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아름답다.’
성검이 내게 보여 준 심득의 잔상은 어느새 희미해져 가고 있었지만, 그 느낌만은 아직 강렬하게 남아 있다.
무영추혼검의 한 초식을 펼쳐 내던 환상 속의 이호영.
그것은 당분간 내가 지향해 나가야 할 이정표가 될 것이다.
- 기대할까 봐 또 얘기하는데, 두 번은 없어.
성검은 못을 박았다.
고로, 내가 지금 해야만 하는 건 그 잔상의 한 자락이나마 움켜쥐는 것.
성검은 우아한 직선을 그려 내며 허공에 붉은 물감을 뿌려 놓았다.
기억의 재생은 성공적이다.
[거인 곰왕을 쓰러뜨렸습니다.]
이 광활한 헬리오 산에 마지막까지 남게 된 것은 단둘.
김세용과 나뿐이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뭐, 어차피 우승은 형이 하겠지만.”
김세용의 말투는 담담했다.
녀석은 내 앞에서 우승을 욕심내지 않았고, 겸허히 이번 대회의 이인자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난감하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거인곰과의 대결에서 내 모든 마나를 소모하여 버렸다.
마나통을 탈탈 털어 티끌까지 쥐어짤 수밖에 없었던 건, 이 빌어먹을 호감도 때문이었다.
[호감도: -60]
32층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한다면 기적적인 변화지만, 여전히 디버프의 저주는 두터웠으며 이는 나의 운신을 상당 부분 제약하고 있었다.
우승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건 김세용이 아닌 바로 나였다.
이제는 커밍아웃을 해도 될 타이밍이다.
“세용아.”
“어, 바로 시작할까? 어차피 금세 끝날 텐데.”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시작하기 전에 해 줄 말이 있다.”
“왜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난리야? 설마 날 죽이겠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오버하는 게 전형적인 김세용의 모습이다.
“봐주는 게 아니니 기분 나빠할 것도 없고,”
“뭔 소리야!”
“네가 날 이겼다는 사실을 나 역시 받아들일 생각이다.”
“뭐 잘못 먹었어?”
“비록 탈진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상대해 주지. 그래야 너도 이번의 승리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김세용은 나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다.
당연히 내 상태를 눈치챘을 리가 없다.
32층의 첫 순간부터 호감도를 숨겨 왔고, 디버프 따위는 없는 것처럼 행동했으니 이 둔한 녀석은 내가 끊임없는 생사의 줄타기를 해 왔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것 같은 개운함이 밀려왔다.
“정말?”
“그럼 내가 널 속일 이유가 뭐가 있겠냐.”
“그거야 그렇지만, 형은 탑의 총애를 받는 플레이어잖아! 그런데 왜 호감도가 그따위였던 거야?”
“몰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세용에게 살성 얘기까진 해 줄 수 없으니까.
“크크크크.”
“좋냐?”
녀석의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처음 경험하게 될 좋은 기회네. 크크크크.”
“들어와라. 세용아.”
“아니. 형이 들어와. 지금 형에게 그런 멘트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러고는 녀석은 자신의 멘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실실대며 내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놈은 지금 상황을 제대로 즐겨 볼 생각인 게 분명하다.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춰 줄 생각도 있다.
슈욱!
나는 성검을 고쳐 잡은 후 김세용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마나가 1% 회복되었습니다.]
어?
“호영이 형! 드루와! 드루와!”
기묘한 일이었다.
달빛의 명사수가 혹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녀석을 향해 한 걸음을 더 다가갔다.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마나가 1% 회복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군주의 격을 지닌 존재가 두 번이나 실수를 했을 리는 만무하며, 이 탑에서 시스템 에러를 일으켰을 리도 없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곧바로 일어나고야 말았다.
김세용을 향해 성검을 치켜든 그 순간.
[호감도가 +2 상승하였습니다.]
[마나가 2% 회복되었습니다.]
[호감도가 +2 상승하였습니다.]
[마나가 2% 회복되었습니다.]
[호감도가 +2 상승하였습니다.]
[마나가 2% 회복되었습니다.]
스윽!
나의 성검은 김세용의 옷깃을 베어 내고야 말았다.
[호감도가 +3 상승하였습니다.]
[마나가 4% 회복되었습니다.]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마나가 6% 회복되었습니다.]
“씨파! 내 이럴 줄 알았어!”
“뭐?”
“그 말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호감도와 마나 회복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의도와 달리 김세용을 놀려 먹은 꼴이 되어 버렸지만, 이 상황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미안하다. 세용아.
[남은 시간: 5초]
32층에서의 남은 시간이 드디어 공개되었다.
대미를 장식하기에 5초면 충분한 시간.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달빛의 명사수는 왜 날 그토록 싫어했으며, 지금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일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호감도가 +10 상승하였습니다.]
지금 호감도는 절정을 향해 빠르게 도달하고 있었다.
* * *
차원의 틈새.
제나는 내가 왔음에도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사 안 해 줘?”
“쓰레기.”
“뭐?”
“이호영 너는 개쓰레기야.”
사부 이후로 이런 극딜을 받아 본 건 오랜만이다.
더군다나 밑도 끝도 없이 만나자마자 쓰레기라니.
“욕을 먹을 때 먹더라도 이유는 좀 알고 싶은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어.”
“모른다니까, 더 쓰레기처럼 보이네.”
제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있긴 한 모양.
결국 녀석은 내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너, 혹시 바람둥이냐?”
바람둥이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사전적 의미가 맞다면, 얼토당토않은 질문이다.
바람은커녕 나는 모태부터 지금까지 늘 솔로였으니까.
하지만 반박하려는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혹시 호감도 때문에?”
“그래. 이 쓰레기야!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어떤 군주의 영역으로 들어가든지 호감도를 절대 50 이상으로 올리지 말라고.”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너도 봤으면 알겠지만, 불가항력이었다고 이 멍청아!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호감도가 미쳐 날뛴 거라고!”
“아무튼 넌 쓰레기야! 그분께서 받으실 상처를 생각하면, 와! 진짜 말이 다 안 나오네!”
[쓰레기!]
[ㅆㄹㄱ!!]
이로써 한 번 더 확인한 셈이다.
내게 공략집을 보내는 군주는 ‘지혜롭고 순결한 자’라는 것을.
그때도 호감도의 언약을 깨뜨린 것은 마찬가지인데, 온도 차가 대놓고 너무 심하다.
어차피 감출 생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말하지만, 난 결백하고 억울해. 심지어 32층의 마지막 직전까지 내 호감도는 -60이었다고!”
이는 명백한 사실.
제나가 쓰레기라는 말만 반복할 뿐, 날 차원의 틈새에 계속 두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 두고 볼 거야. 호감도 50 이상은 절대 안 돼!”
“항상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나저나 이번에 날 여기로 소환한 이유는 뭐지?”
제나는 한참을 뾰로통한 얼굴로 날 노려보다니 결국 입을 열었다.
“성검 때문이야.”
“성검? 가이아가 왜?”
“네가 32층을 마무리하는 순간, 특이점이 찾아왔거든. 그 이후로 성검의 목소리를 들어 볼 기회가 없었지?”
“당연하지.”
이곳 차원의 틈새에 도착한 것은 바로 방금 전이니까.
그리고 그 순간 성검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포털을 열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게 되었다.
“정말?”
사실 그 조건이 무엇인지까지는 모른다.
제나도 성검도 그 부분에 대해선 가르쳐 줄 생각이 없는 듯하고.
“너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이 때문이야. 이번에 열게 될 포털은 그때와는 상당히 다를 예정이기도 하고.”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당시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왕성을 끝낸 이후 성검으로 포털을 열어 도착한 곳은 바로 이 차원의 틈새.
그땐 나의 의지로 여기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포털이 이곳으로 형성되었을 뿐이니까.
“이번에 넌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거야.”
“서, 설마!”
“그 설마가 맞아. 네가 원하는 장소를 지정할 수 있게 된 것이지. 물론 여기엔 약간의 제약이 따르겠지만 말이야.”
기적 같은 일이다.
비록 나의 의지가 아닌, 성검이 일정 조건을 만족하게 되어 포털을 여는 것이지만 포털을 형성할 장소에는 나의 의지를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너무 비현실적이기에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다.
“……그런데 약간의 제약이라 하면?”
“탑의 모든 곳을 자유자재로 갈 수는 없다는 의미야. 너와 연결 고리가 있는 곳으로만 이동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연결 고리가 강할수록 포털이 형성될 확률은 높아지지.”
“조건이 갖추어졌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 보군.”
“당연하지. 넌 아직 보잘것없는 존재니까.”
제나가 말하는 연결 고리는 그 종류가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한 번 가 본 장소, 혹은 만났던 사람도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이야기로만 들었던 곳이라 할지라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이 경우의 성공 확률은 매우 희박하겠지만.
“당장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
“그게 어디지?”
“사부가 있는 곳.”
사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이번에 새롭게 도달하게 된 무영추혼검의 경지를.
사부는 어떤 형태로든 내게 피드백을 줄 것이며, 그것은 나의 발전을 가속화시켜 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쓰레기 소리는 좀 듣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나의 대답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곳은 불가야.”
“왜지?”
“그곳에선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만약 네가 그곳으로 포털을 형성하겠다고 한다면, 소중한 기회를 한 번 날려 버리게 될 거야.”
무슨 일인지는 물어보아도 소용없을 터.
그렇다면 이제 차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행히 나는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엄밀하게 따져 보면 차선도 아니다.
격만 놓고 본다면 그는 사부와 동급이니까.
“그럼, 혈마가 있는 곳.”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듯 무영추혼검이나 수라마혈검이나 추구하는 검의 본질은 결국 같다.
현재의 내 성취를 혈마에게 보여 주더라도 얻을 게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도 불가야.”
“왜지?”
“네 사부와 같은 이유. 그 이상은 물어봐도 안 알려 줄 거야.”
같은 이유라…….
설마 그 노인네 둘이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기라도 한 것인가?
그냥 장난으로 떠올려 본 생각.
하지만, 그 순간 혈마가 내게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사부와 겨루어 보고 싶다고 했던 그 말.
물론 나만의 망상일 공산이 크겠지만, 흥미로운 상상이었다.
두 선택지가 모두 기각이라면, 다른 장소의 매력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연결 고리라고 해 봐야 이미 겪고 지나간 과거의 장소와 인물들일 뿐이니까.
‘잠깐!’
그 순간, 실험해 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연결 고리는 일반적으로 과거의 것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래이다.
‘내가 가 보지 못한 곳. 그리고 가야만 하는 곳.’
심지어 혈마는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탑은 플레이어의 등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커지고 있다고.
이 말의 의미는 일반적인 등반으로는 어쩌면 영원히 탑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만약 그렇다면 성검이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 주어야만 한다.
“제나, 포털을 열어 33층을 미리 가 볼 수는 없을까?”
“뭐? 아직 가 보지도 않은 곳을 가겠다고?”
“궁금하니까.”
“공략집이 있잖아.”
“어쨌든 지금 궁금한 것은, 현시점과 한 층위의 연결 고리가 어느 정도로 단단하냐는 것이야.”
“어려운 질문이네. 시도해 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포털 형성이 실패할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해.”
그렇다 해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이상 시도해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더욱이 사부와 혈마가 있는 곳이 불가하다면, 이 시도는 충분히 가치 있는 실험이다.
그것이 설령 실패한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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