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피에르 산의 입구에 위치한 초소.
본래는 이십여 명의 병력이 배치된 곳이지만, 지금 이곳을 지키는 이는 단 둘뿐이었다.
스퐁과 아델. 막내인 두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근처 마을로 유흥을 떠났기 때문.
그렇다고 이 막내들이 특별히 불만을 가진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곳에서의 일과라고 해 봐야 특별한 게 없으니까.
와이번이 이 산을 벗어나는지를 감시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맡은 유일한 역할이었다.
아, 물론 오늘은 예외다.
오늘은 오랜만에 사냥꾼이 방문하였기에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이봐 스퐁. 아까 그 남녀 사냥꾼이 산에 오른 게 언제였지?”
“글쎄. 대략 두 시간 정도? 그건 왜.”
“시간 됐으니 슬슬 보고서 작성해야지.”
“아! 깜빡하고 있었네. 서류를 만지는 게 워낙 오랜만의 일이라서 말이야. 흐흐흐.”
“빨리 작성해 놓고, 낮잠이나 좀 자야겠어.”
아델은 서류함에서 종이 양식 몇 장을 꺼냈다.
오늘 방문한 두 사냥꾼의 사망 사실을 상부에 보고해야 하니까.
“가만 보자, 이름이…… 제나드 로렌, 실비아 엘린.”
“날짜는 4월 8일, 오후 12시경. 사망 원인은…….”
아델은 서류를 작성하다가 문득 그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렸다.
이상하리만큼 자신만만했던 남자와 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여자.
초소 입구에서 잠시 스친 인연일 뿐이지만, 그들의 마지막을 본 것은 본인이었기에 잠시 애도를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스퐁! 오늘 산 쪽에서 유난히 와이번 울음소리가 계속 들린 거 같지 않아?”
“기분이 별로였나 보지 뭐.”
“하긴, 몬스터 입장에서 보면 인간들이 성가실 수도 있으니.”
“그나저나, 이 와이번은 언제쯤 공략이 가능할는지. 등장한 지가 벌써 네 달인데 아무도 엄두를 못 내고 있잖아!”
“황실 기사단이 나선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들은 웬만해선 수도를 비우지 않으니.”
아델은 스퐁과 대화를 하며, 보고서를 하나하나 작성해 나갔다.
왜 이런 형식적인 서류 작업을 해야 하는지 잠시 짜증이 밀려오려 했지만, 이내 그 마음을 거두기로 했다.
죽은 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때였다.
똑똑-
초소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근처 마을로 유흥을 떠난 고참들이 벌써 돌아왔을 리는 없고. 오늘은 참 특이한 날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이곳에 또 다시 방문자라니.
아델은 풀어헤친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초소의 문을 열었다.
“누구십니…….”
아델은 결국 말을 맺지 못했다.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기에.
“맡긴 신분증 받으러 왔습니다.”
두 시간 전, 산을 오른 두 남녀.
애도하는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까지 빌어준 그 대상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네?”
“그쪽에서 보관하고 계신 저희 신분증 말입니다.”
정신이 잠시 멍했지만, 아델은 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두 남녀는 호기롭게 산에 오르려 했으나, 와이번의 흉포한 괴성에 겁을 먹고 다시 돌아온 것.
그렇다면 오늘 유난히 와이번의 괴성이 많이 들린 이유도 설명이 된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실 와이번을 사냥한다는 것은…….”
“와이번 사체는 저쪽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운반은 인벤토리로 저희가 바로 할 거라, 검사만 해 주시면 됩니다.”
“……네?”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검정빛의 거대한 날개가 축 늘어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단 한 번도 근접 상태로 본적은 없지만, 이런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저건 명백히 와이번이었다.
* * *
[미션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사실 와이번을 사냥하러 떠난 건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내 모든 마나와 스킬들 그리고 아이템과 텃밭의 작물들까지 모조리 때려 박았고, 거기에 신주아의 모든 역량까지 더해지고 나서야 잡을 수 있었던 몬스터가 바로 와이번이었다.
만약, 한 번 더 하라면 한다면 기꺼이 거부할 생각이다.
조금만 계획이 틀어져도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어쨌든, 우리는 성공을 거두었고 덕분에 현재 내가 발휘할 수 있는 100퍼센트의 전력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은 아직은 많이 멀었다는 것.’
와이번이 내뿜은 그 거대한 화마 앞에 나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팔라스의 방패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즉시 통구이가 되었을 터.
템빨도 실력이라면 실력이겠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35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100만 헤르메가 내 수중에 들어오고, 이렇게 한 방에 미션을 달성하자 주위의 배경은 갑자기 변하였다.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빠른 페이스로 34층을 클리어한 플레이어는 탑 전체를 뒤져 봐도 많지 않으리란 것을.
[35층에 도착하였습니다.]
새롭게 펼쳐진 배경은 살짝 의외였다.
다른 차원의 세계관이 아닐까 예상했지만, 내가 이동한 곳은 문이 존재하지 않는 30평 크기의 방.
‘어?’
그리고 이곳엔 나 혼자뿐이었다.
신주아는 어디에?
당연히 옆에 있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탑의 메시지를 통해 의문은 곧바로 해결되었다.
[이번 미션은 ‘텃밭 털기와 지키기’입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타 구역 출신들의 생존자들과 경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35층에서는 같은 구역 출신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미션의 내용은 동료들과 하기에는 살짝 가혹한 것이니까.
[미션: 아바타를 사용하여 다른 플레이어가 심은 작물을 자신의 텃밭으로 옮기십시오.]
※ 조건: 텃밭 털기를 통해 소유하고 있는 텃밭의 가치를 증가시키십시오.
[실패 시: 텃밭 회수]
사실 이런 종류의 미션이 있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바다.
이번 군주의 별호는 ‘상인들과 도둑들의 수호자’이니까.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방 안에는 8개의 홀로그램이 펼쳐진다.
모두 다른 종류의 텃밭들.
이 중 하나는 나의 것이며, 여덟 명이 경쟁하는 미션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은 미션 시작 전입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결국 이 방에 여덟 명이 모두 모인 후에 시작한다는 의미.
어쨌든 내가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했으니, 마땅히 메리트가 있어야만 한다.
공략집도 그런 이유로 34층의 빠른 클리어를 제안했을 테니까.
그때였다.
[당신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밀가루로 반죽해 놓은 것 같은 인형.
이게 내 아바타라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겨우 내 무릎밖에 오지 않는 크기, 심지어 눈코입귀도 없었다.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야, 너 움직일 순 있는 거야?”
내가 말을 걸자, 아바타 인형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한 걸음을 움직였다.
“뭐야, 이게 고작이라고?”
말을 걸어도 당연히 반응은 없다.
이 녀석에겐 입이 없으니까.
“그럼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든가.”
이번 지시에는 아바타 인형이 바로 목을 앞뒤로 한 번 흔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정자세.
동작 원리가 어떤 방식인지는 대충 알 것도 같다.
“그럼 이젠,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 봐.”
확인 차원에서 선택의 기회를 줘 보았다.
쩜.쩜.쩜.
역시 반응이 없다.
이 녀석은 주인의 구체적 명령에 반응을 하는 모양이다.
당연히 가치 판단이나, 독자적인 선택은 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긴 그래야 아바타겠지.’
35층의 미션은 이 아바타를 이용해서 다른 플레이어의 텃밭을 털고 때로는 내 텃밭을 지키기도 해야 한다는 것.
공략집이 이곳에 일찍 오도록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아바타 조종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함일 터.
그렇다면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움직여 볼까? 앞으로 가!”
지시의 정도가 명확해지자 아바타 인형은 몰랑몰랑한 양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 미련한 녀석은 벽에 부딪히기 직전까지도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좌회전!’
이번에는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려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 녀석은 귀가 없기에 내 말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녀석은 나의 의지에 따라 이동을 하며, 그것이 꼭 음성 언어일 필요는 없다.
차악!
예상대로 아바타는 내 의지를 이해하고 방향을 틀었다.
[아바타의 지시 따르기가 능숙해졌습니다.]
객관적인 수치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이것은 명백한 레벨업 메시지.
그렇다면, 최대한 다양한 행동들을 해 봐야겠다.
‘뛰어 봐!’
이 아바타가 텃밭을 털기 위해선 몇 가지 필요한 능력들이 있다.
일단 잘 뛰어야 하며,
‘팔 굽혀 펴기 실시!’
근력도 아주 중요하다.
저 조그마한 체구로 나무를 뿌리째 뽑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젠 일어서서 스쿼트 실시.’
물론 상·하체를 고르게 발달시켜 주어야 한다.
저 밀가루 반죽같이 부실한 하체로는 나무 타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아바타의 하체가 미세하게나마 강화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최소 5일 이상은 34층을 빠르게 클리어했을 터.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이 녀석과의 특훈에 매진해야겠다.
싸움도 좀 가르치고.
* * *
나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은 거의 동시에 이 방으로 전송되었다.
이들의 첫 반응은 나와 거의 비슷했다.
미션의 내용에 당황하고, 생성된 아바타의 모습에 또 한 번 당황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나처럼 아바타를 훈련시킬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나비야?’
그사이 아바타에게 이름도 붙여 주었다.
영화에 나오는 나비족에서 따왔을 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와! 이게 뭐야! 마나수에 지혜의 나무?”
“그런데 무슨 마나수가 이렇게 커!”
“텃밭 섹터도 뭔가 좀 넓어 보이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의 홀로그램에 집중되었다.
당연히 나의 텃밭.
예상했던 바이고, 그래서 더 부지런히 나비를 훈련시켜 놓았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집중 공격은 확률 높은 시나리오니까.
“그럼 간단하네. 우리가 다 같이 연합을 맺는 거야!”
궁수형 플레이어 임종수가 선동질을 시작했다.
“연합?”
“그래. 각자 자기 텃밭의 가치만 증가시면 되는 것이니 한 명만 희생하면 되는 거잖아! 그럼 누가 희생하는 것이 옳을까?”
여론은 아주 쉽게 모아졌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나의 텃밭은 죽창 꽂기에 딱 좋은 곳이니까.
“누구지? 저 텃밭의 주인 말이야.”
“나.”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 바로 공개했다.
“오오! 모두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주인공이시군.”
임종수는 내게 다가오며 말을 이어 갔다.
“미안하지만, 한 명의 희생양이 필요해. 그럼 나머지 일곱 명이 살 수 있으니까.”
“네가 희생할 생각은?”
“없어.”
그 순간 탑으로부터 모두에게 메시지가 전해진다.
[35층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바타를 홀로그램 속으로 투입하여 텃밭 털기를 시작하십시오.]
[플레이어 간의 무력 충돌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남은 시간: 3시간]
“자! 다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고 있지?”
임종수가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저 녀석의 입장도 이해한다.
이곳은 비정한 아포칼립스의 탑이니까.
본인이 살기 위해서는 마땅히 남을 희생시킬 수도 있는 곳.
때로는 나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임종수처럼 저렇게 단순해서는 앞으로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텃밭이 저 정도 수준이면, 텃밭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지도 생각을 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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