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보는 탑 공략집-240화 (240/292)

240화

[이제 곧 36층이 시작됩니다. 미션 수행을 위해 2인 1조의 파티를 구성하십시오.]

[남은 시간: 2시간]

탑의 메시지가 전해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누구와 파티를 맺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

똑같은 미션도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과정 자체가 달라지게 되며, 이는 플레이어로서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이유로 지금은 사람들의 촉각이 곤두세워진 시간.

물론 예외는 있다.

최정혁-오민아 부부라든가, 이문학-이문성 형제는 2인 파티 시엔 항상 고정값이니까.

"호영이 형! 이제는 확실히 해야 하지 않을까? 형의 베스트가 누구인지 말이야!"

김세용이 전면에 나서서 말했다.

이놈이 이럴 때마다 부끄러움은 항상 내 몫이다.

"유치하게 베스트는 무슨."

"유치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매번 파티 정할 때마다 사람들이 눈치 싸움하는 거 몰라?"

녀석의 의도는 한마디로 본인이 내 파트너로서의 고정값이 되고 싶다는 얘긴데,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상황은 매번 변하는 것이며 나도 내 이익에 따라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니까.

"호영이 형, 그러니까 이제는 확실하게 입장을 정해 두지 그래?"

김세용의 말이 끝나자마자 몇몇 시선이 느껴진다.

그 순간, 신주아와 눈이 마주쳤다.

최근 가장 많이 파트너를 맺기도 하였으며 호흡이 잘 맞는 플레이어이기에,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1픽.

그녀는 은근슬쩍 두 발자국을 이동하며 나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서준호는 갑작스러운 선언을 해 버린다.

"이호영 씨는 저랑 같은 검투사 아닙니까? 세상에는 학연 지연도 있는데, 당연히 검연도 있어야 하지요!"

이건 좀 심하게 무리수.

김세용만 해도 버거운 데 서준호까지 이래 버리니,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없어질 지경이다.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채이설이 수습에 나섰다.

"파티를 이룰 때 중요한 것은 밸런스라고 생각해요. 검투사-검투사 조합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같은 직업이면 서로 시너지를 내기 어렵지 않을까요?"

"와! 채이설 씨가 저한테 이러기예요?"

서준호가 흥분하며 따지고 들자 채이설은 살짝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그, 그냥 저는 원론적인 말씀만 드린 것뿐인데……."

"그냥,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채이설 씨 당신은 누구와 파티를 하고 싶은지!"

"없어요! 그런 거!"

"거짓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분위기가 격양되고 있었기에, 결국 내가 진화를 나서야만 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계속 방관하고 있다가는 동료들 간에 감정 상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사실 저, 이번에는 용우랑 파티 하기로 했습니다."

나의 선언에 고용우도 놀란 모습이다.

처음에 용우가 내게 부탁했을 때, 확언을 해 주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번 일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사실, 나와 고용우의 조합이 그동안 보기 힘든 그림이었기에.

"뭐어?! 용우가 미리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우리 막내가 순진한 줄로만 알았는데, 진짜 빠르네!"

하지만 사람들은 이내 수긍하고 납득하는 모양새.

다들 고용우가 지난 35층에서 텃밭을 회수당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뭐, 용우라면 인정해 줘야지."

"용우는 지금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최고의 위기니까."

상황은 갑자기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나름 오랜 기간 동고동락해 온 사이니, 종말의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정은 있었던 것.

불평분자가 한 명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놈의 이호영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놈이랑 파티를 못 해서 안달인 건지!"

당연히 남소현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는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하는바.

굳이 나와 파티를 맺기 위해 애를 쓸 필요는 없다.

때로는 내 옆에 콩고물이 떨어지기도 하겠지만, 나에게 기대기만 한다면 성장의 기회를 빼앗길 수도 있다.

결국, 본인 하기 나름이라는 의미.

“남소현 씨. 당신은 저랑 한 번 더 파티 하시죠?”

신주아는 내가 용우한테 붙자, 바로 남소현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싫어! 신주아! 나한테 달라붙지 말라고!”

“제가 지금 컨디션이 많이 안 좋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힘 빼기 싫다는 의미인데, 혹시 설명이 더 필요하십니까?”

“아놔! 짜증 나!”

그렇게 남소현은 신주아에게 끌려가는 모양새.

약점을 제대로 잡힌 모양인지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우리 동료들에겐 반가운 일이다.

신주아가 폭탄 처리반을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 *

[36층을 시작합니다.]

새롭게 우리가 이동한 이곳은 짠 내가 물씬 풍기는 해안가의 마을이었다.

부두 쪽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을 보면 조선업을 비롯하여 이번 차원의 문명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데, 좋게 봐줘야 개화기의 조선 시대쯤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 마나 공학이 더해진다면, 이런 계산법에는 큰 오차가 발생하겠지만 말이다.

[36층의 군주, 바다의 지배자가 당신의 아이템 하나를 잠시 회수합니다.]

예상대로 인벤토리에서 없어진 아이템은 테이아의 날개.

이것은 손쉽게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해 주는 아이템이니 납득할 만한 처사다.

날로 먹게 해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호감도: -EX]

호감도가 극악을 찍은 것 또한 예상한 대로였다.

[미션: 바다를 건너 테른 대륙에 도달하십시오.]

[남은 시간: 21일]

※ 이미 존재하거나 건조 중인 선박은 이용 불가

그런데 미션 뒤에 붙은 조건 하나가 괴랄했다.

“형! 이거 직접 배를 만들라는 의미 맞죠?”

“어, 아마도.”

“이게 말이 되는 건가요? 배도 만들고 바다도 횡단해야 하는 데 제한 시간이 겨우 3주라니!”

“둘 중에 하나겠지.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라는 의미든가, 그게 아니면 36층의 차원엔 독특한 선박 건조 기술이 있든가.”

“형 생각은요?”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이 탑은 종종 새로우면서도 놀라운 것들 보여 주는 곳이니까.”

내 말에 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형이 옆에 있으니 든든하네요! 이번에는 최선을 다할게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걸림돌이라니 별말을 다.”

“형이랑 옆에 있으면 차이가 너무 나 버리잖아요. 이번 층의 제 호감도도 +3밖에 안 되고. 너무 평범하죠?”

“……어, 평범하네.”

다행이다. 용우 녀석이라도 평범해서.

용우마저 심각하다면, 바다를 횡단하는 내내 어마어마한 풍랑을 겪을 것이다.

물론, 나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예견된 미래긴 하지만.

갑자기 용우에게 미안해지려고 한다.

“일단 조선소로 가 보자. 배가 어떤 식으로 건조되는지부터 파악해야 하니까.”

“네. 형!”

조선소라고 해 봐야 현대의 그 거대한 규모를 생각해선 곤란하다.

이곳의 조선소는 거의 대장간 수준이니까.

“배를 만드시겠다고?”

자신을 하렌이라고 소개한 노인이 물었다.

“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그거야 용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지.”

“바다를 건너 테른 대륙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렌 노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러면서 한쪽 입꼬리가 묘한 곡선을 만들며 올라가는 게,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다.

내가 병신 취급을 받을 때면 어김없이 보았던 그 표정.

“혹시,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요?”

“진지합니다만.”

“진지한 양반이 테른 대륙으로 가겠다고?”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다.”

“하아!”

하렌 노인은 한숨을 한 번 푹 쉬더니 막을 이어갔다.

“지금 테른 대륙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항로가 ‘붉은 밤’이란 것은 알고 있을 테고.”

“……네. 그렇죠.”

“그럼, 붉은 밤의 중심부에 유령선이 등장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로군.”

“유령선이요?”

“역시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로구료. 쯧쯧쯧.”

하렌 노인이 우리를 미친놈 취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붉은 밤’ 항로의 중심부에 등장하게 된 유령선의 존재.

현재 그곳은 죽음의 바다로 불리고 있으며, 덕분에 테른 대륙과 이곳 하먼 대륙의 교류는 완전히 막혀 있는 상태라고 한다.

“어쨌든, 배를 건조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항해가 장거리인 것도 감안해야 하고, 항로에서 만나게 될 풍랑들까지 고려한다면 꽤 오래 걸릴 거요.”

“그러니까 그게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1일.

선박 건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나흘은 걸릴 거 같소.”

“……나흘이요?”

역시 여기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많이 벗어나는 곳이다.

“그렇소. 알다시피 선박 건조 스킬에는 마나가 꽤 많이 소모되니까.”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해 주십시오. 비용은 얼마면 되겠습니까?”

입간판에서 본 바에 따르면, 건조 비용은 우리의 초기 자금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수준.

다행히 비용 마련을 위해 이리저리 뛸 필요는 없다.

“비용이야 합의해서 결정할 일이고, 선박 재료는 다 준비해 왔소?”

“재료요?”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

역시 여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많이 다른 곳이었다.

* * *

선박 건조에 필요한 핵심 재료 중 하나는 역시 목재.

하렌 노인의 말에 따르면, 튼튼해 보인다고 아무 나무나 재료로 사용하는 건 곤란한 일이라고 하였다.

목재 자체의 내구성도 중요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마나 감응력.

선박에 덧씌워진 마나는 내구력을 증가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배를 이동시키는 패들의 기능도 담당하기에 목재가 마나에 어느 정도 반응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형.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시간을 소모하게 되네요.”

“그러게. 우리가 나무꾼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지금 우리가 와 있는 곳은 품질 좋은 나무들이 많기로 유명한 옐름 산.

다행히 용우와 내가 36층을 시작한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다.

“이그드라실이 최고의 목재라고 했죠? 정말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어, 발견해야만 해.”

내 빌어먹을 호감도로 인해 모진 항해가 예상되니 말이다.

바다에서 만나게 될 시련을 사실 나로서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내 검술이 뛰어나고, 스탯이 높다 한들 바다에 빠져서 죽는 것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똑같은 법.

예상되는 위험은 최대한 대비할 필요가 있다.

내 호감도가 평범하기만 했어도, 적당히 좋은 목재를 찾으면 바로 조선소로 달려가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론 곤란하다.

“용우야, 네가 앞장서.”

“정말로 저한테 맡겨 주시는 건가요?”

“그래. 넌 탐험가니까.”

탐험가와 파티를 맺으라 한 것은 공략집의 조언.

분명 용우는 나 혼자였으면 불가능할 이그드라실을 찾아낼 것이며, 그것은 녀석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역할도 해 줄 것이다.

고용우는 35층의 일로 지금 풀이 많이 죽어 있는 상황이니, 이렇게 본인이 직접 활약을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용우의 뒤에서 주변을 엄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산에는 몬스터가 출몰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큰 위험이 도사린다고 하니까.

- 망할 자식! 감히 날 인벤토리에 처박아 둬?

오랜만에 세상 빛을 본 성검 가이아는 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이아는 몬스터를 상대로는 무용지물이니까.

다만, 이번 36층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에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존재는 유령.

성검이 정말 성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다면 사악한 존재들을 베는 데에 이보다 제격인 아이템은 없을 것이다.

솨사사사사사!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름의 쓸모는 있어 보인다.

괴수형 나무들이 우리를 향해 성난 가지를 뻗어 오자, 나는 가이아를 휘둘러 잔가지들부터 정리한 뒤,

서거걱!

서거거거걱!

아예 이놈들의 밑동을 베어 버렸다.

콰앙!

콰아앙!

거대한 괴수 나무 두 그루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자, 여기저기서 우리를 향해 뻗어 오던 가지들이 곧바로 회수되는 모습이었다.

나도 굳이 이놈들 전부를 상대할 생각은 없다.

이 정도 겁을 주었으면 당분간은 잠잠할 테고, 이제 우리는 질 좋은 나무를 탐색하기만 하면 된다.

“용우야, 아직도 뭔가 느껴지는 게 없어?”

“조금만 더 가 보려고요. 확실하진 않지만, 이쪽 방향으로 올라갈수록 흙의 기운이 정순해지고 있어요.”

“그래. 알았다. 부담 갖지 말고 계속 앞장서 봐.”

지금은 용우에게 다 맡기는 것이 최선.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 241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