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34층 세계관의 문명 발달 정도를 지구로 비교하자면 산업 혁명기의 유럽 수준.
이 세계의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몬스터의 등장이라고 한다.
몬스터는 인류에게 거대한 위협인 동시에 새로운 에너지원인 마정석을 품은 존재이니까.
대(大)몬스터 시대가 열리며 이 세계관에서 가장 각광 받게 된 직업은 역시 ‘몬스터 사냥꾼’.
그동안 군인이나 용병으로 2류 인생을 살던 무인들이 이제는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된 것이다.
[남은 시간: 13일 18시간]
[호감도: -15]
[상거래 수익: 0 헤르메]
신주아와 나는 34층 시작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도시 하렌티노로 이동했다.
하렌티노는 몬스터 암시장이 성행하는 곳인 데다가 우리에게 안성맞춤인 사냥터가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
성문을 나서 조금만 이동하면, 인근의 신출 사냥꾼들이라면 한 번은 거쳐 간다는 ‘뿔삵 대목장’이 펼쳐지는데, 사실 대목장이라는 명칭은 이곳에서 정말로 뿔삵이라는 몬스터를 기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은 아니다.
이 주변은 그만큼 포털 생성이 빈번하여 어디서나 뿔삵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와! 몬스터 반 사냥꾼 반이네.”
놀라운 광경이었다.
지금 이곳이 만약 게임이라면, 극심한 렉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사냥꾼들이 득실거렸다.
“1층에서나 잡던 이런 쪼렙 몬스터를 34층에 와서 잡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게.”
“경쟁자들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방에 다 쓸어 버리고 싶은데.”
신주아는 어깨에 양날 도끼를 걸쳐 매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워워! 덕분에 우리 같은 무면허도 맘 놓고 사냥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잖아?”
뿔삵 대목장에는 감시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많은 인원이 정말로 공인된 사냥꾼인지를 검사하는 것 자체가 인력 낭비일 테니까.
일단, 오늘은 뿔삵의 사체 몇 개를 들고 가서 암시장 거래처를 뚫는 것이면 족하다.
어차피 뿔삵 몇 마리 판다고 해서 목돈이 되는 것도 아닐 테고.
“내기할까? 누가 먼저 10마리 잡나.”
“사양하겠습니다.”
“하여간 재미없는 스타일이야.”
“당신과는 가위바위보도 사절입니다.”
말하는 것만 보면 꼭 뭔가 알고 말하는 수준.
예언가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신주아의 독특한 캐릭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호구 잡힐 일은 없어서 좋을 것 같다.
현재 그녀의 호감도가 +35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테고.
지이이잉-
그 순간 내 눈앞에 조그마한 포털이 나타난다.
그 안에서 곧바로 튀어나오는 뿔삵 한 마리.
크앙!
작은 체구지만 녀석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앞세워 내게 달려들었다.
솨아악-
나는 오랜만에 엘리시온을 꺼내 뿔삵의 심장을 향해 찔렀다.
하위종 몬스터이기에 어차피 1초 컷.
관건은 포털을 얼마나 빠르게 발견해 내느냐의 문제이다.
“한 마리 성공!”
나는 신주아를 보며 승리의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내기 아닙니다.”
“혼자 재미로 하고 있는 거야. 여긴 좀 따분하니까.”
그 순간 다시 한번 내 앞에 포털이 나타난다.
벌써 두 마리째.
이렇게 페이스가 빠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목돈은 못 만져도, 계획을 앞당길 수는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제가 당신 근처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럴지도.”
어쩌면 니케의 반지가 주변의 포털 생성 확률을 먹어 치우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 * *
“장물을 팔고 싶다고 하셨소?”
점포 주인은 우리의 행색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신주아와 나의 외형적인 모습은 사냥꾼과는 거리가 많이 멀다.
특히 신주아의 저 가녀린 팔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양날 도끼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지가 의아할 정도.
“저희가 장물을 파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지금은 신주아가 전면에 나선 상황.
별다른 이유는 아니다.
34층에선 호감도가 높을수록 거래에 유리하다고 하였으니까.
“흠…….”
“의심은 거두시죠. 저희는 단속반에서 나온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하긴, 사냥꾼보다는 단속반이 더 안 어울리는 얼굴이긴 한데.”
타다다다닥.
뒤에서 잠자코 있던 나는 오늘 잡은 뿔삵의 사체들을 인벤토리를 열어 풀어놓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에서 삵들의 사체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지자 점포주인의 눈이 동그래진다.
“이, 이게!”
“모두 예순일곱 마리입니다.”
내가 잡은 것이 쉰아홉. 신주아가 열여덟이다.
“이게 다 오늘 잡은 거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것도 겨우 단둘이서?”
“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내 말에 순간 주인장의 낯빛이 돌변한다.
그리고 이어진 싸늘한 목소리.
“돌아가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장물 거래라지만 신뢰가 기반 되어 있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거래하지 않소. 괜히 돈 몇 푼 만지려다가 골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의심이 많아서 장물 거래는 어떻게 하십니까?”
“나만의 생존 비결이지. 일말의 의심이라도 드는 상대방과는 절대 거래하지 않는 것. 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문제 생길 일은 만들지 않는 주의라오. 그러니 가시오.”
“그러니까 지금 주인장 말은, 우리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고 절대로 못 믿을 사람이다?”
“잘 아는군. 아무리 암거래라고 해도 말은 바로 해야지. 하루 만에 단둘이서 예순 일곱 마리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말이 된다면요?”
“말이 된다고 해도 난 안 믿을 생각이오. 이런 믿음은 누가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니까. 그러니 그냥 돌아가시오.”
“그럼 여기 쏟아 놓은 사체들, 주인장이 다 가지세요.”
나는 인벤토리를 닫고는 점포 주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는 은은하게 마나를 발출했다.
“방금 뭐라고 했소?”
“다 가지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장물이라 처리 못 하면 괜히 우리도 골치만 아프니까.”
“…….”
이 황당한 상황에 점포 주인은 말을 잇지 못한다.
“라는 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더 믿으시는 눈빛 같습니다만?”
“방금 날 놀린 거요?”
“놀린 건 아니지만, 눈빛은 흔들리시더군요. 날 못 믿을 사람 취급해 놓고는 이 말은 믿고 싶으셨나 봅니다?”
나는 온몸으로 발출하는 마나의 양을 조금 더 늘려 나갔다.
협박을 하려는 것까진 아니고, 적당히 도움이 될 만한 위압감 정도만 풍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한번 한 말을 번복하진 않습니다. 이 사체들은 전부 놓고 갈 테니. 주인장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
이어진 침묵. 그래도 도로 가져가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정 찝찝하면 버리시든가요.”
“……그래서 원하는 건?”
걸려들었다.
이 정도 반응이 왔다는 것은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
“주인장과 거래하고 싶다는 겁니다. 당신이 꽤 능력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거라서 말입니다.”
내 말에 점포 주인의 눈빛이 또다시 흔들린다.
더군다나 내가 발출한 마나의 기운은 이곳의 공기를 은은하게 채운 상황. 일반인이 감당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점포 주인은 나름 배포는 있는 남자였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호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잡아 온 예순일곱 마리. 내일 한 번 더 할 수 있겠소?”
“어려울 건 없지요.”
“그렇게 장담을 하니 역시 의심을 안 할 수가 없군. 당신들도 알다시피 뿔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득실대는 경쟁자들이 훨씬 더 난관이니까 말이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고, 조건은 그게 답니까?”
“뭐, 일단은.”
“그럼 내일 또 오죠.”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점포를 떠났다.
이 모든 것은 계획에 없던 돌발적 상황이었고, 신주아와는 사전에 전혀 합을 맞추지 않았으나 그녀는 눈치껏 내게 모든 걸 일임하며 따라 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내일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거 같아?”
“점포 주인의 성격상, 내일 은밀하게 사람을 붙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냥 모습을 지켜보려고?”
“그렇습니다. 내버려 두고 간 뿔삵의 사체가 신경이 쓰일 테니 말입니다.”
“그럼, 결국 내일은 잘 풀릴 거란 얘기로군.”
하루의 딜레이.
하지만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건 나도 신주아도 알고 있다.
점포 주인 메이홉. 이 인근에서는 그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다음 날, 우리는 같은 점포에 와서 바닥에 뿔삵의 사체를 우수수수 털어놓았다.
정확히 예순일곱 마리.
어제와 정확히 같은 숫자였다.
“오늘 잡은 거 맞습니다.”
이젠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주아의 예상대로 메이홉은 오늘 은밀하게 사람을 붙여 우리를 감시한 상태니까.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나 보다.
결국 우리와의 거래를 승낙한 메이홉.
“그런데 두 사람에게 궁금한 게 있소.”
“대답해 드릴지는 일단 들어 보고 판단하죠.”
“왜 하필 나와 거래를 트려는 것이오? 하렌티노에 몬스터 암시장이 성행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선택지가 없지는 않았을 텐데.”
“화끈하게 한탕 하려고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한.”
“그게 무슨 뜻이오?”
“저희는 고작 뿔삵 몇 마리 잡아서 팔 생각은 없습니다.”
메이홉은 내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사람을 붙여 우리를 감시했으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자격 사냥꾼이긴 하나 보통은 아니란 것을.
“그럼, 좀 더 상급의 사냥터로 가겠다는 의미요?”
“그냥 평범한 상급으로 갈 생각도 역시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디를…….”
“한 방에 100만 헤르메를 땡길 수 있는 곳.”
“100만 헤르메라고 했소? 당신들, 아무래도 미친 것이 분명해 보…….”
“참고로 미치지 않았습니다. 동반 자살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가장 최근에 사냥터가 생성되었으며, 지금껏 단 한 번도 공략된 적이 없는 몬스터.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지는 메이홉 당신도 알 거라 생각합니다.”
“와이번 말이오?”
“네. 일단 잡기만 하면 시작 가격은 100만 헤르메일 거라 들었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왜 우리가 무자격 사냥꾼인지는 묻지 마시고, 와이번 사냥터에 좀 보내 주시죠?”
예상대로 메이홉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나 같이 평범한 상인에게 무자격자를 사냥터에 보낼 권한 같은 게 어디 있단 말이오?”
“평범하다니요. 왕실 쪽에 줄 대는 곳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왔습니다. 제가 다른 곳을 제쳐 두고 당신과 거래를 튼 이유. 이 정도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되었습니까?”
메이홉의 로비 능력은 이미 교차 검증되었다.
처음엔 주점에서 만난 주정뱅이 노인, 그다음엔 공략집으로부터 말이다.
[메이홉을 만나 상급 사냥터 입장과 관련된 딜을 맺으십시오. 그는 당신을 어느 곳으로든 보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단,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나와 신주아의 호감도를 더하면 +20.
적어도 거래로 손해 볼 일은 없으며, 와이번 급이면 장물 거래라 해도 100만 헤르메 이상은 확실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와이번을 상대하는 위험은 꽤 크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34층을 가장 빨리 끝내려면 이 방법밖에.’
서두르는 이유는 공략집이 보내온 단서 하나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군주 ‘상인들과 도둑들의 수호자’는 현재 34층과 35층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34층을 빨리 끝낼수록 35층에서 이어질 텃밭 관련 미션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텃밭이라 함은 지난 33층에서 모든 플레이어들이 분양받은 그것일 터.
34층의 클리어가 늦어진다면, 뭔가 꺼림칙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도둑들의 수호자라.’
그냥 34층은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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