.

‘서둘러야겠군.’

이 신전에서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

환영 속에서 매번 멸망의 무기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대중들의 환호를 이끌어 낸 이 신전의 지도자.

절대 감각이 가동되며, 내 두 눈동자는 신전 내부를 빠르게 스캔하기 시작한다.

찾았다!

이 신전의 가장 높은 곳. 제단 위에서 고고한 표정으로 쇳덩이를 두드리고 있는 노인이다.

환영 속의 모습보다는 젊어 보이지만,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게 패여 있는 이 신전의 최고 연장자.

아마 현시점에서도 대장장이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인피면구를 꺼내어 얼굴에 부착시켰다.

- 이호영!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세상의 멸망을 막아 보려고.”

부디 모든 일들이 내 계획대로 되길 바랄 뿐이다.

* * *

대애앵!

신전의 제단 쪽에 위치한 거대한 종이 공명하자, 모든 대장장이들은 일시에 작업을 멈춘다.

더 이상 신전 안에서는 망치질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소름 돋을 정도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일시에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들. 이 모습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랜드 마이스터시여!”

정적을 깬 것은 제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작업을 하던 한 노인이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계시를 받았다.”

그렇게 화두만 던져 놓고는 반응을 기다려 보았다.

이곳은 나에게 생소한 장소.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낄 필요가 있다.

“오오! 정말이십니까? 그랜드 마이스터시여!”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전의 곳곳에서는 탄성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는 다시 찾아온 고요함.

모두의 시선이 내 입술을 향하고 있다.

나는 잠시 침묵으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모두 잘 듣도록 하여라! 오늘은 우리에게 아주 위대한 날이 될 것이다!”

사실, 멸망의 무기가 어떤 식으로 탄생하는지는 모른다.

환영이 내게 보여 준 것은 여기 있는 대(大)화로에서 나온 무기를 집어 드는 장면뿐이었으니까.

나는 환영 속에서 본 그 노인의 표정과 말투를 최대한 흉내 내며 말을 이어 갔다.

“오늘! 우리들의 손에 의해,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걸작이 탄생할 것이다!”

나는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퀘스트 제한 시간은 이제 세 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

나에게는 큰 도박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일명, 멸망의 무기가 탄생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 이호영, 너 이건 너무 무리수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디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서, 설마. 멸망의 무기를 당장 만들어서 파괴해 버리려고?

그렇지 않다.

파괴해야 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나는 이곳 플레아 대륙을 곧 떠날 몸. 나와 함께 그 무기는 이곳을 떠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37층의 멸망의 인과율을 끊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 너무 무모해. 멸망의 무기가 네가 원하는 타이밍에 뚝딱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투철한 불꽃의 대장장이는 못생긴 이들에게는 아낌없이 버프를 베푸는 군주, 나는 인피면구를 한 번 더 사용할 생각이다.

세용이의 힘을 빌린다면, 어쩌면 오늘 멸망의 무기를 탄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 249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