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수심 20m 부근에서 흐물흐물하고 있는 검은 실루엣.
절대 시각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이것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바다라는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해는 이미 지평선을 넘어가는 중이기 때문.
“호영이 형! 우리 쪽으로 조금씩 접근하고 있어요!”
“알고 있어.”
“저는 준비 됐습니다! 언제든지 신호만 내려 주세요!”
고용우는 장창을 움켜쥐며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긴장 풀고 있어.”
육지라면 모를까, 바다라는 제약 속에서 섣불리 선빵을 날리는 건 너무 큰 위험이다.
더욱이 우리는 이것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에, 조심스럽게 공략해야만 한다.
처음에는 이 검은 실루엣이 바다 괴수 떼가 아닐까 생각했다.
실루엣의 규모로 미루어 볼 때 개체 수는 최소 수십에서 많으면 수백까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위화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군집 생활을 하는 괴수 떼라 해도 일정한 대형을 유지한 채 너무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으니까.
마치 하나의 몸체처럼 말이다.
‘……어쩌면.’
괴수 떼가 아닌 단 하나의 거대 해양 괴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껏 내가 상대해 본 적도 없는 사이즈의 괴물.
크기가 전부는 아니지만, 긴장감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망망대해에서 저 녀석이 우리의 배를 뒤집어 버리기나 손상시키기라도 한다면, 사실상 게임은 종료될 테니까.
‘역시 -EX 호감도의 불운인가?’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도망치거나, 아니면 저 녀석과 사생결단을 내거나.
여전히 우리는 저 존재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하며, 녀석은 우리 배와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
살짝 항해 속도를 높여 보아도, 거리는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역시 도망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제아무리 우리 배의 성능이 우수하다 할지라도 동력원은 어디까지나 나와 용우의 마나이며, 이 끝도 없이 펼쳐진 대해에서 유한한 마나로 술래잡기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역시 치고받고 싸우는 쪽이 편하기도 하고 승산도 높을 것이다.
“용우야, 이 괴물 녀석 좀 유인해 볼까?”
“어디로요?”
“최대한 물살이 잔잔한 곳으로. 탐색 스킬로 가능하지?"
“가능할 거는 같아요! 그런데 뭘 하시려고요?”
“바다로 좀 뛰어들려고.”
“네?”
녀석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에 내가 직접 내려가 결판을 낼 생각이다.
어차피 배 위에서도 운신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다.
테이아의 날개가 없는 상황에서 나의 영역은 이 좁은 선체일 뿐이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베일에 가려진 녀석을 직접 대면하여 상대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주변에 암초가 많은 곳이면 더 좋겠고 말이야.”
산소 공급을 위해서는 수시로 수면 위로 올라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무언가가 필수.
문득,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르르르-
나는 마나 크리스털에 마나를 한껏 불어 넣었다.
“용우야, 바로 안내해!”
“네!”
마나를 머금은 크리스털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증폭된 마나는 이그드라실로 만들어진 선체에 그대로 흡수되며 엄청난 추진력을 발생시켰다.
잠시 후 우리의 선박은 쾌속정 모드로 돌입하여 바다를 가르며 질주해 나갔다.
‘역시 바로 따라붙는군.’
거리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은 채, 우리는 한참을 요리조리 바다를 가르며 달려 나갔다.
추격전이 펼쳐지고 나니 우리 선박의 성능을 제대로 실감하게 된다.
거칠게 출렁이는 파도를 헤치며 빠져갈 수 있었던 건, 나의 항해술도 한몫했겠지만, 항해자의 컨트롤을 오롯이 구현해 낸 이그드라실의 위용이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조금은 잔잔해진 바다가 펼쳐진다.
주변에는 적절하게 암초들도 자리 잡고 있어 전장으로서는 안성맞춤.
“수고했어요. 용우야.”
오랜 추격전으로 지쳤으니 마나 보충부터 해야겠다.
[키벨레 열매의 농축액을 섭취합니다.]
키벨레는 텃밭 털기 미션에서 빼앗은 작물 중 하나.
마나의 회복 속도를 대폭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동시에 중복으로 섭취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지만, 적절히 시간차를 두어 사용하면 장시간 전투에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이다.
“형!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용우는 나만 전투에 참여하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데, 녀석에겐 더 중요한 역할이 있다.
“배 잘 지키고 있어!”
나는 바로 바다 아래로 뛰어들었다.
* * *
‘크라켄이라…….’
오징어인지 문어인지 정체성이 뚜렷해 보이지 않는 이 녀석의 크기는 실로 놀라웠다.
처음에 수백 마리의 규모의 괴수 떼라 오인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바닷속으로 들어와 직접 괴물을 대면하게 되니, 이 녀석이 내뿜는 거대한 마나의 기운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붉은 밤의 유령보다 이놈이 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얼마 전에 상대한 와이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금 이곳이 물속이라는 것도 고려한다면, 크라켄이 주는 위압감도 결코 떨어져 보이진 않았다.
‘일단은 독으로.’
나는 홍염의 불도깨비에 테렌의 독향을 가득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지체 없이, 타아앙!
물살을 가르는 마력의 탄환은.
쿠에에에엑!!
어김없이 명중하였다.
저 거대한 몸체에 독이 얼마나 빨리 퍼져 나갈지가 관건이다.
나는 트리거에 마나를 불어 넣어, 곧바로 연사를 감행했다.
타앙-
타앙-
타앙-
성난 크라켄은 즉시 나를 향해 검은 먹물을 퍼부었다.
물속에서도 지독한 독성이 느껴진다.
내게 만독불침의 특성이 있다고는 하나 저걸 무방비로 맞아서 좋을 이유는 없다.
저 먹물에는 독성뿐만 아니라 어떤 특성이 있는지는 알 수도 없으니까.
[칠엽초의 복용 효과가 발휘됩니다.]
[일시적으로 비非물리적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강화됩니다.]
팔라스의 방패는 언제라도 위험이 감지되면 자동으로 펼쳐지지만, 그 전에 자잘한 것들부터 소모할 생각이다.
칠엽초. 이것 또한 텃밭 약탈을 통해 새로 재배하게 된 작물인데, 탄환을 쏘아 냄과 동시에 이미 네 뿌리나 곧바로 복용했다.
효과는 기대 이상.
스르르르-
크라켄이 뿌려낸 먹물은 내 몸에 닿자마자 곧바로 소멸되어 버렸다.
칠엽초의 효과도 동시에 소멸되었지만, 그럼에도 이미 훌륭하다.
내게 한 번의 공격 기회를 더 부여해 주었으니까.
타앙-
타앙-
타앙-
탄환을 허용한 크라켄은 분노의 몸부림을 치며, 나를 향해 무지막지한 다리들을 쭈욱 펼쳐 내기 시작했다.
흐느적거렸던 여러 개의 다리는 어느새 하나하나가 아나콘다 이상의 포스를 뽐내며 나를 포위한다.
물에서 발휘할 수 있는 내 움직임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속도.
하지만 이 정도의 핸디캡은 예상했던 일이기에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크라켄의 다리 하나는 내 몸을 돌돌 말아 버리며,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위에 겹쳐지는 또 다른 다리 하나.
그럼에도 방패의 가호가 있었기에, 아직은 매우 안락했다.
다리에 오돌토돌 달린 돌기가 조금 역겨웠을 뿐.
나는 성검 가이아를 들어 나를 압박하고 있는 크라켄의 다리에 톱질을 하기 시작했다.
- 이 망할 자식아! 성검을 이따위로 쓰는 놈이 어딨어!
우아한 상황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성검으로 잘라 내고 있는 크라켄의 다리에서는 역겨운 액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우웩!!
아무리 봐도 이건 좀 오버다.
코도 없는 주제에 고작 이런 거로 구역질을.
스스스슥-
칼질을 하는 나의 손이 더욱 분주해지며, 마침내 나를 압박하던 녀석의 다리 한 짝을 끊어 내고야 말았다.
따악!
절단면에서는 누런 핏물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고, 성검은 연신 헛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했다.
크라켄의 괴로운 몸부림을 틈타 나는 발을 박차며, 몸을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산소가 필요하다.
더욱이 마나 소모가 많았기에, 지금쯤 호흡을 해 두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푸우우!”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다시 만난 바깥의 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
나는 수면 위로 뻗은 암초 하나에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크라켄 역시 거대한 몸체를 공중으로 도약시킨다.
쿠와아앙!
전투 상황만 아니라면 이 모습은 경이적인 대자연의 장관이었다.
물살이 일며 주변에는 사방팔방으로 거대한 폭포가 만들어졌다.
타아앙-
타아앙-
홍염의 불도깨비는 모처럼 공기 중에서 경쾌한 총성을 뿜었고, 크라켄은 또다시 거대한 다리를 뻗어 와 나를 공격해 왔다.
나는 암초들을 징검다리 삼아 이리저리 뛰며, 저 무지막지한 다리들을 피해 다녔다.
물론, 언제까지 도망만 칠 생각은 아니다.
크라켄의 대가리에 접근하는 것이 현재로선 관건.
팔라스의 방패를 믿고 도박을 한번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타아앙-
타아앙-
또다시 크라켄의 다리 두 개가 내 몸을 돌돌 말아 오며 압박을 시작한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잡힌 것이 아니라 잡혀 준 것이라는 것.
타아앙-
타아앙-
나는 방패의 가호를 받으며, 크라켄의 몸통과 머리를 향해 마탄을 마구 발사해 나갔다.
크라켄은 성난 울부짖음과 함께 내 몸을 자신의 몸체로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역겨울 정도로 크게 벌린 입과 거대한 이빨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는 성검에 마나를 한껏 불어넣었다.
콰아아악!!
나를 한입에 삼키려는 녀석의 입천장에 성검 가이아를 그대로 박아 넣었다.
- 우웨에에엑!
가이아는 크라켄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크라켄의 입천장에 박힌 성검을 지탱하며 힘겨루기를 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트리거를 당기며 녀석의 목구멍에 마탄을 퍼부었다.
팔라스의 방패는 아직은 견고하게 나를 수호하고 있으며, 나는 텃밭에 심은 온갖 작물들을 내 몸속에 때려 박으며 보양에 만전을 기했다.
어느 순간, 나를 돌돌 말고 있는 크라켄의 악력이 약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럼, 이제 마무리는 엘리시온으로.
콰카카캉!
일격필살의 검기를 크라켄의 목구멍으로 쏟아 냈다.
바닷속이라면 모를까, 수면 위에서의 크라켄은 명백히 와이번보다는 아래.
결말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 * *
-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가이아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모든 게 다 불만이다.
성검을 우아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용한 것도, 크라켄의 더러운 목구멍에 처박은 것도, 마지막 피날레를 자신이 아닌 엘리시온으로 장식한 것도. 그냥 다 불만이었다.
그 결과는 다시 인벤토리행.
그리고 잠시 후, 예상하지 못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최초의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타이틀: 크라켄을 사냥한 자.]
“호영이 형!”
“너도?”
“네! 저도!”
하긴, 우리는 같은 미션을 진행 중인 파티니까.
그걸 떠나서도 용우도 충분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녀석의 탐색 스킬로 안성맞춤의 전장을 찾지 못했더라면, 바다에서 이 무지막지한 괴수를 사냥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보상으로 33층에 분양받은 당신의 텃밭이 더욱 윤택해집니다.]
다소 막연해 보이지만, 충분히 좋은 보상이다.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마나수의 과실.
아직도 열매를 맺지 않고 있으나 어느 순간엔 엄청난 것이 맺혀 있을 거란 확신이 있다.
이번 보상으로 인해 그 과실은 더욱더 달콤할 것이고 말이다.
그나저나 용우는 어떤 보상을 받았을지.
나와는 같을 수가 없다.
이 녀석은 지난 35층에서 텃밭을 회수당해 버렸으니까.
“호영이 형!”
“너도 보상이 쏠쏠한 모양이구나?”
“네. 이게 다 형 덕분에! 다시 텃밭을 돌려받았어요! 비록 작물은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 하지만 말이에요!”
줬다가 뺏었다가 다시 돌려주는 탑의 센스.
어쨌든 녀석이 기쁘다니 나도 흐뭇하다.
- 24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