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내 앞쪽 테이블에는 칩들이 쌓여 가고 있었다.
이 하우스에서 돈을 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가지 원칙만 지키면 된다.
레이스는 조작되지 않은 좋은 패가 나왔을 때에만 가는 것.
쟈크 일당이 매번 패를 조작할 순 없기에 좋은 패는 아주 자주 나왔다.
“말도 안 돼! 세 번 연속으로 그런 패가 나온다고?”
니케의 행운 보정은 이런 류의 도박에 극강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제가 오늘 운이 좀 좋은가 봅니다.”
나는 테이블의 가운데 쌓인 칩들을 내 쪽으로 쓸어 담았다.
이번엔 꽤 큰 판이었다.
초조해진 쟈크 일당 너무 무리하게 레이스에 따라왔으니까.
“운? 지금 이게 운으로 되는 거야?!”
“씨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져 버렸다.
“제가 운이 좋은 걸 어쩌겠습니까? 흥분들 가라앉히시고 다음 게임이나 진행하시죠?”
“게임 진행이고 나발이고, 하나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어!”
“뭘 말입니까?”
“속임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말이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녀석들의 입에서 속임수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럼 뭐, 확인해 보시죠. 어떤 식으로 제가 속임수를 썼는지.”
최대한 협조를 해 줄 생각이다.
행여라도 이 쟈크 일당이 나쁜 형님들로 돌변하는 상황만은 막아야 하니까.
[퀘스트 제한 시간: 23분 14초]
“옷 수색 좀 해 보지?”
“좋을 대로요.”
“뒤져서 수상한 게 나오기라도 하면, 판돈은 전부 여기에 놓고 가야 할 거야!”
“거기에 팔 한짝도 내놓을 의향 있습니다.”
쟈크 일당은 내 몸 곳곳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당연히 아무것도 나올 리가 없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먼지 하나 나오지 않도록 옷차림을 세팅해 두었으니까.
녀석들은 이럴 리가 없다며, 두 번 세 번에 걸쳐 내 몸을 대대적으로 수색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이들 입에선 한숨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이제 됐습니까?”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하겠지만, 쟈크는 씩씩대며 고개를 저었다.
속임수를 쓰는 건 본인임에도 오히려 왕창 깨지고 있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아니. 이걸로는 부족해!”
아까부터 이 녀석들은 내게 말을 놓고 있는데,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오늘은 아낌없이 퍼 주는 고마운 형들이니 이해해 주도록 하자.
“그럼 뭘 더 하면 되겠습니까?”
“게임이 시작되면, 다 같이 왼손은 테이블에 붙이고, 오른손으로만 하는 거야. 다들 동의해?”
“동의!”
“나도! 뭔가 이상했을 때부터 진작 이렇게 했어야 하는 건데!”
쟈크 일당 놈들은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런데 나 역시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제부터 아주 클린한 도박판이 펼쳐질 테니까.
“좋습니다. 동의하죠.”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기 전 한 가지 더 상기시켜 놓을 게 있다.
다시 한번 나의 무력 수준을 은근하게 보여 주는 것.
이제 곧 이 녀석들의 칩이 다 털릴 예정이니 분노를 미리 조절해 놓아야만 한다.
“시작하기 전에 잠시 몸 좀 풀겠습니다. 오랫동안 앉아 있었더니 몸이 뻐근해서.”
“혹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하우스의 한구석으로 이동했다.
구석 자리의 선반에는 딱 보기에도 견고해 보이는 금고가 하나가 놓여 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보관되어 있을 터.
그저 그런 싸구려 금고일 리가 없다.
“이 금고 말입니다. 보안 상태는 믿을 만합니까?”
“그걸 왜 그쪽이 신경을 쓰는 거지?”
“그냥 좀 허술해 보여서요.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부서질 거 같기도 하고.”
“뭐? 부서져? 그러다 주먹 나가면 게임도 끝이니, 헛소리 말고 자리에나 앉지 그래?”
“흐음! 아무리 봐도 한 대 치면 부서질 삘인데.”
“하아! 그럼 어디 한번 힘껏 쳐 보든가! 그러다가 다쳐 봐야 정신을 차리지.”
“좋습니다. 그럼 한번 해 보죠.”
나는 주저 없이 바로 주먹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금고가 만년한철쯤 되는 재질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
예비 동작 없이 나는 주먹으로 금고의 옆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악!
주먹 끝에 닿는 순간 전해 오는 단단한 기운. 당연히 허술하게 제작된 금고는 아니다.
나는 즉시 추가적으로 마나를 폭발시켰다.
생각보다 충격음이 요란해서인지, 쟈크 일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간다.
내 주먹에선 찌릿한 여운이 여전히 감돌고 있었다.
“제가 좀 경솔했네요. 한 대 치면 부서질 거라고 한 말 말입니다.”
부서지진 않았다.
금고의 옆면에는 균열이 생기며 쫙쫙 갈라진 상태.
나는 너덜너덜해진 금고를 손으로 죽죽 찢어 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금고 보안에 신경 좀 쓰셔야겠습니다. 맨손으로도 이렇게 열리는데, 전문적인 꾼들이 작정하고 털면 열리지 않겠습니까?”
쟈크 일행은 넋 놓고 나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냥 죽여.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지금까지 계속 침묵을 지키던 디나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입을 열었고, 당연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디나에게 공언한 바가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는 죽어야 마땅한 사람만을 죽이겠다고.
- 이놈들은 명백한 인간쓰레기들이야! 그러니 그냥 맘 놓고 죽이라고.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천진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계속해서 카드 게임에 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자리의 칩들이 수북하게 쌓인다.
모두가 왼손에 제약을 걸어 둔 채, 게임을 진행하고 있으니 내가 털어먹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망할!”
쟈크 일당 중 한 명이 칩을 모두 잃고는 분통을 터뜨렸다.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씩씩거리는데, 그냥 딱 거기까지였다.
괜히 나를 상대로 분노 조절에 실패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이미 보여 줬으니까.
그리고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의 결과는 똑같았다.
마지막 판에서 쟈크는 남아 있는 모든 칩을 걸었고, 오늘 게임의 종지부를 찍었다.
- 이제 끝났으니 죽여.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쟈크 일당은 다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일 것이며, 따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합의된 약속은 없어 보인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쟈크 일당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놈들은 이를 아득바득 갈고, 양손을 부들부들 떨 뿐, 그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 10초 남았는데, 설마 오늘도 퀘스트를 스킵 할 생각은 아니지?
그 설마가 맞다.
이 고마운 형들을 어떻게 죽여.
나는 이들에게 총칼 대신 몇 푼의 개평만을 던져 주며 하우스를 떠났다.
* * *
[호감도: 84]
이번 실험을 통해 의미 있는 데이터를 얻었다.
퀘스트 하나를 무시했을 때 하락한 호감도는 15.
물론 이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을 때 가중치가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호감도의 하락이 생각보다는 완만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론은 여전히 더 깎아야 한다는 것.
- 실망스러워. 이호영.
“이번에도 네가 준 퀘스트는 내 신념과 상반되는 것이었어. 그들이 악인이었는지를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없었으니까.”
- 하여간 그놈의 신념! 이미 넌 내가 제시한 퀘스트를 두 번이나 무시했어!
“내 탓이 아니야. 나는 첫 번째 퀘스트가 끝나고 분명히 죽일 놈들만 죽이겠다고 선언했으니까.”
- 그럼 내 탓이라는 거네?
“나도 마음이 좋지는 않아. 호감도가 연속으로 갈려 나갔으니까. 이곳 37층에선 호감도가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잖아?”
- 참 놀라운 능력이야 이호영. 네가 잘못해 놓고서, 도리어 내가 미안해지게 만들고 있잖아?
“원망할 생각은 없어. 어차피 모든 상황을 고려한 나의 결정이니까.”
- 아직 호감도에 여유가 있는 이유로 그 고귀한 신념을 지키셨다 이거로군.
“부인하진 않겠어.”
좋은 핑계였다.
사실, 이번 퀘스트는 상황의 운도 따라 주었다.
쟈크 일당이 노름꾼이 아닌 다른 종류의 나쁜 놈이었다면, 내가 이 정도로 상황을 컨트롤하지 못했을 테니까.
- 이번 퀘스트를 성공했을 때, 보상이 무엇이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디나는 다시 나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야릇한 눈빛을 보내왔다.
“궁금해. 하지만 더 궁금한 건 왜 매번 보상 표시를 ???로 해 놓는 것이지?
- 재밌잖아? 기대감도 주고 말이야.
“결국 대단한 이유는 아니라는 거군.”
- 나는 계속 힌트를 주고 있는데 대단하지 않다니, 이호영 너야말로 참 대단한 거 같아. 자꾸 그러니까 더 탐나게 되잖아?
“…….”
- 네 말대로 두 번 연속 호감도를 깎은 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 오늘 밤에 보상의 맛보기를 좀 보여 주려고 하는데, 어때?
“사양할게.”
- 하아! 진짜 넌 독특해.
“보상은 됐고, 뭐 하나만 물어보자. 도대체 넌 정체가 뭐지?”
그냥 안내자라고 하기엔 디나가 가진 권능이 범상치는 않아 보인다.
자신의 재량으로 나에게 퀘스트를 부여하고 있으며, 홀로그램 같으면서도 그녀가 원할 땐 언제든지 내게 물리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것. 확실히 평범한 존재는 아니다.
- 흐음. 이건 너에게만 특별히 알려 주는 건데, 사실 난…….
“어.”
- 난 군주의 화신이야. 미약할 뿐이지만 그분의 인격을 일부 가지고 있지.
순간 제나가 떠올랐다.
내가 막연히 추측했던 제나의 격은 지금 디나가 말하고 있는 그런 종류이니까.
- 황당하다는 표정이네?
“어. 그런데 그런 걸 막 말해 줘도 되는 건가?”
- 당연히 안 되지. 그러니 넌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그러면서 디나는 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이럴 때마다 나는 넋 놓고 당하고 만다는 것.
내가 반응도 못 할 정도면, 어쩌면 놀라운 고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디나의 지시를 따라 대상을 섬멸하십시오.]
[성공 시: ???]
[실패 시: 호감도 하락]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무려 섬멸.
꽤 많은 다수가 타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 디데이는 이틀 뒤야. 여기서는 조금 먼 곳이거든.
“이번엔 누구를 죽어야 하는 거지?”
그 대상이 누군지 알아야 미리 준비할 수 있다.
내 호감도는 여전히 높으며. 이번에도 적당한 구실로 퀘스트를 스킵 해야 하니까.
- 미리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야. 이번엔 확실하게 널 성공하게 만들 생각이거든.
디나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지키는 데 성공했다.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이틀 내내, 나는 타깃이 누구인지 떠보기 위해 여러 수를 동원해 보았지만 디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한 것.
그녀가 날 데리고 온 곳은 마을 두 개를 지나 외딴곳에 세워진 어느 허름한 건물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 다른 군주를 숭배하는 신전.
“이 낡은 건물이 신전이라고?”
신전이라 하기엔 조금도 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장 같은 느낌.
절대 감각을 일으켜 귀를 기울여 보면 정말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땅-땅-땅-땅-
건물 내부를 가득 메운 건, 망치로 쇠붙이를 두드릴 때 나는 그런 소리였다.
- 투철한 불꽃의 절름발이.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한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김세용을 지독하게 편애한 황당한 군주.
- 이 안에는 절름발이 군주를 신봉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이지.
“그럼 내가 이들 모두를 섬멸해야 하는 건가?”
- 그래. 이번에는 반드시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 거야. 네 신념에 위배 되는 일은 전혀 없을 테니까.
디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24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