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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246화 (246/292)

246화

시작의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디나의 표정은 묘했다.

화를 내거나 실망을 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본인의 담당 플레이어가 헛짓거리를 한 것에 대해 좌절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입을 꾹 닫고 있었으며, 가끔씩 저 혼자 비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범주 안에 이러한 반응은 없다.

그렇다고 딱히 신경이 쓰이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호감도: 99]

일단 호감도를 숫자로 만들어 놓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좀 더 팍 깎였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나쁜 결과는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면도 있다.

사망에 이르는 호감도 0까지는 아직 여유가 많이 있으며, 부담 없이 다음 퀘스트도 망쳐 버리는 실험을 진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다음 번에 호감도가 갈려 나가는 정도를 보고, 향후의 전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상태창의 변화는…….’

아까부터 주목하고 있었는데, 전혀 변화가 없었다.

호감도에 대한 결론을 내리자면, 이번 37층은 호감도에 따라 버프나 디버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저 사망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는 걸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하나 더. 초기의 호감도가 매력적인 ‘안내자’를 배치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옆을 따라다니는 디나는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님에도 묘한 끌림을 지속적으로 발산하고 있었고, 정말 신기하게도 나도 모르게 이따금씩 힐끔거리곤 한다.

군주의 권능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

방아쇠를 당기던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내 계획은 틀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디나 대신에 의식적으로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기에 나 역시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디나를 외면하는 일에도 심력이 소모된다는 것이다.

시작의 마을에 도착하면, 적당한 곳에 거처를 잡고 따끈한 물을 받아 반신욕이라도 할까 하다가도 한 가지 잊은 사실이 떠오른다.

‘……못 하겠네.’

디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든 항상 내 옆을 지킬 테니까.

성검은 인벤토리에 박아 버릴 수나 있지, 이건 사생활의 침해가 너무 심각한 일이다.

“실수…… 였나?”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너무 긴 시간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기에, 디나가 갑자기 말을 걸어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노리고 쏜 거야.”

나는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 정확하게는 담담하려고 노력한 것이지만 말이다.

“하긴,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했어. 그대로 이마 한가운데를 뚫어 버렸으니까. 그렇지?”

참 마성의 목소리다.

별거 없는 한마디 반문에도 마음속에선 파문이 일어나는 것만 같다.

“그럼 무슨 생각으로 내 말을 거역한 거지? 내가 좀 당황스러워서 말이야.”

사실 이번에는 좋은 핑계가 있다.

그녀가 죽이라고 지시한 욜은, 누가 보아도 그냥 평범하고 어수룩한 농부일 뿐이니까.

“그 남자는 죽을 이유가 없었어.”

“그럼, 네가 죽인 그 지주는? 그 녀석에겐 죽을 이유가 있었나?”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는?”

“죽을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살던 곳에서도 흔히 존재했던 빌런이라고나 할까? 덕분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생각나 버렸어.”

“네가 살던 곳이라 하면 아마도 지구…… 였던가?”

“그래. 여기와 크게 다를 거 없는 곳이었지. 거기도 가진 자는 더욱 많이 갖기 위해 탐욕을 부리는 그런 곳이었다.”

본의 아니게 도덕주의자 행세를 하게 된다.

아무렴 상관없다.

호감도를 깎기 위한 행동이었다고는 밝힐 수 없는 노릇이니까.

“갑자기 정의로운 척을 하는군. 너도 너 자신이 살기 위해 탑에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나?”

“그래. 많이 죽였었지. 탑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진 곳이라 자기 암시를 걸면서.”

“거봐. 너도 결국은 위선자일 뿐이야. 상황에 따라서 자기 편하게 신념을 바꾸며 살고 있잖아. 안 그래?”

그러면서 디나는 손끝으로 내 턱을 어루만진다.

“그럴지도.”

이 정도면 핑계 대기는 성공한 듯싶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워야겠다.

“좋아, 그럼 널 위해 다음 타깃을 준비해 주지.”

“이렇게 바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디나의 지시를 따라 그녀가 지목하는 사람들을 죽이시오.]

[성공 시: ???]

[실패 시: 호감도 하락]

이번엔 사람이 아닌 사람들.

복수의 인원을 죽이라는 것인데, 이번엔 무슨 핑계로 퀘스트를 망쳐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번엔 네 기준으로는 죽어 마땅한 자들일 거야.”

“여러 사람인가 보군.”

“그래. 이 근방에서 유명한 놀음꾼들이지. 쟈크를 포함한 네 명의 일당들. 아직 꼬리가 잡히진 않았는데 넷이 짜고 호구 하나 벗겨 먹는 짓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놈들이야. 당한 호구들은 패가망신은 기본이고, 장기까지 털린 녀석들도 있는데 어때? 이번엔 할 수 있는 거 맞지?”

37층의 초반 퀘스트들은 확실히 독특하다.

죽여야 하는 타깃들은 무력적으로는 지극히 약한 자들.

무슨 목적으로 이런 퀘스트가 초반에 세팅되어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대답을 안 하네. 할 수 있지?”

“판단은 내가 내려. 직접 본 이후에 말이야.”

“이번엔 할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렇지 이호영?”

디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며 말을 이어 간다.

“만약 퀘스트 성공했으면, 오늘 밤 좋은 걸 주려고 했는데.”

순간 음란마귀와 함께 소름이 밀려온다.

“퀘스트 보상으로?”

“아니, 그와 별개로! 이번에 성공하면 줄 수도 있어.”

“사양할게.”

“뭔 줄 알고 사양한다는 거야?”

“무엇이든. 세상에 그냥 이란 건 없으니까.”

“쳇. 이러니까 더 마음에 들어 미칠 거 같잖아. 어쩌지?”

또다시 그녀의 손길이 내 볼을 향해 다가온다.

피하자.

경건하게 애국가나 한번 부르면서.

* * *

37층의 세계는 여타 다른 차원과 다름없이 지구와 닮은 구석이 많다.

오늘 내가 온 곳은 영화에서나 보던 속칭 ‘하우스’.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흙수저 호구부터, 재미 삼아 들락거리는 돈 많은 한량 호구까지.

거기에 놀음 중독자 호구도 있으며, 답 없는 세상 속에서 유일한 돌파구랍시고 놀음판을 기웃거리는 한심한 호구도 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호구라는 것.

꾼들이 합세하여 작정하고 작업을 치니, 그 누구라도 호구가 되지 않을 재간 없는 것이다.

지금 방 안에 있는 인원은 쟈크 일당 넷과 나 하나.

이들에게 오늘의 호구는 나로 낙점되었다.

쟈크는 카드를 섞으며 실실 웃는다.

“자, 그럼 첫판을 시작해 볼까나?”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한 게 카드 게임 잘하게 생겼네 그려. 크크크.”

“자자! 초반에는 다들 살살들 하자고!”

드디어 호구 털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말이다.

디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사실 그녀는 내게 이들을 바로 죽일 것을 지시하였다.

시간 질질 끌지 말고 바로 퀘스트를 클리어하라는 것인데 내가 거부했다.

거부의 명분은 어제 이야기했던 대화의 연장선에서 찾았다.

나는 오로지 죽어 마땅한 자들만 죽인다는 것.

- 하여간 고집이야. 죽어 마땅한지 아닌지를 꼭 경험해 봐야만 알겠어?

디나는 불만이다.

직접 이들과 놀음판을 어울려 본 후 결정하겠다는 내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 뻔한 레퍼토리가 펼쳐질 거야. 넌 이들의 농간에 판돈을 다 날려 버릴 테고, 결국 장기 팔이 제안마저 받게 되겠지.

디나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털리는 사람이 한 달에만 한 트럭은 나온다고 한다.

돈도 빼앗고, 몸도 빼앗고, 영혼까지 털어 가는 이 녀석들은 죽어 마땅한 녀석들.

하지만 내 선에선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생각이다.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마땅한 심판을 받을 거라 믿으며.

타악!

디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상태창에는 메시지 하나가 표시된다.

[퀘스트 제한 시간: 2시간]

그리고 제한 시간은 초 단위로 바뀌기 시작했다.

“자, 카드 받으시게!”

내 손안에는 카드 두 장이 들어온다.

어떤 패인지 열어 보니 숫자 8짜리 두 장.

K 놀음으로 치면 8땡인 셈이다.

첫판이어서인지 쟈크의 손놀림에 속임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초심자의 행운이거나, 니케의 행운이거나.

무엇이 되었든지 죽을 이유는 없다.

나는 칩 세 개를 더 걸며 말했다.

“저는 한 바퀴 더 갑니다.”

“호오! 첫 끗발이 좋은가 보오?”

“내가 말했잖아!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잘하게 생겼다고. 크크크.”

이 중 두 명은 두 바퀴째에 죽었고, 다른 한 명은 그다음 바퀴에서.

결국 쟈크와 내가 마지막까지 칩을 걸며 레이스를 이어 갔는데, 당연하게도 첫판은 내가 가볍게 가져 왔다.

“허어! 첫판부터 이런 패가 나온다고?”

“키야! 카드 신이 돕는 모양이야. 나는 오늘 몸 좀 사려야겠어!”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

이제 곧 대수로워질 것이다.

나는 오늘 여기 네 명을 죽어 마땅한 놈들이 아닌 아낌없이 주는 호구로 만들 계획이니까.

오늘만큼은 내가 차마 죽일 수 없는 아주 좋은 놈들이어야만 한다.

* * *

“죽겠습니다.”

“죽겠다고 했소?”

“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내가 가진 패는 똑같은 숫자 2 두 장.

좋은 패지만, 여기서 한 번 죽어 줘야 한다.

쟈크 녀석이 카드를 돌리는 순간 장난질로 만들어 놓은 패이니까.

“어차피 죽었으니, 무슨 패였나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쟈크는 뒤집어 놓인 내 카드를 서둘러 오픈했다.

혹시라도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카드를 실수로 돌렸을까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다.

“와씨! 이 패로 죽는다고?”

당연히 실수는 없었다.

“그냥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이쯤에서 반드시 한 가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은근하게 나의 무력 수준을 내비치는 것.

행여, 이들이 판돈을 다 처발리고 나서 나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오늘만큼은 좋은 녀석이어야 하는 이들이 나쁜 생각을 해선 곤란하다.

파아악!

주변의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울려 퍼진다.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내 손끝.

다과용 철제 포크가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뭐, 뭐지?”

“갑자기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 미안합니다. 이 좋은 패를 가지고 죽은 게 뒤늦게 후회돼서 저도 모르게 그만.”

나는 이들을 향해 박살이 난 포크를 보여 주었다.

손가락으로 부러뜨리는 제스처를 재현해 주면서 말이다.

“화가 나면 이, 이게 된다고?”

“제가 보는 거랑은 다르게 힘이 타고나서 말입니다.”

눈앞에서 한 번 더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직접 본 것에 더 큰 믿음을 갖는 법이니까.

파아아악!

이미 두 동강 난 포크를 겹쳐 잡고 마나를 주입하니, 바로 네 조각이 되어 버렸다.

쟈크를 비롯한 네 명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든다.

이들은 깔끔하게 잘린 절단면을 멍하니 보더니, 저마다 포크 구부리기를 시작하는데 그게 될 리가 있나.

“호, 혹시 요령이 필요한 건가?”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힘으로 하는 거예요.”

나는 네 조각난 포크를 손아귀에 집어넣고는 힘을 주어 뭉개 버리기 시작했다.

돌돌 말려 버린 쇳조각들이 테이블 위에 탁탁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자, 그럼 게임 계속 진행하시죠?”

나는 네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매번 속임수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류의 게임에서 내가 돈을 잃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니케의 반지를 어루만지며 다음 패를 받았다.

[퀘스트 제한 시간: 58분 14초]

58분 안에는 이들이 마땅히 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좋은 형들로 계속 남아 있을 테니까.

- 24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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