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쿵-
쿵-
함대와 함대를 연결하는 가교가 좌우 양쪽에서 연결되며, 해골 병사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갑판 위를 가득 메웠고, 성검 가이아는 진즉부터 신난 모습이었다.
- 와하하하! 다 쓸어 버려!
높아진 텐션만큼이나 성검이 지금 보여 주는 파괴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뼈다귀들이 실시간으로 댕강댕강 썰려 나가고 있으니, 스치기만 해도 간다는 표현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 이제야 알겠는가? 이 몸의 진가를?
1절만 하면 좋을 것을, 자꾸 들으니 슬슬 짜증이 날 정도.
하지만 성검 덕분에 이 어마어마한 물량의 해골 병사를 상대하는 것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단순한 공격에도 해골들은 성검에 픽픽 쓰러져 갔고, 여전히 내 몸 속의 마나에는 여력이 넘치는 상태다.
거기에 내 인벤토리에는 온갖 템들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이니, 이 싸움의 결말을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득, 36층의 군주, ‘바다의 지배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크라켄도 그렇고 설정해 놓은 유령 함대의 규모도 그렇고, 날 괴롭히기 위해 열심히 안배를 해 놓은 모양인데 이게 다 물거품이 될 위기에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유령 제독이 가지고 있다는 보물마저 내가 가져가 버린다면 완벽한 화룡점정이 될 터.
“이봐 성검 씨, 이제 슬슬 안내 좀 해 보지 그래?”
- 죽여! 다 쓸어 버리라고! 와하하하!
내 말은 바로 씹혀 버렸다.
성검의 이런 모습은 살짝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 어? 방금 뭐라고 했지?
“네 눈에는 보인다면서? 이 유령 함대의 제독, 네크로맨서라는 놈이 어디 있는지 말이야.”
- 아! 네크로맨서? 아주 자알 보이지!
“그럼 안내해 봐. 나를 그놈이 있는 곳으로.”
- 너 혹시 지금 나한테 명령을 한 거야? 착각하지 마! 넌 내 주인이 아니야.
아무리 성검이 도도하고 건방지다지만, 내가 주인이 아니라니 헛소리가 지나치다.
- 그리고 난 그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도 없는 존재지!!
하지만 지금은 일단 멋대로 생각하게 놔둘 생각이다.
당장 아쉬운 건 내 쪽이니까.
“그래. 그건 알고 있어.”
- 오오! 의외인데?
“하지만 넌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할 거야. 너도 지금 네크로맨서를 베고 싶어서 애닳아 있잖아?”
- 뭐?
“이젠 좀 솔직해지자고! 해골 병사 같은 조무래기를 베는 것도 이렇게 신나 하는데, 네크로맨서면 너 거의 미치는 거 아니야?”
- 호오!
“계속 비싸게 굴면 해골만 잡다 끝나는 수가 있어. 서로 감정 소모는 그만하고, 이제는 윈윈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콰아악!
콰아아아악!
이 순간에도 가이아의 검날에 해골들은 맥없이 쓰러져 가고 있다.
“익숙한 자극은 지겨워지기 마련이지. 안 그래?”
- 크크크크.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네크로맨서. 이제는 성검의 힘을 빌려 처단 좀 하려 해.”
성검과 밀당을 하는 와중에도 해골들은 계속 썰려 나가고 있는데, 이놈의 병력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새로운 해골 부대들이 다른 함선으로부터 밀려들고 있기 때문.
정말 지긋지긋하다.
- 자신 있어? 넌, 네크로맨서가 어떤 놈인 줄 알고.
“어떤 놈인지가 중요해? 지금 날 돕는 게 성검인데.”
- 와하하하하!
성검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
이놈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쉽지가 않으니, 조만간 성검 길들이기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제아무리 보이지 않는 상대라 해도, 너라면 벨 수 있는 거 맞지? 엘리시온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 좋아. 합격! 그럼 이제 안내해 주마.
콰악!
콰아악!
나는 성검의 안내에 따라 해골 병사들을 베어 내며 이동해 나갔다.
해골들이 점점 더 거세게 저항을 하는 걸 보니, 성검의 안내가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갑판의 1층에서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그리고 2층에서도 가장자리의 가장 높은 곳으로 진행해 나가며, 어느덧 내 위치는 뱃머리에 다다라 있었다.
설마 성검이 날 수장시키려는 의도는 아닐 테고, 네크로맨서가 어디에서 이 병력들을 지휘하고 있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 지금 네크로맨서 표정이 어떤지 모르지?
“궁금하긴 하네.”
- 지금 저놈은 말이야…… 너, 나 보여? 뭐 이런 표정이라고. 크크크크!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되고 있습니다.]
등 뒤에서 공격하는 해골 병사는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성검에 마나를 한껏 불어 넣었다.
- 좋아! 한 방에 끝내자고!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는 허초도 예비 동작도 필요 없다.
휘이익!
나는 빠르고 간결하게 성검을 찔러 넣었다.
타깃 방향에서는 마나도 그 어떤 기감도 느낄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성검이 느끼고 있는 짜릿한 기분을.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완벽한 공격이란 것을.
검끝이 어느 점에 다다르자, 성검의 날을 타고 묘한 기류가 전해진다.
내가 찌른 것은 결코 허공이 아니다.
콰가강!
성검 가이아의 기운이 폭발하며, 주변의 이질적인 기운을 잠식해 나간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성검은 아무런 수다도 떨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주인 된 내가 오히려 압도당하는 느낌.
그리고 바로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어떤 존재의 완벽한 소멸이 있었음을 말이다.
스르르-
스르르르-
등 뒤에서 팔라스의 방패를 두드리는 해골 병사들의 기운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의 바다를 메우고 있던 유령 함대의 함선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지금쯤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야 할 성검은 여전히 침묵.
적막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깨지고 말았다.
“호영이 형!”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고용우가 배를 몰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령 제독의 부재로 인해 함대가 함께 소멸합니다.]
[제독의 보물이 당신에게 전해집니다.]
[하데스의 목걸이를 획득하였습니다.]
* * *
유령 함대가 사라진 후,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졌다.
이 폭우는 무려 사흘 밤낮으로 지속되었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돌풍이 밀려오며 우리를 위협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괴롭히기 위한 36층 군주의 농간이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악천후는 우리에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우리가 타고 있는 선박은 무려 이그드라실을 재료로 만들어졌으니까.
이번 층의 메인 미션은 테른 대륙으로의 이동. 용우의 탐험 스킬 덕분에 항해는 한결 수월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느껴지는 뭍의 향기. 드디어 테른 대륙에 도착한 것이다.
“항상 형에게 고마울 뿐이에요.”
굵직한 이벤트 두 번을 내가 단독으로 해결했기에, 용우는 이렇게 뜬금없이 내게 감사를 표하곤 했다.
아마 이번이 스물아홉 번째 감사다.
일일이 세지 않았지만,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지혜의 나무 덕에 바로 알 수 있었다.
[36층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나 역시 고용우에게 고마운 마음.
“수고했다. 용우아.”
“형도요. 그리고 감사했어요.”
녀석의 감사는 결국 서른 번을 채우고야 말았다.
[차원의 틈새로 이동하겠습니까?]
참으로 지긋지긋한 바다의 여정이었다.
이 탑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가더라도 당분간 바다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동.”
나는 바로 비밀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제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두 가지나 있다.
다 알려 줄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서 왔네?”
“죽을지 알았나 봐?”
“뭐, 그럴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어. 템빨을 덕지덕지 바른다고 해도 삐끗하면 죽을 수 있는 곳이 바다니까 말이야.”
“하긴 그런 곳이었지.”
사실 바다 앞에서 인간은 무척이나 나약한 존재였다.
제아무리 근력이나 민첩 스탯이 높다 해도, 휘황찬란한 스킬을 보유했다 하여도, 보유 중인 골드가 아무리 많아도 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바다였다.
초인적 경지에 다다랐어도 인간이 가진 본연적인 제약은 대자연 앞에서 겸손함을 절로 느끼게 한다.
“36층에서는 나만 힘들었던 거 맞지?”
“뭐, 그런 편이지. 크라켄을 만난 것도 너뿐이고 그렇게 무지막지한 규모의 유령 함대와 싸운 것도 너뿐이니까. 네 다른 동료들은 유령선을 만나면 바로 줄행랑이었어.”
“도망치는 게 가능했던 거로군.”
“사실 싸우는 게 비정상이지.”
힘들긴 했지만, 그 비정상적인 선택으로 인해 보물을 하나 얻어 오긴 했다.
바로 하데스의 목걸이.
아이템 설명을 보면 죽은 자의 혼을 불러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용 방법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나를 만나면 이걸 물어보고 싶었다.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럼?”
“네가 시체와 접촉을 했을 때, 그리고 죽은 누군가가 너와의 대화를 간절히 원할 때. 물론 후자가 흔한 경우는 아니야.”
“어차피 사용할 일이 많을 거 같지도 않아. 귀속템이기도 하고.”
“넣어 둬. 혹시 또 알아? 절묘한 순간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하긴 그렇다.
이 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꺼낼 수 있는 카드는 많을수록 좋은 법.
유령 제독처럼 해골 병사를 부릴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어.”
“아주 질문을 맡겨 놓으셨네?”
“여기, 성검 가이아. 어느 순간 말이 없어. 어떻게 된 거지?”
제나라면 충분히 대답해 줄 수 있다.
이 성검 자체가 제나가 모시는 군주로부터 받은 것이니까.
“포털을 열 수 있는 조건이 임박해졌다는 의미야. 어쩌면 이전과는 다른 차원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대답이었다.
이전에 내가 경험한 것은 남들보다 단 1층 앞섰던 미래.
그때는 33층의 텃발을 미리 다녀왔기에 유리한 입장에서 작물을 가꿀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나는 그것과도 또 다른 수준의 포털을 예견하고 있다.
내가 바라던 일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열어야만 하는 포털은 이 탑의 최종층. 물론 아직은 시기상조지만 언젠가는 가능한 순간이 오리라 믿고 있다.
“그럼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이 성검이 계속 침묵을 지킬 거란 얘기야?”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반가운 소식이군.”
네크로맨서 때처럼 성검과의 대화가 유용한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성가신 일이 더 많으니 이런 상황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너를 소환한 이유는, 곧 다가올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서야.”
“그놈의 위험은 거의 매 층마다 찾아오는 느낌인데?”
“따지지 말고!”
제나의 표정이 갑자기 새침해진다.
“알았어, 안 따질 테니까 말해 봐.”
“다음 층에서 너는 아주 커다란 유혹을 받게 될 거 같아.”
“37층의 군주에게?”
“그래.”
“그 위험이라는 게 결국 유혹을 말하는 거로군. 아마도 37층의 군주는 나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느끼고 있을 거고 말이야.”
“그럼 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는 잘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 호감도를 +50 이상으로 높이지 않기. 만약 초기 호감도가 +50 이상으로 시작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호감도를 끌어 내리기. 됐어?”
“완벽해. 잘 실천할 수 있을지는 별개지만.”
제나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아마도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터.
도대체 어떤 유혹이기에 이러는지 궁금해진다.
“용건은 이게 끝이야?”
“끝!”
그 말을 끝으로 제나는 나를 로비로 돌려보냈다.
- 24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