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내 텃밭에 남아 있는 침입자는 현재 다섯.
다수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지지만, 그렇다고 기세에서까지 밀리는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아바타 나비가 본인의 압도적인 강함을 제대로 보여 주었기에,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는 것은 다섯의 침입자.
모두가 보았다.
조금 전 한 아바타가 어떻게 나비에게 학살당하며 역소환 되었는지를.
“지금 당장 내 텃밭에서 떠나겠다고?”
“그래. 더 이상 너와 충돌하고 싶지 않으니까!”
팔뚝에 뱀 문신을 한 이 녀석은 나비의 위용을 보더니, 결국 내 텃밭에서 떠나겠다는 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그냥 솔직하게 도망치고 싶다고 할 것이지.
“미안하지만 늦었어.”
“뭐?”
녀석은 내가 좋다구나 할 거라 예상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거나.
“그러니까 기회 줄 때 튀지 그랬어.”
혹시 또 모른다.
임종수의 작물을 하나 가져가겠다는 황당한 얘기만 안 했으면, 내가 호구처럼 살려 줬을지.
“이, 이봐! 지금 너 5대 1로 싸워야 하는 거 몰라?”
“어. 몰라.”
왜냐하면 이제 곧 4대 1이 될 예정이니까.
이미 나비는 녀석의 아바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상태라, 당장은 아무도 도우러 올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뱀 문신의 아바타가 역소환 될 때까지는 말이다.
퍼어억-
나비는 가볍게 뱀 문신의 아바타에 얼굴에 주먹을 꽂으며, 교전을 시작했다.
녀석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보고만 있을 거야?”
오랫동안 교감을 해 온 사이들이라면 모를까, 다들 방금 만났기에 조직력은 모래알 같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각자의 아바타들은 내 텃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상황. 서로의 눈치만 보며 미루는 형국이다.
“미친! 이러다가 모두 당하는 수가 있다고! 이 멍청한 녀석들아!”
하지만 뱀 문신의 간절한 외침에도 누구 하나 응답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있는 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씨발!”
플레이어 간의 폭력이 허용되었더라면, 진짜 싸움은 텃밭이 아니라 방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뱀 문신 녀석은 애꿎은 플레이어 하나를 상대로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규칙 위반을 한 플레이어에게 페널티를 부과합니다.]
룰 브레이커를 그냥 두고만 보고 있을 탑이 아니다.
“아아아악!”
뱀 문신의 비명.
상태창을 보니 피통이 절반이나 닳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비는 침입자에 대한 응징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퍼억!
퍼어억!
나비는 삽으로 상대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찍는 중이다.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뱀 문신의 아바타는 형체가 찌그러지며, 머리통은 이미 납작해져 목과 머리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나비야, 끝내 버려!”
퍼어어억!
내 명령에 나비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삽자루를 휘둘렀고, 그 이후 뱀 문신의 아바타는 홀로그램을 통해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있는 이곳으로 역소환 되어 버렸으니까.
녀석의 아바타는 여전히 쓰러진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런 병신 같은 놈!”
뱀 문신의 분노는 애꿎은 아바타를 향해 있었다.
이럴수록 아바타의 회복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 계속 그렇게 화풀이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제 4대 1이군.”
이제는 한결 여유 있는 숫자가 만들어졌다.
여전히 동시에 넷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들의 조직력이 정상적일 때의 이야기.
“이, 이봐 이호영! 지금이라도 협상을 하…….”
“말했잖아. 늦었다고.”
이미 나에게 당한 셋이나, 아직 덤비지 않은 넷이나 누가 더 나을 것도 없다.
“고, 골드! 골드를 주겠다!”
“이거 왜들 이러시나. 골드 웬 만큼이 아니고서는 텃밭 터는 게 훨씬 이득이란 거 다들 알잖아?”
똑같이 대해 줄 생각이다.
모두의 아바타를 이곳으로 역소환시킬 것이며, 텃밭도 공평하게 털어 줄 것.
마음 같아서는 모든 작물을 취할까도 싶지만, 그랬다가는 호감도가 +50을 초과해 버리기에, 괜한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제나의 경고도 있었으니 말이다.
* * *
“잘했지?”
“너, 설마 우쭈쭈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거야?”
제나는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어 갔다.
“그건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이었어. 그전에 약속을 깼던 것은 개쓰레기 같은 짓이었고.”
꼬맹이의 얼굴을 하고선 말버릇이 참 걸걸하다.
“그리고 너 진짜 얍삽하게 호감도를 +48로 맞춰 놓았더라?”
“우리의 약속은 +50을 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나로선 최선의 선택을 한 것뿐이다.
“혹시 또 약속 깰까 봐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고! 그렇게 되면 난 그분을 뵐 면목도 없어지고, 너 또한 더 이상은 그분의 총애를…….”
“걱정 마. 앞으로도 약속은 지킬 테니까.”
“쳇!”
도대체 군주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존재들이기에, 이렇게 유치하게 나오는 건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상적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버프를 퍼주는 군주가 있지를 않나, 살성 제안을 한 번 거절한 거로 뒤끝 작렬하는 군주가 있지를 않나.
내게 공략집을 전송해 주는 이 군주 또한 마찬가지다. 행여 내가 다른 군주의 호감을 살까 봐 끊임없이 질투를 하는 모습은 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그나저나, 이번에 날 여기로 소환한 이유는 뭐야?”
제나가 날 차원의 틈새로 부르는 데에는 매번 이유가 있다.
매번 이유가 있는 것 게 신기하지만 말이다.
“알려 줄 게 두 가지 있어.”
“그런데 표정이 뭔가 비장해 보이는군.”
“이 탑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심상치 않은 일?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거야?”
“그래. 너와 어느 정도 관련이 되어 있거든. 바로 네 사부에 대한 이야기야.”
“사부? 천마에 대한 일?”
“천마뿐만이 아니야. 혈마에 대한 일이기도 하지.”
“서, 설마!”
“그 설마가 맞아. 그 둘은 지금 비무를 펼치고 있어. 사실, 그 비무는 꽤 오래전에 시작되었었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혈마는 내가 펼친 무영추혼검을 보고, 단번에 이 검술의 진가를 알아챘으며 천마와 대결하고 싶다는 뜻을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결과는?”
나로서도 짐작하기 어렵다.
그들의 경지는 나와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내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그 끝도 모를 내공의 심후함과 궁극에 다른 무공의 높이는 감히 가늠해 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말했잖아.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얼마나 긴 시간을 싸우고 있는지 그들이 펼친 합을 세는 건 오래전에 포기했어.”
여기서 자연스러운 의문 하나가 생겨난다.
“그걸 이제야 말해 주는 이유는? 혹시 곧 결판이 날 거 같기 때문인 거야?”
“아니, 그 반대야. 그 둘은 영원히 승부를 낼 수 없을지도 몰라.”
그 두 사람이 아무리 초인적인 힘을 가졌다 해도, 결국은 인간. 끝도 없이 싸울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말이 돼?”
“말이 돼. 왜인 줄 알아?”
“……?”
“사실, 나도 보면서도 믿기지 않지만. 그 두 사람은 난생처음 맞수를 만나, 싸우면서 점점 완전해지고 있어.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 간다는 의미지.”
“허!”
“이게 참 말도 안 되는 거긴 한데,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해.”
제나는 본인이 말을 해 놓고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초월적 존재.
사부와 혈마가 모두 꿈꾸어 온 경지. 바로 등선이다.
그것은 결국 이 탑의 열두 군주와 동일한 격이 된다는 의미일 테고.
“그럼, 지금 나에게 이 말을 해 주는 이유는…….”
“그 두 사람이 만약 예상대로 경지를 초월해 버린다면, 너에게도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을 테니까. 네가 탑에 존재하는 한 말이야.”
“……그렇군.”
너무 대단한 이야기라 실감이 나지 않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 나에게는 희소식이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할 건 없어. 제아무리 초월적 존재라 해도 다른 열두 군주가 있으니 천마와 혈마는 말석일 뿐이야. 대 놓고 너한테 힘을 줄 수 없다는 얘기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비빌 구석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은 매우 크다.
“제나! 미리 말해 두는 건데,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둘의 호감도에 대해선 나도 어쩔 수 없어. 분명 +100 이상을 찍고 시작할 게 분명하거든.”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말했듯이 그 둘은 겨우 말석일 텐데, 탑의 한 층을 오롯이 자신의 영역으로 가질 수 있을 거 같아?”
지금 제나가 내게 이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일 지도 모른다.
잘 생각해 보고, 줄을 똑바로 서라는.
천마와 혈마가 ‘말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의미일 터.
그렇다면 앞으로의 내 처신이 아주 중요해졌다.
“좋아.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겠어. 그럼, 다음 안건은? 해 줄 이야기가 두 가지라고 했잖아.”
“36층에 대한 이야기야.”
“표정은 여전히 심각하군.”
“너한테 꽤 큰 시련이 될 테니까.”
“뭐야! 또 호감도가 극악인 거야?”
“빙고.”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놈의 군주들한테는 찍히고 시작하는 운명인가 보다.
“그런데 이젠 그러려니 해. 극악은 달빛의 명사수 때 한 번 겪어 보기도 했고, 보통은 마이너스로 시작했으니까.”
“이번에는 차원이 좀 다를 거야. 네가 뭔 짓을 해도 호감도는 극악에서 변하지 않을 예정이지. 덕분에 36층에서 호감도 약속은 강제 이행될 거야.”
“찍힌 이유라도 좀 알자. 납득이라도 하게.”
“네 잘못은 아니야. 이번 36층의 군주는 내가 모시는 그 분과는 원수지간이기 때문이니까.”
“군주들이 대체적으로 쪼잔하군.”
“맞아. 그분을 제외하면 보통은 그렇지.”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이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있지만 참는 수밖에.
“36층 시작하자 아이템 하나를 뺏기더라도 너무 당황하지는 마. 미션 끝나면 돌려줄 예정이니까.”
“아이템은 도대체 왜 뺏어 가는데?”
“그건 미션 내용을 보는 순간 바로 알게 될 거야. 아무튼 건투를 빌어! 죽지 말고.”
스르르르-
제나는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나를 로비로 보내 버렸다.
그나저나 죽지 말라니.
하여간 말하는 본새하고는.
다시 돌아온 로비.
동료들의 희비가 교차 된다.
지난 35층은 누군가에겐 큰 수확을, 또 누군가에겐 박탈감을 안겨 주는 그런 곳이었다.
텃밭의 작물을 풍성하게 만든 이들이 있는가 하면, 텃밭 자체가 완전히 몰수된 플레이어도 있다.
안타까운 케이스는 바로 고용우였다.
“호영이 형.”
날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동안 잘 버텨 주었는데, 텃밭 회수의 충격이 큰 모양이다.
“낙심할 거 없어. 텃밭은 어차피 생존을 위한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니까. 용우 넌 지금까지도 아주 잘 살아남았잖아?”
“그래도 탑에서 한 번 도태되어 버리면 그걸 만회하기가…….”
“괜찮아. 기회는 언제든지 있어.”
나는 녀석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사실, 고용우의 말대로 탑에서는 한 번 밀리는 순간 그걸 따라잡는 건 상당히 힘들어진다.
근근이 생존만 하는 것도 버거운 일일 터.
더욱이 텃밭 회수는 상당히 큰 손실이니, 힘내라고 격려는 해 주지만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였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그냥 차원의 틈새에서 그냥 다 알려 줄 것이지, 제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36층의 메인 미션은 바다 건너기입니다. 파티 구성은 2인 1조로 진행될 예정이며, 탐험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가 옆에 있다면 생존 확률은 훨씬 올라갈 것입니다.]
탐험 스킬이라 하면. 우리 중에도 한 명 있다.
공교롭게도 고용우.
“호영이 형. 제가 그동안 이런 부탁은 안 했는데, 만약 기회가 된다면 저도 형이랑 미션 한번 할 수 있을까요?”
용우 녀석의 목소리는 아주 간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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