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로비에는 이야기꾼 하나가 탄생하고 말았다.
우리 구역의 막내이자, 지난 36층에서 나와 함께 미션을 진행했던 고용우. 녀석은 바다에서 있었던 썰을 쉴 새 없이 풀고 있는 중이다.
“있잖아요, 그놈이 얼마나 크던지, 거의 집 한 채 크기는 됐다니까요! 다들 안 믿기시죠?”
“용우야. 니가 나라면 믿겠어? 어떻게 오징어가 집채만 하냐고!”
“오징어가 아니라니깐요!”
“그럼 문어라고 했던가?”
“하 참! 저도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안 믿었을 거예요! 어쨌든 그 집채만 한 괴수가 수면 위로 점프를 하는데…….”
“와아! 고용우 이거 호영이 형이랑 다니더니 허풍만 잔뜩 늘었네. 뭐? 그런 크기로 점프를 해?”
김세용은 연신 혀를 끌끌 차며 용우 꼽을 주는데, 사실 반쯤은 즐기고 있는 것이다.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는 용우의 모습에 재밌어하는 모습.
“하아! 진짠데!”
“용우야, 너 어른들 놀리면 못 쓴다.”
“와! 진짜 답답하네요. 그럼 36층에서 크라켄을 보신 분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있을 리가 없다.
우리 동료들이 어디 나가서 빠지는 실력은 절대 아니지만, 크라켄을 만나고도 다시 로비로 복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럼 다들 유령선은요?”
“유령선? 당연히 만났지! 붉은 밤 항로에서 내내 그거 피해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피해만 다녔다고요?”
“그럼, 유령이랑 싸우기라도 해야겠어?”
“하아!”
용우의 영웅담은 다시 시작되고야 말았다.
물론 여기서의 영웅은 바로 나.
나를 어찌나 화끈하게 띄워 주는지,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호영이 형! 정말이야? 왠지 용우가 MSG를 살짝 치는 거 같은데. 아무리 형이라도 그렇지, 열 척도 넘는 유령선을 어떻게 혼자 상대해!”
김세용은 믿을 수 없다며 내게 되묻는데, 그렇다고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됐고, 그냥 쉬기나 해.”
“그런데 용우가 텃밭을 다시 받았다는 건 정말이야?”
“어. 크라켄 사냥 보상으로.”
“하아! 크라켄이라는 게 정말로 있긴 한 모양이었네?”
뿐만 아니라, 용우가 썰을 푼 유령 함대 얘기에도 거짓이나 과정은 없다.
굳이 내가 해명할 건 아니지만 말이다.
“와씨! 이래서 내가 이번에는 형이랑 미션 하고 싶었는데!”
“그 말은 용우가 잃어버린 텃밭을 되찾아서 배가 아프기라도 하다는 거야?”
“그, 그건 아니지만! 암튼 다음에는 내 차례야!”
그렇게 김세용이 다음 차례를 선언하는 순간, 몇 개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일단은 가볍게 외면해 주었다.
다음 층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나도 아직 모르니까.
[37층은 사흘 후에 시작됩니다.]
그 순간 들려온 탑의 메시지.
탑은 우리에게 모처럼의 긴 자유 시간을 부여했다.
물론 이 자유가 진짜 자유는 아니다.
이 시간을 허투루 보냈다가는 금세 도태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캥수야!”
“캥!”
나는 오랜만에 캥수를 소환했다.
지난 층에서는 녀석이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수영도 못하는 캥수가 행여 바다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기에 내가 아껴 둔 것.
이제 다시 뭍으로 돌아왔으니 제대로 활약해 볼 시간이다.
“나랑 스파링 좀 할까?”
“캥!”
사흘이면 원 없이 스파링을 할 수 있는 시간.
33층 텃밭에선 지혜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이번 사흘은 캥수에게도 나에게도 성장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 *
[37층을 시작합니다.]
이번 층은 김세용이 기대했던 파티 미션은 아닌 모양이다.
새로운 배경이 펼쳐지자 우리 구역의 동료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나는 어느 낯선 마을의 광장에 홀로 서 있었다.
[호감도: EX]
그리고 상태창에 표시된 믿기지 않는 호감도.
지난 층과는 아주 극과 극이다.
제나가 내게 신신당부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듯싶었다.
‘골치 아프겠군.’
호감도를 억지로 떨구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미션: 14일간 생존하십시오.]
[생존 조건: 호감도를 0 이상으로 유지]
역시 이번 층의 메인 테마는 생존.
나로서는 좀 성가신 설정이다.
살기 위해서는 호감도 0 이상을 유지하되 또 50 이하로 떨어뜨려야 하는 의무도 동시에 안고 있으니까.
[37층의 군주 '사랑의 난봉꾼'이 당신을 위한 최고의 안내자를 선물합니다.]
그 순간, 내 옆에는 웬 금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 안녕 이호영?
그리고는 대뜸 내게 인사를 하는데, 묘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미녀였다.
그런데 한 가지 위화감이 밀려온다.
“네가 안내자?”
- 어, 맞아!
“사람은 아닌 거 같고.”
- 와우! 바로 알아보네? 역시 눈치가 빨라.
위화감의 근원은 바로 이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내 손을 그녀의 몸에 통과시켜 보니 그대로 뚫고 지나간다.
- 이호영, 참고로 난 너에게만 보여.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나뿐일 테고 말이야?”
- 호호. 벌써부터 맘에 들어! 굳이 긴 설명 안 하게 해 주고.
“이번 37층에선 다른 동료들에게도 너 같은 유령이 붙어 있는 건가?”
- 유령이라니!
“그럼?”
- 디나라고 불러 줘.
“그래. 디나, 그럼 묻는 말에 대답을 좀 해 볼까?”
- 너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나 같은 존재가 붙어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처럼 특별하진 않을걸? 지금 네 호감도의 수치만큼이나 말이야.
“특별…… 해?”
- 왜? 딱 보면 알잖아!
디나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 순간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내 어깨에서 그녀의 손이 전해 오는 온기가 느껴진 것.
피부의 감촉도 완연한 사람의 것이었다.
- 놀란 눈치네?
“…….”
- 미리 알려 주는 거야. 나는 언제든지 너의 육체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소름 돋는 말이로군.”
- 좋은 건 아니고?
그 말과 동시에 디나의 뇌쇄적인 눈빛이 나를 잠식해 온다.
이제야 완벽하게 알 것 같다.
제나가 미리 경고했던 ‘유혹’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37층 군주의 이명은 사랑의 난봉꾼. 이번 층은 플레이어의 감정을 건드리는 곳이다.
나의 초기 호감도는 EX.
디나의 특별함이 무엇인지는 그녀가 직접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디나는 아주 매력적이라는 것. 그것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것은 탑에서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단순히 디나가 풍기고 있는 외적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군주의 권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 이호영, 네가 여기서 14일간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까?
“말해 봐.”
- 그건 바로 내 말을 잘 듣는 거야.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만약 거부한다면?”
-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예정이거든.
그 순간, 디나의 양팔이 내 허리를 감싸 온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바로 손을 뻗어 저항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이는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악마의 유혹처럼 느껴졌다.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디나의 지시를 따라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농부 욜을 암살하십시오.]
[성공 시: ???]
[실패 시: 호감도 하락]
- 자, 들었지?
“욜이라는 농부를 찾아 죽여라?”
- 그래. 첫 임무인 만큼 아주 쉬워. 무공 같은 건 익힌 적도 없는 평범한 농부니까. 대신 아무도 모르게 암살을 해야 해.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 지금 내가 그걸 원하고 있어. 그걸로 부족해?
그러면서 디나의 손끝이 내 얼굴을 어루만진다.
어이가 없다.
이런 식의 유혹은 단연코 내가 좋아하지 않은 것임에도, 그대로 계속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싶다.
아마 나만큼 강한 강도로 유혹을 받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초기 호감도 EX는 결코 흔하지 않을 테니까.
스윽-
하지만 나는 디나를 밀어내고 말았다.
- 미, 밀었어? 나를?
“대낮인 데다가 광장이잖아.”
- 아무리 그래도 나를?
“안내해. 욜이라는 농부가 어디 있는지 말이야.”
한번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37층의 첫 암살 타깃으로 낙점되었는지를.
* * *
“구, 구 할이요?”
“뭘 그렇게 놀라나? 올릴 거라고 이미 언질도 주었거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세율을 구 할까지 올리시면 저희 식구는 어떻게 살아간답니까!”
“강요할 생각 없으니, 싫으면 다른 곳을 알아보든가.”
“얼마 전 셋째가 태어났습니다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지주의 단호한 말에 욜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현재 그는 손바닥만 한 땅 하나 없는 소작농.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소작 일을 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그에게도 땅이 있었다.
비록 넓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가꾸어 왔던 조그마한 농토가 있었다.
“이봐 디나, 욜의 농토를 빼앗은 게 바로 저 지주인가?”
- 엄밀히 말하면 빼앗은 건 아니지. 욜이 본인의 손으로 문서에 서명을 했으니까.
“글을 모른다면서.”
- 그건 욜의 사정이고. 그러고 보면 죽어 마땅하지 않아?
“누가? 저 지주가?”
- 아니. 욜.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소중한 땅을 본인 손으로 헐값에 팔아넘겼잖아.
피해자가 죽일 놈이 되다니, 참 독특한 사고의 흐름이다.
- 시간 끌지 말고, 죽여. 네 실력이면 한 발로도 충분하잖아?
디나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기다려 봐. 조금만 더 상황을 보고 싶으니까.”
- 뒷이야기는 뻔하지 않겠어? 욜 쪽에서 무릎을 꿇고 빈다든지 말이야.
그 순간 정말로, 욜은 지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더욱 애달프게 들려왔다.
“아시지 않습니까. 구 할을 내고 나면 제 손에 남는 건 거의 없다는 거 말입니다. 황실에 한 번 뜯기고, 보호비 명목으로 한 번 더 뜯기고 나면 저희 가족들은 입에 풀칠도 못 한단 말입니다, 어르신!”
“이봐 욜.”
“네, 어르신!”
“자네 첫째 딸이 몇 살이라 했지?”
“올해로 열넷입니다요!”
“흐음. 아직은 어리긴 어리구만.”
“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지만 충분히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는 된 거 같고, 본인의 집안 사정도 다 이해할 수 있겠구만.”
“그, 그러니깐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신지!”
“알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할 거라는 거.”
“말도 안 됩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그럼 자네 사정에 달리 방법이라도 있을 거 같아? 어차피 자네가 땅을 넘기는 순간 결정된 미래였단 말이지. 자네 딸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넘겨야 할걸? 흐흐흐흐.”
욜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눈앞의 지주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책의 감정일 것이다.
- 이제 그만 죽여. 더는 봐주기 힘드니까.
디나는 나를 재촉했다.
상태창에는 퀘스트 제한 시간이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10]
[9]
[8]
[7]
나는 홍염의 불도깨비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몇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여기서 저 지주를 죽여 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그리고 만약 내가 지금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면, 혹시 욜이 곤란한 상황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6]
[5]
하지만 한 가지 보고 싶은 일이 있다.
내 마력의 탄환이 욜이 아닌 지주의 머리를 향한다면, 디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다.
[4]
[3]
궁금한 건 못 참지.
어차피 욜이 의심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에 깔끔하게 바람구멍을 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2]
[1]
타아아앙!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퀘스트를 망쳐 버리고 말았다.
- 246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