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초조할 이유는 없다.
나의 거대한 마나수도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 수확의 과실은 일반적인 범주를 아득히 벗어날 것이란 확신이 있으니까.
결실의 달콤함은 기다림의 시간과 비례할 것이다.
“호영이 형!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크크크. 설마 열매가 평생 안 맺히기야 하겠어?”
세용이 녀석.
위로라기보다는 놀림이 9할이다.
녀석은 자신의 마나수에 열린 열매 다섯 개를 보며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용아.”
“어, 형.”
“기분 좋아 보인다.”
“아, 미안! 형 앞에서 너무 티내면 안 되는데. 크크크.”
네가 즐겁다면 그걸로 됐다.
어쨌든 마나수 열매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
사실, 내게는 마나수 말고도 만만치 않게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지혜의 나무.
채이설과 최정혁의 경우에도 마나수 대신 이걸 선택했을 만큼, 지혜의 나무는 33층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 중 하나이다.
당연히 생장 수준은 내 것이 압도적.
다른 것들보다 높이는 세 배가량 더 뻗어 있으며, 잔가지의 수도 대략 대여섯 배는 많다.
토지 개간 비용만 50만 골드이니, 이 정도의 차이는 마땅히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호영 씨의 텃밭에서는 뭐든 다 잘 자라네요. 지혜의 나무 말이에요, 제 것보다 훨씬 크네요!”
채이설은 내 텃밭을 보며 해맑게 웃는다.
똑같이 골드를 써 놓고 결과가 다르니 시샘을 할 만도 한데, 이 여자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할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똑같은 골드도 아니지만.
“제가 운 좋게 비옥한 텃밭을 분양받았나 봅니다.”
“운이라니요!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네?”
“호영 씨는 본인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항상 이타적인 결정을 내리잖아요. 이번 일은 그런 것들에 대한 보상일 거라 생각해요.”
이런 면에서 채이설은 유일하다.
나로 하여금 일말의 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데 이설 씨는 마나수 대신 지혜의 나무를 선택하셨네요. 직업이 힐러다 보니 마나가 많이 필요할 텐데.”
“사실 고민이었어요. 호영 씨 말대로 저는 힐러다 보니 마나 소모가 꽤 크니까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바꿨어요. 어쩌면 이 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왜죠?”
“그동안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린 호영 씨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저도 지혜를 얻게 되면 호영 씨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 거죠. 어쩌면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
이것은 명백한 채이설의 실책.
지혜가 아닌 공략집 때문이었다고 말해 줄 수도 없고, 어쨌든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되길 바랄 뿐이다.
채이설이 잘못 짚긴 했지만, 지혜의 중요성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니까.
“잘 선택한 게 맞겠죠?”
“아마도요. 제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면 저도 이설 씨와 같은 것을 골랐을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물론 선의의 거짓말이다.
되돌릴 수 없다면, 채이설 본인이 그렇게 믿는 쪽이 훨씬 유익할 테니까.
“제 텃밭의 흙이 아무래도 좀 비범한 구석이 있는 거 같은데, 이설 씨가 원하시면 일부는 팔 의향도 있어요.”
“얼마죠?”
“한 삽에 만 골드입니다.”
당연히 공짜는 안 된다.
신주아가 흔쾌히 거래한 가격이니 채이설에게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다.
신주아의 마나수는 아주 잘 자라 주었고, 열매 또한 다른 것들보다는 눈에 띄게 크게 열렸으니까.
“만 골드…… 요?”
“싸지 않다는 건 압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이설 씨의 선택이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요.”
“살게요.”
“신중하게 고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호영 씨가 제안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채이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내게 사간 흙은 총 4만 골드 치.
확신한다.
분명 채이설은 그보다 훨씬 큰 결실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걸.
‘그런데 기분 탓인가?’
30층과 31층에서 경험한 지혜의 버프가 벌써 느껴지는 것만 같다.
검을 휘두르며 직접 수련을 해 봐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이 느낌은 그때의 그것과 유사했다.
아직 다 자라려면 한참 남았을 텐데, 벌써부터 이 정도면 아주 기대가 된다.
이제부터 내 검술의 성취는 비약적으로 빨라질 것이다.
‘그다음은 테렌의 독초.’
2섹터짜리 작물 중에서는 가장 비싼 놈 중에 하나다.
내 텃밭의 한쪽 구석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랏빛 물결. 그곳에서는 독초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테렌의 향을 인벤토리에 담습니다.]
이렇게 33층의 작물들은 언제 어디서든 바로 사용이 가능하도록 이렇게 인벤토리와 연결되어 있는 방식이다.
나는 인벤토리에 들어온 독초의 향을 다시 마나를 사용하여 성검으로 옮겼다.
- 야, 너! 미쳤어?
성검 가이아는 화들짝 놀라며 바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 이 미친놈아! 성검 뜻 몰라? 내 성스러운 몸에 뭐를 담은 거냐고!
“대신 좋아하는 걸 줄게.”
- 이런 미친놈! 네놈 피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나는 독을 머금은 성검의 날을 이용해 내 피부에 살짝 흠집을 내 보았다.
직접 독의 성질이나 위력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다.
작물 상점에 설명되어 있는 ‘극독’이라는 표현은 너무 애매하니까 직접 내 몸으로 느껴 볼 생각.
[테렌의 독이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갑니다.]
미세한 생채기일 뿐이지만, 순간적으로 침투한 독은 혈액의 순환에 요동을 일으키려 했다.
상태창에 표시된 내 스탯들의 숫자들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모든 스탯이 5.4 퍼센트 감소합■■.]
상태창 메시지는 바로 에러를 일으켰다.
[만독불침의 특성이 테렌의 독을 해독합니다.]
독의 침투와 동시에 해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테렌의 독이 어떤 것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가장 우수한 점은 침투 속도.
만독불침이 있음에도, 내 스탯에 일시적인 손상을 일으켰을 만큼, 테렌의 독은 퍼지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자해로 만든 생채기가 아닌 제대로 된 검상이었다면, 분명 스탯의 손상은 더욱 컸을 터.
경우에 따라서는 만독불침을 상대로도 아찔한 순간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투 속도뿐만 아니라 테렌의 독의 놀라웠던 점은 바로 성능.
나에게 만독불침의 특성이 없었더라면, 스탯 감소는 더욱 가혹한 수준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며, 고통 또한 상당했을 것이다.
결국 내 마나의 대부분을 해독 작용에 소진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어쨌든 지금은 검에 발라서 사용해 봤지만, 실전에선 총과 결합할 생각이다.
마나탄과 독의 조합은 완벽한 선빵이 되어 줄 것이다.
- 이 어이없는 녀석! 한 번만 더 내 몸에 이상한 짓을 해 봐라!
성검 가이아는 연신 투덜거렸다.
독초의 성능을 확인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백년설화.
물약 기능을 가진 이 꽃의 효과는 한번 사용에 내 체력의 10퍼센트 정도를 단숨에 회복시켜 주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서른 송이 정도가 피어 있으며, 한번 사용된 백년설화의 자리에는 다시 새싹이 피어난다고 하니, 잘 계산해서 안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만하면 꽤 만족스러운 텃밭의 포트폴리오.
계속해서 잘 자라 주길 바랄 뿐이다.
* * *
[34층을 시작합니다.]
로비로의 복귀 없이 우리들은 다음 층으로 이동하였다.
지난 33층이 쉬어 가는 층이었으니, 매운맛이 한 번은 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34층의 테마는 무난해 보였다.
미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아직까지는 말이다.
‘상인들과 도둑들의 수호자?’
이번 34층 군주의 독특한 별호.
미션 또한 군주의 별호와 무관하지 않았다.
[상거래를 통하여 100만 헤르메를 모으십시오.]
[불법적으로 취득한 상품은 판매 물품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단, 사냥은 예외]
[제한 시간: 14일]
[실패 시: 텃밭 회수]
헤르메는 34층의 화폐 단위.
100만 헤르메가 어느 수준인지 아직 감은 오지 않지만, 서둘러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미션 실패가 사망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얼핏 보기에 관용 넘치는 처사로 비칠 수 있지만, 탑은 결코 그런 곳이 아니다.
14일이라는 시간제한은 결코 넉넉할 리가 없다.
[무작위로 파티를 구성하겠습니다.]
과연 이게 무작위가 맞을지.
아니면, 탑의 농간이 개입되어 있을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당신의 파트너는 신주아입니다.]
이로써 신주아랑만 세 번째.
무작위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
탑이 원하는 그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신주아와 함께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능력치의 밸런스가 가장 훌륭하며, 내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이기도 하니까.
파티가 구성되고, 우리들은 각기 다른 시작 위치로 뿔뿔이 흩어졌다.
[호감도: -15]
달빛의 명사수 때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이번에도 역시 마이너스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공략집의 짤막한 설명에 따르면, 이번 34층에서 호감도는 능력치뿐만 아니라, 한 가지 특이한 작용을 하게 된다.
상거래의 조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똑같은 물건을 팔아도 남길 수 있는 이윤이 호감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행인 점이라면, 현재 신주아의 호감도는 +35.
내가 가진 디메리트를 상쇄하고도 남는 수준이다.
- 야, 이호영. 네 호감도가 왜 낮은지 내가 한번 추측해 볼까?
성검 가이아는 갈수록 말이 많아지는 느낌이다.
- 네가 호구라서 그래. 군주가 ‘상인들과 도둑들의 수호자’인데 너 같은 호구한테 좋은 감정을 느낄 리가 없잖아? 33층에서 네가 했던 짓만 봐도 그래. 내가 볼 땐 텃밭의 흙을 그렇게 싸게 팔지 않아도 됐거든? 한 삽에 2만 골드를 불렀어도 신주아는 기꺼이 사 갔을 거라고!
이런 수다쟁이가 나와 교감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꾹 참고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
- 어쨌든 호감도 올리려면 호구 짓은 그만 좀 하자.
너무 시끄러웠기에 나는 성검을 잠시 인벤토리에 박아 두기로 했다.
“100만 헤르메라. 신주아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이지?”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뻔하지 않겠습니까?”
이 낯선 세계에서 우리가 믿을 거라고는 잘 단련된 몸뚱어리.
34층의 세계에도 몬스터는 존재할 것이며, 자본금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사는 결국 이것밖에 없다.
우리의 일정을 지체시키는 살짝 번거로운 설정이 있었지만 말이다.
“몬스터 사냥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요?”
“젊은 친구가 자꾸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 생긴 건 멀쩡해 보이는데.”
정보를 얻을 겸, 신주아와 함께 주점을 찾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처음엔 모자란 놈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무허가로 몬스터 사냥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당연히 몬스터의 한 끼 식사 거리가 되는 거지!”
“만약, 무허가지만 몬스터를 잡는 데 성공을 한다면요?”
내 질문에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자란 것을 넘어서 미친놈 취급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내가 술값을 내주겠다고 하니, 원하는 대답은 꼬박꼬박 들을 수 있었다.
“걸리면, 몬스터는 환수되어 국고로 넘어가겠지. 안 걸린다고 해도 제값 받고 팔 순 없을 거야. 암시장에서 그런 불법 장물은 시세의 10분의 1 받으면 후한 편이니까.”
“결국 사냥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로군요.”
“당연한 걸 또 물어보는구만. 그런데 허가를 받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개나 소나 다 허가를 내줄 거면 시험을 치르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내가 개나 소라는 얘기로 들리는 건 착각도 자격지심도 아닐 것이다.
“……뭐, 그렇지요. 그럼 자격 시험은 보통 언제 있습니까?”
“매년 말. 지금부터 대략 반년 정도 남았는데 왜? 설마 자네가 자격 시험을 준비하려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4일.
결국 싸게 팔더라도 불법 사냥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의미다.
다행히 미션 조건에 따르면, 사냥은 유일하게 불법이 인정되는 분야.
“아닙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자격 시험 준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
“가까운 암시장 위치나 좀 알려 주시죠.”
“암시장? 그건 뭣 하려고!”
일단 거래처 한 군데부터 뚫어 놓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두 번 실력을 보여 주면, 분명 조건은 점점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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