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어두컴컴한 망망대해.
어느새 풍랑은 가라앉았고, 배 위에선 한참 동안 적막만이 감돌았다.
용우의 탐색 스킬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기에, 나는 최대한 말을 걸지 않으며 그저 선체 중앙의 크리스털에 마나를 불어 넣을 뿐이었다.
이그드라실로 건조된 우리의 배는 내가 불어 넣는 마나의 힘으로 쭉쭉 뻗어 나갔고, 다행히 크라켄 이후에 큰 난관은 없었다.
아무리 내 호감도가 극악이라지만 36층의 군주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이다.
“형! 이제 우리 배는 붉은 밤 항로로 진입한 거 같아요.”
용우는 오랜만에 적막을 깨뜨렸다.
그리고는 거친 호흡을 뱉어 낸다.
탐색 스킬이 기본적으로 마나 소모가 큰 데다가, 지금은 어두운 밤이기에 심력 소모는 훨씬 더 컸을 터.
나는 지친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어. 용우야.”
“수고라고 할 게 있나요. 저는 형한테 묻어 가는 처지인데.”
“묻어 가다니! 네가 아니었으면 크라켄을 사냥할 수도, 이렇게 빨리 붉은 밤 항로로 진입하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생각할 거 없다.”
“고마워요, 형.”
“고맙긴.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이 더 커질 텐데.”
녀석은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나 역시 파트너 덕을 엄청나게 보고 있다.
어쨌든 이제부터 우리는 붉은 밤 항로. 지난 수년간 단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던 죽음의 길에 진입한 것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밤하늘은 정말로 불그스름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지금쯤 다른 동료들도 무사히 36층을 공략하고 있을까요?”
“왜? 걱정돼?”
“네.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겠지만, 방금 전에 형이 잡았던 크라켄을 생각한다면…….”
고용우의 걱정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만약 다른 동료들도 우리와 동일한 과정을 겪었더라면 똑같이 크라켄을 만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부분은 속수무책일 테니 말이다.
사실 나조차도 템빨로 때려 박지 않았다면, 크라켄은 답이 보이지 않는 괴물.
바다에서 그런 괴물을 우리에게 붙인 것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다들 무사할 거야.”
“정말요?”
“그럼! 날 믿어.”
다른 동료들은 크라켄 같은 괴물을 만나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우리에게만 그런 재앙이 나타난 것은 명백히 -EX 호감도의 불운 때문일 터.
웬만해서는 붉은 밤 항로 이전에 다른 난관 같은 건 없어야 마땅하다.
탐색 스킬 없이는 이 항로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난관일 테니까.
“네. 그럼 형만 믿을게요.”
그리고 드디어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그런데 정말로 유령이 있을까요?”
며칠 전 용우가 했던 질문이었다.
사실, 출항 전부터 나도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붉은 밤 항로가 죽음의 길이 되어 버린 이유는 바로 유령선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이 세간의 정설.
하지만, 유령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없으며, 멀찍이서 유령선을 보았다는 목격담만 존재할 뿐이었다.
또한 이를 유령선이라 부르는 근거도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선박의 움직임이 일반적인 배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사악하고 음험한 기운을 풍긴다는 것이 주된 이유인데, 이러한 소문들은 보통 부풀려지기 마련.
그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우리 앞에 거대한 선체가 갑자기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형! 가, 갑자기 저런 것이!”
말 그대로 ‘갑자기’였다.
내 절대 감각으로도, 용우의 탐색 스킬로도 도저히 사전에 감지할 수 없었던 갑작스러운 등장.
피융-
그리고 무언가가 우리를 향해 날아온다.
한 발의 화살.
정말로 놀라운 건 이 어둠을 뚫고 정확하게 내 가슴을 노리고 날아왔다는 것이다.
타아악!
나는 성검 가이아를 꺼내, 화살을 쳐 냈다.
힘을 잃은 화살은 그대로 바다로 떨어진다.
피융-
그러자 또 한 발이 바로 날아들었다.
한 번이면 우연이겠지만, 두 번 연속으로 화살의 궤적은 동일했다.
정확히 내 가슴을 노린 공격.
한밤중인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솜씨다.
이제 두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친다.
저 배에 엄청난 명사수가 타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둠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가 쏘아 낸 것이거나.
타아악!
그리고 화살을 쳐 내면서 확신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명사수라 하기에는 화살에 담긴 마력의 질이 매끄러진 못하다는 것.
그렇다면 결국 후자일 공산이 크다.
피융-
피융-
이번에는 두 발이나 동시에 날아든다.
나는 바쁘게 화살을 쳐 내다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타이밍이 참 짓궂었으니까.
기왕 보내 줄 거면 조금만 더 서두르든가.
[당신의 선박은 유령 함대를 맞닥뜨렸습니다.]
역시 이 배의 정체는 유령선.
동시에 위화감이 몰려왔다.
화살 같은 물리적 공격은,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유령의 이미지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었기에.
피융-
피융-
나는 밀려드는 화살들을 쳐 내며 계속해서 공략집을 읽어 나갔다.
[이번 36층에서 상대의 전력은 플레이어의 호감도에 따라 달라지며, 당신은 최악의 유령 함대와 싸워야 합니다.]
스르르.
스르르르.
유령선이 하나둘씩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유령과도 같은 갑작스러운 등장.
“호영이 형!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어요!”
정면에만 다섯 척. 양 측면에 각각 두 척씩. 함대의 규모는 어디까지 더 불어날지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화살이 날아드는 빈도는 더욱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호감도.
어쩌면 사방팔방 유령선으로 포위될지도 모르겠다.
피융-
피융-
놀라운 점은 지금 대부분의 화살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
이 역시 -EX 호감도의 효과일 것이다.
- 좋아! 아주 재밌어!
성검 가이아만 신나서 난리였다.
가이아는 빗발치는 화살을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다로 떨어뜨린다.
[유령들의 공격은 주로 호감도가 가장 낮은 플레이어를 향합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렇다면 고용우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결론.
나쁘지 않다.
내가 굳이 신경 써 줄 필요가 없으니까.
“용우야! 나한테서 최대한 떨어져!”
“괜찮으시겠어요?”
“걱정 말고 빨리!”
화살의 포화가 집중되는 방향은 오직 나.
아직 여력은 있다.
다행히 화살 공격은 그리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며, 최악의 상황에선 팔라스의 방패도 가동될 것이다.
[유령 제독이 있는 함선을 찾아 그곳에서 결판을 내십시오. 또한 제독이 가진 보물을 취하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공략집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타이밍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제독만 찾을 수 있다면 이 유령선들을 전부 상대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기에.
거기에 보물은 덤이다.
“용우야, 배 좀 몰아 봐.”
“어디로요?”
“보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함대 쪽으로!”
“네? 보물이요?”
탐색 스킬이 있는 용우이니 단번에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기에 니케의 행운까지 겹쳐진다면, 이건 무조건이다.
“서둘러!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은 화살까지만이니까.”
“네. 알겠어요!”
행여, 유령선에서 대포라도 쏜다면 난감한 일이다.
제아무리 이 배의 재료가 이그드라실이라 해도 무적의 내구성은 아닐 터.
조금이라도 손상이 생긴다면 곤란하다.
용우는 다시 탐색 스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해서 찾아낸 함선 한 척.
여전히 화살은 빗발치고 있었다.
“형, 정말로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배 잘 지켜! 그것도 중요한 일이니까.”
결국 크라켄 때와 마찬가지.
이런 최악의 상황을 야기시킨 것은 나의 호감도이며 용우의 역할은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조심하세요!”
용우도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본인이 따라나선다 해도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자각하고 있을 테니.
또한 배를 지키는 임무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다.
유령들의 공격 성향을 감안하면, 용우와 우리의 배는 무사할 것이다.
휘이이익!
나는 쏟아지는 화살을 뚫어 내며 몸을 날렸다.
유령선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더욱 더 맹렬해졌으며, 공중에서 내가 받아 낸 화살 공격은 거의 소나기 수준.
하지만 부담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결국 크라켄 이후 다시 방패의 가호가 시작되었다.
신화급의 아이템 앞에서 수백의 화살들은 모두 맥없이 추락해 버린다.
- 하여간 템빨 한번 사기적이네! 하긴 네놈 최고의 템빨은 바로 이 몸이시겠지만 말이야!
성검 가이아는 아직은 동의할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이후, 갑판 위에 올라가 보게 된 광경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게 유령이라고?’
갑판 위를 가득 메운 수많은 해골 병사들.
녀석들은 유령이되 완벽하게 물리적 존재였다.
하긴 나에게 쏘아 낸 화살에서는 마나의 기운마저 느낄 수 있었으니까.
- 여기에 네크로맨서가 있었군.
“네크로맨서?”
“있어. 그런 게. 곧 알게 될 테고.”
달그닥- 달그닥-
해골 병사들은 일사분란한 모습으로 활을 내려놓고는 삼지창을 집어 들었다.
확실히 누군가의 지휘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 쓸어 버려! 저런 놈들에게 성검은 상극이야. 평소보다 훨씬 더 놀라운 힘을 발휘할걸?
“그전에 누가 유령 제독인지, 그놈 먼저 찾아야겠어.”
최대한 빠르게 이 유령 함대 전체를 지휘하는 우두머리를 찾는 것이 관건이다.
대가리를 치지 않고서는 싸움이 길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분명 이 함선 위 어디엔가 존재한다.
- 너, 설마 그 제독이란 놈을 이 해골들 중에서 찾으려는 건 아니겠지?
“왜?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 크크크크.
성검은 웃기만 할 뿐 내게 해답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뼈다귀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한다.
달그닥거리는 소리와 어둠을 밝히는 안광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수백의 전력.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다른 함대에서 새로운 전력이 가세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후우.”
나는 가이아를 움켜쥐고 심호흡을 한번 내뱉었다.
제자리에서 방어적으로 상대할 생각은 아니다.
성검이 순순히 말해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내 스스로 최대한 빠르게 이놈들의 우두머리를 찾아내야만 한다.
콰아악!
나는 행군하고 있는 해골 병사의 진영을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성검을 휘두를 때마다 해골 병사의 대가리들은 속절없이 목과 분리되어 날아간다.
쇄골 뼈가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척추가 반으로 갈라진다.
해골들이 인해전술, 아니 골해전술로 몰려드는 것은 비주얼적으로는 부담스럽지만 성검이 있는 한, 전력상 부담은 되지 않을 것 같다.
- 거봐! 내가 말했잖아! 충분히 쓸어 버릴 수 있을 거라고.
가이아의 말대로 성검은 이 해골 병사들과 상성을 가진 듯이, 파괴적인 위력을 보여 주었다.
진영을 계속 밀고 들어가던 나는 어느덧 수백으로 이루어진 적진의 한복판에 와 있었다.
이대로 반대편까지 나아가 볼 생각이다.
함선의 어딘가에서 이 녀석들을 지휘하고 있을 유령 제독을 찾는 게 1차 목표니까.
- 네가 뭘 찾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그놈은 해골이 아니야.
콰아악!
콰아아악!
나는 한 귀로는 성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해골이 아니면?”
-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너와는 다른 체온을 가진 존재. 일명 네크로맨서지.
“그러니까 그 네크로맨서라는 게 뭐냐고!”
- 이 유령선의 유일한 유령이라고나 할까? 지금 내 눈에는 보이는데 말이야. 크크크.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되 지금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눈도 없는 성검에게는 보인다?
잘 납득은 되지 않지만, 상관은 없을 것 같다.
꼭 내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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